가정제는 명나라의 4대 암군 중에서도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도술에 빠져 나랏일은 뒷전이었으며 신선이 되려고 수은과 처녀의 피를 주재료로 한 단약을 꾸준히 먹었다고 하네요.
중국 역사상 가장 특이한 황제 가정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에는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옆나라인 명나라에도 세종이 있긴 있었지만 명나라 세종은 최고의 암군으로 불리고 있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명나라 11대 황제인 암군 가정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그는 흥헌왕 주우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었지만 그의 사촌형이자 전임 황제였던 정덕제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음 황제로 추대되었죠.
가정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는데요.
문제는 정덕제의 아들이나 친동생도 아닌 사촌동생이었던 자신이 황제가 되면 자신은 백부였던 홍치제의 아들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친아버지였던 흥헌왕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명재상이던 양정화와 수많은 대신들은 백부인 홍치제의 양아들로 들어가 홍치제를 황고(皇考)라 하고 친아버지인 흥헌왕은 황숙부(皇叔父)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가정제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부모를 어떻게 바꾸냐며 아버지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해 황고로 하고 홍치제는 황백부라 칭해야 한다고 한 것이죠.
사실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제가 흥헌왕의 뒤를 이은 것이 되면 황족 직계 자손들이 아닌 방계도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또 정덕제 처럼 후사 없이 황제가 사망하게 되었을 때 황족이면 누구나 다 '다음 황제는 나도 될 수 있겠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힘만 있으면 황제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정화 등 대신들은 극구 반대를 했던 것인데 결국 가정제는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면서 이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가정제를 반대하던 양정화와 대신들은 파직되었죠.
이 일로 인해 조정 대신 190여 명을 파직, 유배형을 보냈고 장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때 있었던 예송논쟁 비스무리 한 것으로 이 사건을 '대례의 의'라고 불렸죠.
이후 가정제는 환관이 추천해 준 도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는데요.
자신을 신선이라 칭할 정도였고 그러다보니 나라를 돌보는 것에는 소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도사들과 방사들을 궁으로 불러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져 엄청난 국고가 손실되었죠.
그리고 이 도사들과 방사들에게 돈을 주고 각지로 보내 불로장생의 약초를 찾아오라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엄청난 호색한이기도 했는데요.
전국 각지에 관리들을 풀어 민가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선발해 궁녀로 입궁시키도록 명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궁녀를 선발했는데 선발할 때마다 규모는 천여 명에 달했고 그중에서는 8세에서 14세의 어린 여자아이 1000여 명도 여기에 포함되어 궁으로 끌려왔죠.
그가 궁녀를 끌어모은 이유는 자신의 욕정을 푸는 것도 있었지만 바로 자신이 스스로 불로불사의 단약을 만들기 위해서 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침이슬과 어린 여자의 월경혈, 수은, 비소 등의 중금속을 섞어 단약을 만들었는데 이 단약을 '원성순홍단'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과거의 중국인들은 수은을 신묘한 힘이 들어있는 액체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걸 복용하면 오래 살수 있다고 믿었죠.
진시황제도 수은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다 결국 중금속에 중독되었을 정도였습니다.
가정제 역시 그렇게 믿고 불로불사의 명약을 만드는데 이 수은을 사용한 것이죠.
또한 여기에 들어가는 재료 중 특히 여자의 월경혈은 반드시 어린 여자의 첫 번째 월경혈을 넣었어야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전국 각지에서 궁녀로 잡아왔던 12~14세의 소녀들을 궁안에 가두어 놓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월경혈을 얻기 위해서 아침에 맺힌 이슬만 먹이고 식사도 거의 주지 않았다고 하죠.
그는 역대 황제들 중 여색에 가장 빨리 빠진 황제였으며 어찌보면 궁녀들을 괴롭히는데는 도가 튼 황제였습니다.
행여나 궁녀가 싫은 기색을 내보이거나 자신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면 가혹한 매질을 하기에 일수였죠.
그가 얼마나 궁녀들을 혹사 시켰는지는 한 가지 큰 사건이 벌어지는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양금영을 비롯한 16명의 궁녀들은 가정제의 학대가 극에 달하자 그가 애첩 단비 조씨와 함께 잠이 든 틈을 타 그곳으로 침입해 황제의 목을 졸라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가정제의 암살을 시도한 16명의 궁녀들은 결국 황후 방씨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고 모두 저잣거리로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임인궁변' 이라고 불리게 되었죠.
그런데 황후 방씨가 궁녀들을 처형시킬 때 가정제가 총애하던 단비 조씨까지 이 사건에 연루시켜 함께 처형시키고 말았는데요.
이에 화가난 가정제는 황후를 불러 엄청 화를 냈었죠.
그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황후의 거처에서 불이 났는데 앙심을 품고 있던 가정제가 불을 끄지 말고 그냥 내비둬라고 했고 결국 황후가 불타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야사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가정제의 행실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하면 그에게는 총 4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첫 번째 황후인 진씨는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가정제에게 발로 차였고 그때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뱃속에 있던 아이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죠.
두 번째 황후 장씨는 가정제가 만든 단약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다 결국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황후방씨가 죽을 때도 가정제는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무튼 그는 점점 더 도교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도교의 제문(祭文)을 잘 짓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기도 했다고 하죠.
게다가 그는 무능한 암군이다 보니, 명나라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간신이었던 '엄숭'이 권력을 잡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저으며 매관매직과 부패를 일삼았죠 그러다보니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밖으로는 북쪽에선 여진족과 타타르족이 자꾸 만리장성을 넘어와 수시로 명나라 백성들을 약탈했습니다.
게다가 몽골의 알탄칸이 베이징을 포위한 사건인 '경술의 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상해와 남경, 복건, 강소, 광주 등의 남쪽 도시에서는 왜구들의 노략질과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났죠.
또한 1556년에는 산시 대지진이 발생해 엄청나게 많은 인명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정제는 수은이나 중금속이 가득 들어있는 단약을 먹고도 생각보다 장수를 하는데요.
1567년에 '왕금'이라는 방사가 바친 단약을 먹고 병에 걸려 앓아누웠다가 결국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렇게 명나라는 안팎으로 엄청난 몸살을 앓으며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가 죽고 나서 100년도 되지 않은 1644년에 숭정제를 끝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태껏 많은 폭군과 암군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가정제는 또 다른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대부분 술이나 여자, 아니면 폭정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도술 같은 것에 빠진 황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명나라 쇠퇴와 멸망의 방아쇠를 당긴 암군 가정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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