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평가가 시급한 고구려의 숨은 명군, 고국양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 두 명군 사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고구려의 18대 국왕 '고국양왕'입니다
소수림왕의 동생이자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종종 간과되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는 단순히 위대한 형과 아들 사이의 '평범한' 통치자였을까요?
오늘은 고국양왕의 업적과 그의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의 진정한 가치를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384년 11월,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의 동생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련' 또는 '어지지'라고 전해지는데요
소수림왕이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을 때, 고국양왕은 이미 장년의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되죠
고국양왕의 즉위는 고구려 왕실의 특이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의 아버지 고국원왕이 41년간 재위했고, 형인 소수림왕도 14년을 통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국양왕의 나이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죠
더욱이 그의 아들인 광개토대왕이 즉위 당시 18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구려 왕실에 아들이 귀했던 상황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국양왕은 즉위 직후부터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는데요
그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인 385년 6월,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한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요동은 고구려의 적국이자 고국양왕의 할아버지인 미천왕의 묘를 도굴한 후연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죠
고국양왕은 요동과 현도 지역을 점령하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오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력 과시가 아닌,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은 결과였죠
고국양왕의 요동 공격은 당시 동아시아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383년 비수 전투에서 전진이 동진에게 대패하면서 화북 지역이 다시 분열되고있는 상황이었죠
이 혼란을 틈타 모용수가 연나라의 부흥을 꾀하며 후연을 건국했고, 요서와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고국양왕 또한 이러한 힘의 공백기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죠
그의 군대는 후연의 방어선을 뚫고 요동군과 현도군을 함락시켰으며, 1만 명의 포로를 잡는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비록 같은 해에 후연의 모용농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반격해 일시적으로 그 지역을 회복했지만, 이는 고구려가 요동진출을 하는 서막에 불과했던 것이죠
중국 측 기록에는 후연이 이 지역을 회복했다고 나와있지만, 이후의 정세를 보면 고구려가 곧바로 반격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 5년조 기사를 보면 광개토대왕이 거란족인 비려를 정벌하고 '양평도'를 통해 귀환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시기에 이미 고구려가 요동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죠
이는 고국양왕 때의 요동 공격이 단순한 약탈전이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한 전략적 행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히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고, 요동의 주민들을 고구려로 이주시켜 인구를 흡수함으로써 고구려의 국력을 강화했던 것이죠
단기간의 정복보다는 장기적인 국력 증대에 중점을 둔 전략적 판단으로 평가할 수 있을텐데요
또한 이러한 군사적 승리와 인구 흡수는 고국양왕이 고구려 내부에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기여를 했을 겁니다
결국 고국양왕은 요동 지역의 경제적, 인적, 전략적 가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고구려의 국가 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던 것이죠
고국양왕은 군사적 업적 외에도 소수림왕이 이루어 놓은 정치적 개혁을 충실히 계승했습니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고구려의 내실을 다지는 개혁을 추진했으며
고국양왕은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불교를 더욱 장려하면서 불교의 국가적 위상을 한층 높였습니다
또한 그는 유교적 국가 체제를 강화하는 데도 힘을 쏟았는데요
종묘와 사직을 수리하도록 명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다졌죠
이러한 정책들은 고구려가 보다 체계적이고 선진화된 국가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고국양왕은 형의 개혁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며 고구려의 안정을 도모했던 것이죠
고국양왕은 또한 외교에도 능했는데요
392년에는 신라와 화친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이때 신라의 왕족인 실성을 인질로 붙들어 놓으면서, 후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의 신라 복속 외교의 기반을 마련했죠
하지만 고국양왕의 재위 기간 중에 고구려는 자연 재해로 인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386년에는 이상 기후로 복숭아와 오얏꽃이 겨울에 피는 기현상이 일어났고
388년의 극심한 가뭄과 메뚜기 떼의 습격, 389년의 홍수와 기근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완전 파탄나게 되었죠
이러한 재난 속에서 고국양왕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며 기근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그가 민생을 중시하는 왕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죠
고국양왕은 소수림왕과 광개토대왕 사이에 끼어 그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요
고국양왕의 치세는 8년에 불과했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고, 국내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소수림왕에 이어 후대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특히 그의 아들인 광개토대왕이 18세의 나이에 즉위해 곧바로 정복 사업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고국양왕의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평범한 통치자가 아닌 비범한 통치자였던 고구려의 숨은 명군, 고국양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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