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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무타구치 렌야. 한국 독립을 위해 싸운? 2차 세계대전 최악의 일본장군

by 사탐과탐 202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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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이 무능하면 아군에게 적보다 더 위협이 된다는 말을 손수 일본군에게 보여준 이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무타구치 렌야 입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 사람을 조롱도 많이 하는 2차 세계대전에서 최악의 장군으로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일본에선 삼대 오물 중 한 명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10년 앞당겼다고 평가되는 일본의 무타구치 렌야 입니다.

그는 일본군에서 중장까지 올라갔던 대단한 인물이었죠.

 

한국에서는 사실상 한국인이나 독립운동가 혹은 일본군 내부에 한국광복군이 심은 스파이 등으로 불리며 조롱당합니다.

 

당연하지만 그는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일본을 패망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능함으로 일본을 파멸로 몰고 갔기에 조롱당하는 것이죠.

 

무타구치 렌야

 

그의 어이없는 노답 행보의 시작은 다름 아닌 중일전쟁 이전에서부터였습니다.

때는 1937년, 무타구치가 노구교에서 연대장으로 복무 중일 때였습니다.

 

훈련 중 휘하 병사 한 명이 화장실을 갔는데 갑자기 인원 한 명이 비자 사태 파악도 하지 않고, "중국인들의 소행이다!"라며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 중국군을 향해 공격명령을 내립니다.

워낙 뜬금없는 공격명령이라 부하들이 "정말 공격해도 됩니까?" 라고 되물으며 황당해 했을 정도였죠.

이 노구교 사건은 계기로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어 버립니다.

 

일본군 모습

 

그리고 정작 본인은 전투에 참여를 하지도 않았는데 작전회의 때는 멀쩡한 팔에 붕대를 감고 다친 척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한 쇼였죠.

 

이 사건 뒤 아이러니하게 무타구치는 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전투를 참가했고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의 무능력의 끝판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1944년에 벌어진 '임팔작전' 이었습니다.

 

임팔작전

 

전략적 요충지였던 임팔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중요한 작전이었데 무타구치는 제15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일어날 지역의 길은 굉장히 척박하고 정글 지역이라 자동차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급의 문제로 작전을 반대하는 세력이 생기자 무타구치 렌야는

"전쟁에 보급이 왜 필요하냐?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와 말을 이용해 옮기고 그 후에 소와 말을 잡아먹으면 된다"

 

라고 망언을 해댔고, "그러면 수송수단으로 쓸 가축들의 사료는 어떻게 마련하냐" 라는 질문을 받자 "행군 중에 풀을 뜯어 먹이면 되지" 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합니다.

 

소나 말에게는 건초 사료를 먹이는 게 정상이고 풀을 뜯어 먹게 하려면 적당한 초지에 데려가서 몇 시간 동안 마음껏 뜯어 먹게 해야 하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기껏해야 사람이 밥 먹듯이 하루 3번 20~30분 정도 생풀을 뜯어 먹게 했습니다.

결국 행군 중에 많은 소와 말들이 굶어 죽었고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가거나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거나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보급품 수송에 쓰려던 가축들이 죽는 바람에 물자와 식량들도 함께 사라졌으며 지쳐서 쓰러진 가축들의 짐은 모두 하급 병사들에게 떠넘겨져 험난한 정글을 행군하다가 많은 병사들이 탈진과 부상에 시달렸죠.

 

일본군 모습

 

그리고 그 많은 짐들을 감당할 수 없던 병사들은 몰래 버리기도 해서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과 무기들이 더욱더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그 상황에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다.

이렇게 푸른 산과 정글에 둘러싸여 있는데 무슨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이냐.
풀을 뜯어 먹으며 진격하라."

라며 위대한 말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각종 독초를 뜯어먹고 부대 전체가 쓰러졌다든지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뱀, 도마뱀, 새, 원숭이 등 각종 동물은 물론 벌레까지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는 증언들이 무수히 많았다 합니다.

물론 저런다고 식량 부족과 굶주림이 해결될 리가 없으니 결국 부대 체계가 무너지고 각종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일본군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후퇴도 못하고 보급도 끊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벌레나 풀뿌리만 겨우 뜯어먹다 보니 굶어 죽거나 급기야 아군의 시체를 먹을 만큼 개막장 상황이 벌여졌죠.

 

쫄쫄 굶어가며 영국군과 전투를 하니 이길리 만무했고 패색이 너무 짙어지자 철수를 요구한 연대장에게는 "작전 수행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정신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라고 오히려 다그쳤다 합니다.

 

임팔작전으로 투입된 일본군의 수는 92,000명이었지만 전투도 제대로 못하고 고작 13,000명의 병력만 간신히 살아서 정글을 빠져나왔는데 그중 전투로 인해 부상이 심했던 사람을 빼면 고작 3,000명만이 그나마 멀쩡했다고 하죠.

 

이것은 전 세계 전쟁 역사상 흔히 볼 수 없는 대전멸이었습니다.

 

 

그런 사상 최악의 결과를 낳은 무타구치 렌야는 그래도 좀 미안했는지 부관에게 자결하는게 좋겠냐고 물었는데 수석 부관이던 후지와라 이와이치는,

 

"아무도 없는 데서 하십시오.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패전의 책임 같으면 장군님이 할복하고도 남습니다." 라며 조용히 권총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라는 할복은 안하고 또 노답인 행동을 합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하기까지 했던 것이죠.

 

아무튼 이 인간 덕에 영국군과 미국군은 동남아 지역에서의 전쟁이 거의 예상 작전 기간보다 약 8개월 정도 일찍 끝났다고 합니다.

 

그나마 전투력이 남아있던 육군을 몽땅 퍼부은 임팔작전이 전멸 수준으로 대패하자 일본은 빠르게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8월15일 일본 패망 후 일본군의 장성들은 연합군에 의해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워낙에 연합군 승리에 큰 기여를 하는 업적을 많이 세웠기에 무죄로 석방됩니다

 

물론 무타구치 렌야의 무능력에 의해 일본군이 전투에서 패했지만 그가 무죄 석방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일본군들이 자행했던 학살을 그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것이죠.

 

그는 적들에게 학살은커녕 학대도 하지 않았으며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생체실험 등 일체의 반인륜적인 행동도 하지 않아 적에게는 '따사로운 무타구치 렌야장군' 이라는 칭호도 얻었습니다.

 

그는 장군으로 있으며 수많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치한 적군의 수보다 할복시킨 일본 군인의 숫자가 더 많았습니다.

 

일본군 내에서도 그에 대한 비난이 속출했으나 무타구치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끝까지 할복하지 않고 버티다 1966년 7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무타구지 렌야

 

사망하기 전 충격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잘못 없고 전부 부하들 탓이다" 라는 희대에 명언을 남겼고 장례식에 온 손님들에게 위에서 언급한 책임 회피용 유인물을 돌리게 했다고 합니다.

 

무능력한 적은 아군이라는 그 말이 딱 맞는 좋은 예시를 증명해낸 희대의 무능한 장군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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