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엄청난 큰 업적? 두 가지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입니다.
어린 홍위병을 선동하여 스스로 중국의 4000년 역사를 파괴해버리고 자멸해버리고 마는데 고작 10년만에 중국은 북한보다 못사는 나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죠.
그들이 지우고 싶어하는 과거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59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모택동은 국가 주석 자리에서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류소기가 국가 주석 자리를 이어 받게 되었죠.
류소기와 등소평이 실용주의 정책을 펼치며 인민들의 지지를 얻고 당 내에서도 영향력이 커지자 모택동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에도 모택동은 군통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거역할 수는 없었지만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기에는 명분이 없었죠.
그렇지 않아도 초조해하는 모택동의 심기에 불을 지핀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팽덕회라는 사람으로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 라고 비판했는데 이 소리를 듣고 개빡친 모택동은 팽덕회가 맡고 있던 국방부장 자리에서 그를 자르고 그 자리에 임표를 앉혔습니다.
그리고 류소기는 당내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 <공작조>라는 조직을 만들어 대약진운동의 대실패로 인해 벌어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느끼는 민중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반정부적인 세력 중 제일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바로 북경의 대학생들이었죠.
이때 모택동은 "자본주의 세력들이 다시 중국 사회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발 붙이지 못하게 젊은 청년들이 바로잡아야 합니다!" 라는 연설을 하는데 그 말의 표적은 류소기와 등소평이었고 그들의 탄압을 당하던 대학생들을 옹호했던 것이죠.
그러자 모택동의 옹호를 받은 대학생들은 너도나도 눈 뒤집혀서 모택동을 신격화했고 숭배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맹목적으로 모택동에게 충성하던 학생들은 '홍위병'이라는 집단이 됩니다.
그러던 중 언제 터질지 모르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중국은 <해서파관>이라는 연극이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폭발하게 되는데요.
해서파관이라는 연극은 북경의 부시장 '우한'이 지은 희곡으로 청렴결백한 '해서'라는 관리가 폭군인 황제에게 파직당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런데 원래 이 연극은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 라며 모택동이 제작하라고 지시해서 만들어진 연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모택동의 아내 강청과 요문원이 신문에 "<해서파관>은 모택동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폭군 가정제는 모택동을 뜻하고, 해서는 팽덕회를 지칭한다!" 라고 주장한 것이죠.
이에 모택동은 다시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라 보고 수많은 선전매체를 동원해서 북경의 시장과 부시장을 맹공격했고 임표도 모택동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으며 홍위병 대표단은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자!' 라며 모택동을 옹호했습니다.
그러자 모택동은 "요새 젊은이들이 참 잘한다" 라고 홍위병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서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 라는 논평을 발표하며 류소기와 등소평에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죠.
이렇게 중국의 문화를 중국 국민들이 스스로 다 때려 부수며 개난장 파티를 벌이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1966년 8월 8일. 모택동은 16개 조항을 발표하는데요.
내용은 쉽게 말해서 "내 말이 진리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자신의 친위대인 홍위병들의 활동에 제약 없는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모택동의 무한 신뢰에 눈 돌아간 홍위병들은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라!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이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파사구(破四舊)라 하여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척결하고자 했는데요.
나중에 모택동은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 라고 지시했는데 그러자 누구의 제제도 받지 않고 홍위병들은 더욱더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홍위병들의 무자비하고 무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나라를 개박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들이 '옛것은 모조리 숙청하라' 라는 명분으로 유적이나 문화재를 파괴한걸 전부 다 말하기엔 너무나도 많아서 우리가 알만한 것들 몇 개만 이야기하자면 공자의 묘를 파헤쳐 봉분을 없애고 평탄하게 만들어 버렸으며 묘비와 비석도 다 부숴버렸고 공자상도 도끼로 개박살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사당에 있던, 1300년 된 대성문의 명필 현판을 떼내어 부숴버렸죠.
초한지의 영웅, 항우의 패왕묘와 우희묘도 천년의 시간 동안 보존되어 내려왔는데 모두 파헤쳐 버려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땅에 반쯤 묻힌 석사자 뿐이라고 하네요.
또한 이화원의 불향각이 부서지고 대불도 훼손 되었으며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를 지내오던 포청천의 묘 마저도 훼손되었습니다.
그리고 모택동이 심혈을 기울여 보존하던 명나라 말기의 명장이자 민족영웅인 원숭환의 묘를 파내어 평지로 만들어 버렸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도 베어버렸죠.
게다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영웅인 악비의 묘 또한 농민 혁명을 가로막은 구시대의 산물이라며 그의 묘를 파헤쳐 악비의 유골을 태워 재로 만들었고 악비의 동상을 부숴버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원장의 황릉석비, 석인, 석마 등을 폭약으로 터트려 버렸으며 황성도 다 때려 부숴 버렸죠.
그리고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금성의 외성 역할을 해준 북경 성곽을 완전히 철거해 버렸고 자금성의 황성과 내성 또한 모두 헐어버렸습니다.
주은래가 배치한 자금성 경비병이 없었다면 아마 자금성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고도 하죠.
게다가 송나라 대문호 구양수의 <취옹정기>를 송대 서예의 대가 소동파가 글을 썼고 그 글을 새긴 비석이 안휘성 제현에 있었는데 거의 천년의 풍파를 버텨온 이 비석도 홍위병의 무식한 패악질은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홍위병들은 이 석비를 넘어트려 소동파의 글을 파냈으며 취옹정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훼손시켜서 지금까지도 문화재 무엇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죠.
또한 그들은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백마사에서는 약 천 년 전 요나라 때도 있었던 18나한상과 2천여 년 전 인도 고승이 가지고 온 패엽경도 산산조각 내서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이외에도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고 수천 년을 버텨온 문화재들이 '봉건적이고 낡은 것들을 없앤다'라는 명분으로 모두 소실되었죠.
중국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싹 지워버린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1990년대에 들어서 복원되거나 현재까지도 복원작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원래 모습을 알 수가 없어 영영 복원을 못하는 것도 많고 또 원래 모습과는 완전 다르게 엉터리로 복원된 문화재도 있다고 하죠.
그나마 다행인건 주은래가 미리 손을 쓴 덕분에 홍위병의 화마를 피해 간 문화재도 있는데요.
항주의 유명한 사찰인 영은사도 홍위병들에게 파괴 당할 뻔했는데 주은래가 절 입구와 대웅전에 모택동 사진을 붙여 놓으라고 지시해서 영은사를 파괴하러 들이닥친 홍위병들이 모택동의 사진을 보고 홍위병들이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죠.
그리고 포탈라궁이나 막고굴에도 주은래의 은밀한 지시로 더 파괴당하는 일은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과학자들에게 경호 병력을 붙이기도 했다고 하죠.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점은 매국노로 평가받던 원세개의 묘지는 모택동이 "이런 자도 역사에 있었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라고 해서 무사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 장군의 묘는 파헤치고 부숴버리고 이완용의 묘는 남겨놓은 거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현재는 중국보다 한국에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사료가 세세하게 많이 남아있어서 우리나라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고 한국이 공자의 나라인 중국보다 유교 관련 문화가 더 잘 보전 돼있다고 하죠.
그리고 중국 내에 있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도 다행히 홍위병의 광기에서 피했는데 그 이유는 주은래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역사가 아닌 한민족의 역사라 했기에 무사했다고 합니다.
또한 홍위병들에 의해 황실 궁중 예식이나 황실 요리서적 등도 사구(四舊)로 찍혀 모조리 불태워졌는데 중국 은나라 시대부터 현대까지 약 4,000년간 내려오던 중국의 식문화와 황실 요리도 단 3년 만에 소실되어 버렸죠.
문화대혁명 때 소실된 중국 황실 요리 중 대표적인 사례가 만한전석으로 이는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대접할 때 나온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요.
지금은 요리들의 순서나 조합법 등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코스요리처럼 순서대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한꺼번에 식탁에 다 올려놓고 먹는 것인지 만한전석을 먹을 때 예법이나 식순 같은 것들이 전부 다 불태워져 현재는 전혀 알 수가 없게 된 것이죠.
지금도 중국에는 전통 만한전석이라며 그걸 판매하는 요리점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전통적인 방식이나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것과 상관없는 그냥 요리를 진열해놓고, 자기네들끼리 전통 만한전석이라며 부를 뿐이라 합니다.
또한 문화재를 파괴하면서 함께 파괴된 것이 종교였는데요.
교회와 성당의 건물과 성모상, 예수상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웠으며 각 종교들의 재산도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코란을 불태우고 이슬람교의 사원인 모스크를 일부로 돼지를 사육하는 시설로 만들었으며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했죠.
서장 티베트 자치구에서는 티베트 불교 사찰 6000여 곳이 불타거나 파괴되었고 승려들은 쫒겨나거나 학살 당했으며 그 학살당한 승려들의 시신은 완전히 부패할 때까지 대로변에 전시했다고 합니다.
또한 승려들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동물들을 죽이게 하기도 했고 강제로 환속당한 승려들은, 많은 대중들 앞에서 강제로 남녀승려끼리 관계를 하도록 강요했죠.
게다가 티베트 불교 사찰 중 가장 큰 사원이던 간덴 사원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 시켰고 수많은 경전과 관련 문서들은 화장실 똥휴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포탈라궁도 무식한 홍위병들에게 개박살 날뻔했으나 문화재를 지키려고 했던 주은래가 "이런 건물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후대에 봉건 계급이 어떻게 농노들을 착취했는지 교육할 수 있다" 라며 홍위병들을 설득해 파괴되지 않고 겨우 살아남았다고 하죠.
그리고 그 유명한 소림사도 파괴되었는데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봉건주의적 사상이라며 파괴했다고 하죠.
그 덕에 소림사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무술 서적이나 전통들도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훗날 소림사를 복원했지만 원래대로 복원된 것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죠.
게다가 중국의 국기(國技)라고 일컬어지는 바둑도 금지했으며 음악, 연극, 미술, 영화 등 거의 모든 분야의 문화작품들도 모두 다시 개작되거나 작살나기도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홍위병들에게 붙잡혀 조리돌림 당한 후 집단 농장이나 공장으로 보내져 노동착취를 당했죠.
류소기 또한 권력투쟁에서 패해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시골로 내려가 농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모택동에게 부탁했지만 들어주지 않았고 중병에 걸렸지만 치료도 없이 그냥 방치되어 결국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등소평은 당직에서 쫓겨나 지방의 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1973년, 주은래가 복귀시켜 줄 때까지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방금 나열한 일들이 전국적으로 동시에 발생해서 단 3년 만에 모든 일이 벌어졌던 것이죠.
그리고 대약진운동으로 말아먹었던 경제를 류소기가 그나마 수습했던걸 다시 한번 제대로 말아먹었습니다.
1967년에는 -5.7%, 1968년도에는-4.1%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는데 이때 북한이 중국보다 잘 살아서 질 좋은 물건을 얻기 위해 중국인들은 북한으로 찾아갔을 정도였다고 하죠.
문화대혁명의 일선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날뛰는 홍위병들은 군대처럼 지휘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았고 그냥 자생적으로 여러 명이 뭉쳐서 만들어진 깡패 같은 조직이라 한마을이나 학교에서도 여러 분파가 존재했습니다.
나중에 홍위병들은 자기네들끼리 중화기로 무장해 서로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모택동은 인민해방군을 출동시켜 홍위병들을 진압해 버렸고 홍위병들은 농촌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살게 되었죠.
그들은 훗날 모택동이 죽고 난 후 1970년대 후반이 돼서야 비로소 다시 도시로 돌아와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홍위병들은 현재 60~70대의 나이가 되었는데 자신이 홍위병이었다는 사실을 숨긴다고 하죠.
어쨌든 더 이상 자신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진 모택동은 훗날 자신의 후계자로 임표를 삼으려고 했는데 중국-소련 간의 국경분쟁에서 임표와 모택동은 서로 척을 두게 되었고 결국 임표는 모택동을 암살까지 하려고 했지만 실패해 죽게 됩니다.
1973년 주은래가 모택동에게 건의해 등소평이 다시 정계로 돌아오게 되었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 4인방과 대립했지만 모택동은 죽기 전에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으며 화국봉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죠.
그리고 1976년 9월 9일,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두 가지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 낸 모택동은,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죽고 난 후, 화국봉은 4인방을 체포하며 드디어 길고 길었던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죠.
1969년에 모택동은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이 끝났다고 선언한 적이 있지만 모택동의 죽음과 4인방의 체포까지 여러 혼란스러운 일들과 변혁을 통틀어 문화대혁명 기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4000년의 역사를 가진 중화문명을 중국인들 스스로 다 때려 부숴버린 문화대혁명 때문에 중국은 문화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단순히 중국 문화유산을 파괴한 것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지식인들과 엘리트들을 다 숙청했으며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반들도 모조리 박살 내버렸기 때문이죠.
최근 중국이 한국 고유문화인 김치, 한복, 태권도 등을 자국의 것이라고 왜곡시키는 저열한 짓을 하는 것도 문화대혁명 후에 생긴 문화 콤플렉스로 인해 타국의 문화를 강탈해서라도 그 콤플렉스를 해소하고자 하는 의도가 크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모택동은 거의 국가를 파탄시킨 인물이 되어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를 칭송하는걸 보면 중국이 중국한거 같네요.
'소국이라 하기엔 땅이 너무 넓고, 대국이라 하기엔 사람들 속이 좁으니 중국이라고 한다' 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이유가 여실히 잘 드러나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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