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명으로 1만명을 상대해 600여명 이상을 사살한 인도의 전설적인 전투 사라가리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오늘은 19세기말 인도 북서부 국경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
'사라 가리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합니다
21명의 시크교도 병사들이 놀라운 용맹을 보여주며
무려 만 명이나 되는 적들을 상대로 활약했던 전투죠
이 이야기는 현재 파키스탄의 동북쪽
연합부족자치지역(FATA) 남쪽에 위치한 사라가리(Saragarhi)에서 시작됩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 보면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 있는데요
19세기말, 이곳은 영국이 통치하던 인도제국의 최전방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들이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영역과
현지 부족들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 사이의 경계에
'굴리스탄'과 '록하트'라고 불리는 두 개의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다만 굴리스탄과 록하트에는
두 요새 사이에 직접적인 통신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죠
때문에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라가리라는 요새를 추가로 건설했습니다
사라가리 요새는 통신을 위한 중간 기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곳에는 단 21명의 시크교도 병사들만이 배치되었죠
참고로 '시크교'란 15세기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만들어진 종교를 말합니다
사라가리 요새의 주요 임무는 헬리오그래프를 이용한 통신이었는데
헬리오그래프란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모스 부호를 전달하는 통신 수단을 말하죠
이 기술을 이용하면 낮에는 햇빛을, 그리고 밤에는 불빛을 이용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과도 통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헬리오그래프를 여러 전쟁에서 활발하게 활용했다고 합니다
헬리오그래프를 가장 최근까지 사용한 국가는 파키스탄으로
1975년까지 이 방식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 이 기술이 비교적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건조하고 평탄한 지형에서 주로 유용하게 쓰이는 기술이기 때문에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897년 9월 12일 현지의 아프간계 무슬림들인
아프리디와 오라크자이 부족이 영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세 개의 요새 중 가장 약한 거점인 사라가리 요새를 공격했죠
당시 요새에는 하빌다르 이샤르 싱이 지휘하는
21명의 시크교 장병이 주둔하고 있었던데 반해
아프간 부족군의 수는 무려 10,0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심지어 20,000명에 이르렀다고도 하죠
병력의 숫자만 보면 전투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사 한 명당 500대 1의 전투를 벌여야 했으니까요
그대로 요새를 버린 채 도망가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21명의 시크교도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휘관 하빌다르 이샤르 싱은 부하들에게
"죽을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우자"고 격려했죠
그리고 정말 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싸웠습니다
이 전투의 가장 놀라운 점 중 하나는
바로 모든 과정이 실시간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인데요
헬리오그래프 담당병이었던 세포이(영국군이 고용한 인도인 용병) 구루묵 싱은
동료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록하트 요새에 보고했습니다
덕분에 록하트와 굴리스탄 요새에서는
이 모든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현재의 우리 또한 이 전투의 자세한 경과를 알 수 있게 되었죠
전투가 시작되자 엄청난 수의 적군이 몰려왔고
미리 성벽 위에 자리 잡고 있던 이샤르와 19명의 부하들은
적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상대 저격수들이 엄호사격을 해주는 상황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성벽 아래에 달라붙었지만
시크족 군인들은 상대 저격수들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백발백중의 사격으로 가까이 붙는 적들을 모두 쓰러트렸죠
생각보다 강한 수비에 깜짝 놀란 적들은 곧바로 후퇴해 버렸고
그렇게 첫 번째 공격이 끝났습니다
머지않아 적들이 또다시 몰려오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첫 번째 공격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몰려왔죠
이샤르와 부하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적군을 물리쳤고
때로는 성벽을 기어올라온 적들과 육탄전까지 벌여야만 했습니다
절망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며 계속해서 전투를 이어갔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죠
첫 번째 희생자는 저격수에게 당한 세포이 백완 싱이었습니다
그의 동료인 나익 랄 싱과 세포이 지와 싱은
치열한 전투 중에도 백완의 시신을 성벽 아래로 수습해 줬지만
얼마 후 랄 역시 부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되죠
하지만 동료들이 쓰러졌음에도 시크교도들은 끝까지 싸웠다고 하는데요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적을 물리쳤고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물리쳤습니다
적군들은 정면으로 공격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사각지대를 통해 성벽 안으로 침투해 오기 시작했고
성안의 시크교도들은 곧 수십 명의 적군들과 육탄전을 벌여야만 했죠
하지만 그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성벽 위의 적들을 모두 물리쳐버렸고
기가 질린 적들은 또다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을 이끌던 우두머리는 사라 가리 요새에 있는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이샤르와 부하들은 이를 거부했고
잠시 후 마지막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됐죠
성의 주변에 불까지 질러대며 몰아치는 공격에
결국 20명의 시크족 군인들이 모두 전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헬리오그래프 담당병인 구루묵 싱이었죠
그는 록하트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지휘관
호튼 대령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헬리오그래프를 닫고 라이플을 들도록 명령해 주십시오"
그가 이제 통신 임무를 끝내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의미였죠
허가를 받은 구루묵 싱은 신호탑에서
무려 40명이 넘는 적들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결국 적군들은 신호탑의 점령을 포기하고 타워를 통째로 불태워버렸는데
구루묵은 불에 타 죽어가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에게 승리가 있다"라는 뜻의
시크교 전투 외침을 반복해서 외쳤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죠
"왜 주변 요새에서는 이 전투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으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엄청난 수의 아프간 부족군이
지원군이 올만한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급히 반격준비를 시작한 영국군은 이틀 후 사라 가리 요새에 도착했고
아프간 부족군은 영국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으며 요새를 다시 내주고 말았죠
요새를 되찾은 영국군이 현장을 살펴보니
요새의 안과 밖에서 600구가 넘는 적군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1명밖에 되지 않는 병사들이 만 명이 넘는 적들을 상대로 싸워
600명이 넘는 적들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고
장렬히 전사한 것이었죠
이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영국은 21명 모두에게
당시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인도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이 전투를 영웅적 전투로 칭송하고 있으며
시크교도들은 매년 9월 12일을 '사라가리의 날'로 기념하고 있죠
또한 영국군은 사라가리 요새에서 불탄 벽돌들을 이용해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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