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양녕대군을 쏙 빼닮았는지 원래 똘끼 가득했던 서산군 이혜는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는데요.
그의 악행 때문에 세종과 문종이 곤란한 적이 많았고 왕족이다 보니 벌하기도 참 애매했었습니다.
조선 초 왕족 중에는 개막장 망나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이었죠.
너무나도 프리하게 막살았던 양녕대군은 수많은 자식이 있었는데요.
양녕대군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았는지 아버지의 망나니짓을 뛰어넘는 또라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로 서산군 이혜 였죠.
그는 왕족의 신분을 이용해서 나라에서 금지한 짓까지 쉽게 쉽게 해버렸는데요.
그것은 바로 의금부에서 금지했던 석척희라는 돌팔매 놀이를 한 것이었죠.
석척희라는 놀이는 단오절 때 하는 놀이였는데요.
두 패로 나눠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전쟁을 하는 놀이였고 그러다가 막대기로 사람을 두들겨 패기도 해서 많은 사람이 다쳤기 때문에 이 놀이를 금지 시켰던 것이죠.
그런데 당연히 모범을 보였어야 할 왕족들이 이 전쟁놀이를 했던 것이죠.
심지어 이혜와 이겸은 각각 스무 명 정도의 남자들을 모아서 나타났고 각자 편의 대장이 되어 막대기 휘두르며 신나게 놀아 댔죠.
며칠씩이나 그렇게 놀아대니 다친 사람도 수두룩했고 심지어 죽어버린 사람까지 나와 이 일은 큰 문제로 대두되었죠.
이 사건을 알게 된 사헌부에서는 이 일에 연루된 왕족 종친들을 탄핵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세종은 내가 직접 묻겠다 하며 석척희의 주모자인 이혜와 이겸을 불러들였고 그들의 죄를 물어 도성 밖으로 추방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석척희를 할 때 양녕대군도 함께 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양녕대군과 이혜의 부자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거 같네요.
하지만 석척희 사건은 이혜가 저지른 수많은 쓰레기 짓거리들 중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죠.
이혜는 원래도 똘끼가 다분했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을 완전히 돌아버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아버지인 양녕대군이 자신의 애첩을 겁탈한 후 빼앗아 버린 것이죠.
아버지의 그런 얼토당토안한 행동 때문에 이혜는 점점 더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439년 1월 20일. 종묘제를 7일 앞둔 날이었습니다.
태종의 딸 숙정옹주와 결혼을 한 부마 일성군 정효전은 제관으로 뽑혀 서계를 하게 되었죠.
서계란 큰 제를 올리기 7일 전 제관으로 뽑힌 관원들이 의정부에 모여 술이나 고기를 금지하고 춤추고 노는 것, 상갓집에 조문하는 것 등을 금하며 몸을 정갈히 하는데 이를 어길 시에 처벌을 받는다는 서약이었죠.
하지만 노는 것 좋아하고 음주 가무에 환장했던 정효전은 서계를 한 후에 이혜 등과 함께 영돈녕부사 권홍(權弘)의 집에 모여서 파티를 벌였죠.
그런데 이때 한양에서 최고로 예쁘다는 기생 소지홍과 김규월 등도 함께 권홍의 집에서 술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대난장 파티를 벌였는데 문제는 기생 소지홍이었습니다.
소지홍은 정효전과 뜨거운 애인 사이였는데, 이혜와도 사통하는 사이이기도 했죠.
더 쇼킹한 부분은 정효전은 이혜의 고모부였습니다.
고모부와 조카가 한 여자랑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셈이죠.
그래도 서로는 몰랐을 테니 그렇다 치고 아무튼 시간이 지나 신나고 즐거운 대난장 파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효전이 소지홍과 뜨밤을 보내기 위해 어디론가로 데리고 가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이혜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왠 남자 놈이 내 사랑 소지홍과 걸어가는 걸 보고 눈 돌아간 이혜는 즉시 달려가 소지홍의 손목을 확 낚아챘는데 그 남자 놈이 알고 보니 고모부 정효전이었죠.
이때부터 정효전과 이혜는 소지홍을 차지하기 위해서 길바닥에 구르며 쌈박질을 시작했습니다.
왕실의 친척들이 기생 한 명을 두고 누가 데려가서 뜨밤을 보낼 것인지 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개싸움을 벌이며 경쟁한 것이죠.
심지어 이혜는 노비들 패싸움 틈에 끼어서 주먹질을 해대다가 머리에 쓰고 있던 망건까지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죠.
사헌부에서 이 기가 막힌 사건을 알게 되어 세종에게 아뢰었습니다.
그리하여 서계를 어긴 정효전은 하옥시켰고 이혜와 정효전의 스토리를 들은 세종은 이혜의 고신(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을 빼앗는 걸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사헌부의 반발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결국 이혜를 경기도 임진현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죠.
하지만 이혜는 고작 3개월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1년 뒤에 다시 서산군에 봉작되었지만 얼마 안 가 종2품 중의대부 서산윤으로 강등 되었죠.
그러던 세종 27년 10월 6일. 이혜는 또다시 개망나니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는 평소 호군의 벼슬에 있던 홍치의 첩이 예쁘고 마음에 들어 눈여겨보고 있었죠.
어떻게 홍치의 첩을 빼앗을까 고민하던 이혜는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은 바로 홍치가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것이었죠.
그러자 이혜는 기다렸다는 듯이 홍치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홍치의 장례도 치르기 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혜는 홍치의 아름다운 첩을 빼앗으려고 온 집안을 헤집어 놓았지만 그녀를 찾지는 못했죠.
또 눈 돌아간 이혜는 그녀의 언니 집까지 찾아가지만 그래도 그녀를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홍치의 첩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홍치 첩의 언니가 이혜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고 기절을 하기도 했죠.
또다시 대형 사고를 친 이혜를 종부시(조선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을 편집, 기록하고 종실의 잘못을 조사 규탄하는 임무를 맡은 관청)에서는 "이혜는 음탕하고 절도가 없습니다 법으로 처벌하시옵소서" 라며 탄핵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팔이 안으로 굽었는지 이혜의 직을 삭탈하긴 했지만 다른곳으로 귀양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결국 이혜의 직위는 더 떨어져 종5품에 해당하는 작위인 황계령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래도 제정신 차리지 못한 이혜는 또다시 사고를 치고 마는데 1447년 세종 29년 10월 3일, 술을 거하게 마시고 만취한 이혜는 술 주정을 하다가 그만 사람을 죽여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종부시에서 그 사건에 대한 죄를 물으라 세종에게 청했죠.
아무리 조카지만 살인까지 저지른 것을 눈감아줄 수 없었던 세종은
이혜의 직첩을 거두어 고성현에 안치하고 그 도의 감사에게 일러 밭과 집을 주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사냥을 나가지 못하게 하며 또 바깥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라
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훗날 세종은 이혜에 대한 또 다른 명령을 내리는데
이혜에게 술을 마시게 한 자는 임금의 명을 거역한 죄를 물을 것이며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아뢰지 않은 자는 임금에게 아뢰어야 할 것을 아뢰지 아니한 죄로 물을 것이다
이혜는 양녕대군 이제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한테 빼앗기고 심화병이 생겨 술김에 사람을 자꾸 죽이니 이러한 명령을 내린다
라고 기록되어 있죠.
하지만 세종의 우려에도 이혜의 광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세종이 승하한 직후에 이혜는 유배지에서 도망쳐 자취를 감추어 버리기도 했는데 양녕대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혜가 돌아왔습니다.
도망쳐 있는 동안 금강산에서 지냈다고 하며 말이죠.
그렇게 잘 지내는듯하다가 또다시 도망을 쳐서 경기도 마전현 공사에 유숙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갑자기 중이 되겠다며 손수 머리를 깎으려다가 이를 말리던 노비를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결국 문종은 이 골치 아픈 사촌을 그의 가족들과 함께 강화도로 보내버렸죠.
하지만 이듬해인 1451년 2월. 이혜는 강화도에서도 여종을 쇠못으로 찔러 죽이고는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사고를 쳤습니다.
하지만 요즘같이 다리가 놓아져 육지로 연결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강화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잡혀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아들을 쇠못으로 찌르기도 했죠.
이 기록으로 이혜의 정신 상태를 미루어보면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정말 미쳐버린거 같네요.
문종은 의정부 대신들과 함께 이 처치 곤란한 사촌에 대해서 의논한 결과 의원을 보내 이혜를 치료하도록 했고 밖에서 식사를 지어서 갖다주되 불의 사용은 금지했으며 가족들과도 격리시키도록 명했습니다.
하지만 의정부 대신들은 아내를 멀리 떠나게 하면 또다시 화를 내어 병이 더욱 깊어질 것이니 아내만은 가까운 곳에 거처하게 하여 때때로 가보게 하는게 좋을 것이라 하면서 아버지 양녕대군도 이혜에게 보내 좋게좋게 타일러보도록 했죠.
거의 정신병원에 격리되어 있다시피한 상태였던 이혜는 그동안 사고를 치지 못했으니 그 해 4월 7일에는 문종이 이혜의 고신을 돌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양녕대군을 보고 나서 옛 충격이 다시 떠오른 것이었을까요?
이혜는 고신을 돌려받은 바로 다음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새벽녘 이혜는 뒷간에 가서 홑이불을 찢어 끈을 만들었고 집 서까래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했죠.
곧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지만 그는 이미 기절한 후였습니다.
이혜의 장인 김개가 급히 의원을 데리고 갔지만 너무 늦었는지 결국 이틀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이혜는 태어난 날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형인 함양군의 출생 (1416년생) 기록을 토대로 이혜의 사망 당시의 나이를 추측하면 약 서른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사촌 이혜가 죽자 문종은 이틀간 정무를 폐하며 예를 지키기도 했죠.
이혜는 죽고 나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현 미산면 백석리)에 묻히게 되었고 다시 복권되어 서산군(瑞山君)에 봉작 받았으며 종1품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추증되었습니다.
그의 망나니 아버지 양녕대군은 이혜보다 11년을 더 살다가 숨을 거두었죠.
실록에서는 이혜의 성격에 대해서 “황폐하고 미혹되며 미친 것 같고, 여자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망나니 아버지 양녕대군의 모습을 쏙 빼닮은 이혜는 실록의 기록대로 정말 아버지에게 사랑하던 애첩을 빼앗긴 후로 미쳐버린 것일까요?
애초에 이혜가 완전 또라이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이혜의 삶 중에서 아버지 양녕대군이라는 짙고 시커먼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던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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