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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소헌왕후. 시아버지에 의해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게된 한 많은 삶을 산 여인

by 사탐과탐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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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는 세종이 충녕대군인 시절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요
충녕대군이 왕이 된후 시아버지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 나게 됩니다
한 많은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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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비들 중에는 불쌍한 삶을 산 인물이 굉장히 많았는데요

남편인 영조에게 평생동안 투명인간 취급받았던 정성왕후, 남편 중종이 왕이 되자마자 불과 며칠만에 쫓겨나버린 단경왕후, 그리고 남편 태종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난 원경왕후도 있죠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도 왕비였지만 평생토록 눈물 마를날 없는 굉장히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인데요

이 인물은 바로 방금 말한 태종과 원경왕후의 며느리이기도 한 인물이자 세종의 아내였던 소헌왕후 심씨 입니다

 

그녀는 1395년 9월, 청천부원군 심온과 삼한국대부인 안씨의 딸로 태어났죠

아버지 심온의 동생이던 심종은 태종의 여동생이던 경선공주와 결혼을 했는데요

경선공주가 충녕대군의 배필로 소헌왕후를 추천해 1408년 충녕대군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경숙옹주로 봉해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이 개망나니짓만 하고다니다 결국 어리와의 간통사건까지 저지르자 더이상 참지못한 태종은 1418년 음력 6월, 결국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죠

그리고 얼마안가 태종은 세자였던 충녕대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헌왕후는 세자빈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의 자리에 앉게 된것이죠

그러나 태종이 왕위를 물려줄때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었는데요

병권과 나라의 중대한 사안에 있어서는 자신이 최종 결정을 하고 세종은 사신 접대나 나머지 다른 업무만을 넘겨준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종이 즉위를 하자 소헌왕후의 아버지 였던 심온은 청천부원군으로 봉작됨과 동시에 영의정이 되었죠

 

그리고 그 해 음력 9월에는 세종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나라로 가는 사은사(謝恩使)의 수장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태종은 아내의 집안까지 풍비박산 낼 정도로 외척이라면 무조건 의심하고 경계했는데요

이때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심온이 명나라로 떠날때 수많은 사람들이 잘 다녀오라며 그를 배웅했다는 이야기를 태종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태종은 외척인 심온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러던 중 심온이 명나라로 출발하자마자 조정에서 큰일이 터져버렸습니다

태종이 분명히 군사에 대한 일은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병조참판이던 강상인이 병조의 일을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말았던 것이죠

 

그러나 당시 태종이 상왕이고 세종이 왕이지만 무슨일이 있을때 누구에게 보고하고 누구에게 결정권한이 있는지 애매한 상황이었고 노상왕인 정종까지 있었기 때문에 병조의 분위기는 혼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에 태종은 강상인을 비롯해 병조판서 박습, 병조참의 이각, 병조정랑 김자온 등 여러 병조사람들을 의금부에 가두고 심문을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강상인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지만 별다른게 나올게 없었기 때문에 그와 박습을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 되는듯 했는데 태종의 눈치를 보던 신하들은 그가 유배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탄핵을 가했고 강상인이 심정, 박습과 함께 사적인 자리에서 태종의 병권 장악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어 유배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태종은 다시 강상인과 박습 등을 잡아들이더니 몇날 며칠동안 강상인에게 강도높은 잔혹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한것이죠

 

심온이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 좌의정 박은과 영돈녕부사 유정현 등은 압슬형까지 동원해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이라는 이름이 나올때까지 엄청난 고문을 가했고 결국 강상인은 없던일까지 모두 실토했던것입니다

이때 심온의 동생이던 심정이 불경죄와 역모죄로 처형되고 말았고 심정을 죄인으로 만든 다음 심온까지 엮어버렸던 것이죠

 

그렇게 심온은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렇게 심온은 가혹한 고문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너무나 억울했던 심온은 아무것도 실토하지않고 지독한 고문을 버텼는데 당시 심문을 하던 유정현이 심온에게 "영의정이나 되는 당신이 이런 고문을 당하는게 무슨뜻인지 모르겠냐?" 라고 말하자 결국 심온은 모든걸 내려놓고 태종이 원하는 답을 실토하고 말았죠

그리고 심온은 바로 다음날 사사되었습니다

 

이때 태종의 뜻을 받들어 외척 숙청을 단행한 사람이 바로 심온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이던 박은 이었는데요

야사에서는 심온이 죽기 직전에 자손들에게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 라고 했다고 하죠

그리고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관노가 되어버렸으며 아버지 심온의 형제들과 자식들은 죄다 귀양을 가고 말았습니다

 

비록 태종은 심온의 자식들은 죽이지는 않았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등 소헌왕후의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말았죠

그냥 대군의 아내였다면 친정도 잘먹고 잘살았을텐데 자신이 왕비가 되었다는 이유로 이 사단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종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장인 심온이 억울했다 생각했는지 심온 집안 사람들이 노비가 된것에 대해 일단 천인으로 만들었지만 천인의 일은 시키지 말라고 하명했다고 합니다

 

이후 태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세종의 눈치를 보던 이직과 황희가 노비가 된 이들을 풀어달라고 청하였고 그렇게 세종은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모두가 한양으로 돌아올수 있었죠

그런데 정작 심온은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는데요

이유는 세종 자신도 장인인 심온이 억울하다는건 알고 있었고 복권시켜주고 싶었지만 심온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썼다고 말하며 복권시킨다면 자신의 아버지 태종에 대한 불효이자 아버지가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그냥 잠자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심온은 외손자 문종이 즉위하고나서야 겨우 복권되는데요

세종과 비슷한 이유로 문종도 심온이 결백하다 라고 말한건 아니었고 세종의 영릉 비문에는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의 이름도 새겼어야 했기 때문에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면서 어쩔수 없이 복권해준다는 식으로 넘어갔습니다

신하들도 다들 심온이 억울하단건 다 알고 있었고 시간이 꽤나 흐른뒤라서 그의 복권은 별문제없이 처리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무튼 심온이 사사 당한후에 박은과 유정현 등은 태종이 죽고나면 소헌왕후가 보복할것이 두려웠던 나머지 역적의 딸이라며 소헌왕후까지 폐위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는데요

하지만 태종은 당시 소헌왕후가 내조도 잘하고 왕자를 2명이나 출산했으며, 당시 안평대군을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폐비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로는 이미 외척이 권력을 얻고나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것을 경계해 단행한 숙청이었는데 소헌왕후까지 폐비해 버리면 또다른 왕비가 정해지고 또다른 외척이 등장할것이니 그러면 다시 외척 숙청이라는 피바람을 일으켜야 했던 것이죠

 

거기다가 이미 소헌왕후에게는 아들 2명이 있었고 임신까지 한 상태였는데 새로운 왕비를 들여 자칫 그녀가 왕자라도 낳게되는 날이면 장성한 소헌왕후의 자식들과 분란이 일어날것이 자명했고 다음 왕의 정통성 문제가 발생할것도 우려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태종 자신도 형제들을 죽이고 왕자리를 차지했던것 처럼 후손들이 그렇게 되지 말란법은 없으니 말이죠

 

또한 소헌왕후가 평소 야심을 드러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굳이 며느리까지 쫓아낼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종은 처가였던 심씨 가문을 복권 시켜주지 않고 심온을 죽이는데 일조했던 유정현을 영의정에 임명했는데요

이는 태종의 유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 외에도, 유정현은 내치기엔 너무 능력있는 관료였으며 태종과 세종에게 약점도 잡혀있던터라 철저히 왕의 편에서 열심히 일하는 그런 인물이었기에 세종의 입장에서는 원수같은 놈이긴 하지만 쓸모있는 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의 이런 조치에 대해 소헌왕후는 아무말없이 불교에만 메달리고 있었죠

세종도 아내 눈치가 보였는지 나중에 유정현이 죽고나서 심온의 아내였던 안씨와 딸들을 관노 신분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소헌왕후도 어떻게 할수 없었던 남편의 마음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던것 같긴하죠

집안이 시아버지에게 풍비박산 나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중전으로써 조용히 내명부를 통솔했는데요

첫번째 며느리이던 휘빈 김씨가 세자인 문종에게 사랑받기위해 이상한 술법을 행한 사건과 두번째 며느리인 순빈 봉씨가 궁녀와 행한 동성애 사건이 터졌을땐 내명부 수장으로써 두 세자빈을 엄하게 질책하기도 했었습니다

 

거기다가 세종 8년인 1426년에는 한양에서 천가구가 넘는 집이 불타버린 대화재가 났던 일이 있었죠

당시 세종과 세자인 문종은 군사훈련 참관을 위해 지방으로 출장을 간 상태였습니다

그때 소헌왕후는 금성대군을 임신한 상태였고 심지어 만삭인 몸이었지만 최전방에서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하기도 했죠

그렇게 그녀는 대화재에서 경복궁과 종묘는 무사히 지켜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때문에 당시 정승이던 황희는 한양 대화재에 대한 일들을 세종이 아닌 소헌왕후에게 보고했다고 하죠

이 일 덕분인지는 몰라도 세종은 지방 출장을 떠날때마다 나나 세자가 없을때 무슨일이 생기면 반드시 중전에게 모든걸 보고하고 이후부터는 그 명령을 따라라고 말해놓고 갔을정도로 그녀를 신뢰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1444년 어머니였던 삼한국대부인 안씨가 세상을 떠났고 다음해인 1445년에는 아들 광평대군과 평원대군도 가슴에 묻은 뒤 생애 후반에는 불교에 의지했으며 수시로 승려들을 모아 불법을 드리는 행사를 열었다고 합니다

불과 2년만에 어머니와 아들들을 잃은 소헌왕후는 결국 병에걸려 요양을 떠났다가 평원대군이 죽고나서 1년도 채 안된 1446년에 52세의 나이로 수양대군의 집에서 한많던 삶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훗날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는등 패륜적인 일을 일삼던 수양대군도 어머니 소헌왕후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다고 하죠

또한 첫째 며느리였던 휘빈김씨와 순빈봉씨에 비해서 둘째 며느리인 정희왕후는 몸가짐이 바르고 순종적인 며느리였기 때문에 특히나 세종과 소헌왕후가 총애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희왕후가 첫째 출산이 임박했을때 소헌왕후는 관례를 깨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 궁 내에서 출산하도록 했을정도였죠

 

여담으로 소헌왕후는 생전에 설탕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설탕은 전부 해외에서 수입해야했던 사치품에 해당했죠

그러다보니 왕비였던 소헌왕후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물품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병에걸려 몸져누워있을때도 설탕을 먹고싶어했는데 이후 소헌왕후가 죽고나서 문종이 설탕을 얻게되자 눈물 흘리며 어머니의 영전에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죠

소헌왕후는 실록에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남편인 세종이 조선을 떠나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뽑힌것 처럼 그녀 역시 조선시대 최고의 왕비로 칭송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세종때에는 후궁도 굉장히 많은편이었는데요

내명부의 수장으로써 별 잡음없이 후궁들을 잘 이끌었고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도 소헌왕후가 이끌던 내명부가 가장 안정적이었다고 하죠

 

그만큼 소헌왕후 스스로도 중전으로써 위엄이 대단했던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8남 2녀나 뒀을 정도로 역대 조선의 왕비들 중에서도 2번째로 자녀를 많이 둔 왕비이기도 했죠

당시 왕비가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방법 중 최고는 자식을 많이 낳는것이기도 했는데요

 

정통성이 튼실한 대군이 8명이나 있었으니 후궁들도 감히 왕위를 넘볼수 없었을 것이며 소헌왕후 입장에서도 후궁 소생 왕자들이 왕위를 노릴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을것 같죠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강인한 마음으로 버텨낸 정말 대단한 여인 소헌왕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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