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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송나라 휘종. 천재 예술가이자 북송멸망의 주역이 된 황제.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

by 사탐과탐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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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휘종은 역대급 천재 예술가 이긴하지만 취미생활로 해야했던 예술 활동을 주로하고 정치는 뒤로해 북송이 멸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암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송휘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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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북송의 천재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는 수금체라는 자신의 서체를 만들어 낼정도로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림 실력도 너무나도 출중해 중국 미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 낸 사람이기도 했으며 중국 미술사에서 빠질수 없는 인물이 되었죠.

 

허나 크나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바로 송나라의 황제였던 것입니다.

예술적으로는 뛰어나긴 했지만 예술과 사치 향락에만 빠져 결국엔 나라를 말아먹고 자신과 가족들마저 나락으로 떨어트려 중국 암군 중 탑10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송나라의 휘종입니다.

그는 송나라 6대 황제 신종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죠.

 

그가 황자시절에는 고모였던 촉국공주의 집에서 살았는데요.

그는 촉국공주의 남편이자 휘종의 고모부이던 왕선을 굉장히 존경했다고 합니다.

왕선은 다방면에서 뛰어난 대단한 인물이었는데요.

한번 읽은것은 모두 기억할 정도로 천재였고 문학적 예술적 기질 또한 뛰어난 사람이었죠.

 

여기까지만해도 다 좋았는데 왕선의 큰 단점은 사치스러웠으며 여자에 환장했던 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첩을 거느렸고 춤추는 무희까지 집에 둘 정도로 여색을 탐했죠.

그런 고모부의 모든것을 닮고 싶었던 어린시절 휘종은 왕선의 행동을 따라하고 심지어는 배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왕선은 당시 가장 유명한 기방으로 그를 데리고 가 몸소 침대위에서 여러 스킬들을 보여주고 난 뒤 해보라고 시키기도 했으며 주색잡기 등 온갖 19금스러운것들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죠.

이에 어린나이의 휘종도 홍등가를 전전하며 공부보다는 여자들과 놀고, 술먹고, 서예를 하거나, 그림그리는 것에만 몰두하면서 방탕한 10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100년 2월, 의붓형이었던 철종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다음 황제로 누구를 옹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죠.

휘종은 신종의 11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황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기도 했고 공부는 재쳐두고 너무 노는것만 좋아하던 휘종이기에 여러 신하들은 그가 황제가 되는걸 반대하고 나섰으며 다른 황자들을 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태후는 평소 그를 좋게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황제로 그를 찍었고 그렇게 황제로 즉위하게 된것이죠.

어린시절부터 여자에 푹 빠져 살던 휘종은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수많은 자식을 낳았는데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제버릇 개 못준다고 100명이 넘는 후궁을 두어 밤낮으로 뜨밤을 보낸결과 황제와 태상황으로 있는동안 총 65명의 자식을 낳았고 훗날 포로생활을 할때 14명의 자식을 낳아 총 그의 자식만 79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긴 한것 같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쨌든 휘종이 19살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한 당시엔 신법당과 구법당, 이 두 당파의 권력다툼이 치열하던 시기였는데요.

수렴청정을 한 상태후는 구법당의 한충언과 신법당의 증포를 재상으로 두고 무난한 국정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흘러 상태후가 사망하자 조정은 혼란에 빠져버리기 시작하죠.

평소 그림그리기와 회화첩 보는걸 즐겨했던 휘종은 항주까지 가서 회화첩을 공수해오던 환관 동관을 총애했는데요.

그런 동관 옆에서 그의 비위를 맞추며 무척이나 잘보이려고 애쓰던 채경이란 사람이 동관과 휘종의 후궁 유씨의 도움으로 조정 중심으로 진출하면서 파격 승진을 거듭하게 되었고 어느새 재상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죠.

 

그리고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사람은 구법이든 신법이든 가리지않고 모조리 숙청해버렸습니다.

그런 채경이 마음에 들었던 휘종은 모든 정치를 그에게 맡긴 뒤 제대로 취미활동에 몰입하기 시작하는데요.

 

확실히 휘종은 예술가로써의 자질은 탁월했던 인물이라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수금체를 만들었으며 그림도 당시 화원 뺨치게 너무 잘그렸다고 하죠.

그는 서화원을 설치해 궁내에서 화가를 양성하기도 했고 예술 강좌도 열었으며 재야의 숨은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등 예술과 취미활동에 있어서는 돈도 아끼지 않고 진심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정원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기도 했는데 거기에는 당시 보기 힘들었던 동물들이나 식물들, 꽃들로 가득채워 놓았습니다.

문제는 동, 식물원을 만들때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일을 시키고 심지어 돈도 주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거기다가 기석(奇石)수집과 골동품 수집에 돈을 마구마구 써대기 시작했죠.

또한 명금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전국의 진귀한 미술품이나 예술품 등을 사다 모았습니다.

 

신종, 철종때에 국가 재정을 문제없을 정도로 올려놓았었는데 휘종이 예술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사치를 부리며 시원하게 써재낀것이죠.

국고는 금새 바닥을 보이게 되었고 그러자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기도 했는데요.

토지를 측량하면서 원래보다 작게 측량해 나머지 남는 땅을 나라 땅으로 만들어 버렸죠.

 

또한 땅문서가 없거나 매매계약서가 애매한 토지도 몰수해버리기 까지했습니다.

나라에서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버린것이죠.

이런 조정의 악행에 견딜수 없었던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 중에 송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수호지에 나오는 모델이 된 사람이죠.

 

거기다가 방랍이라는 사람도 난을 일으켰는데 규모가 너무나도 거대해져 한개의 나라를 세울정도가 되자 결국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토벌했고 비록 반란을 진압하긴 했지만 송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115년 여진족의 완안 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족이 세웠던 요나라를 박살내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휘종은 요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 일을 기회로 삼아 요나라를 함께 멸망시키면 요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금나라에 바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요나라를 멸망시킨뒤 연운 16주만 가지고 나머지는 다 금나라가 먹는걸로 제의를 하니 전혀 손해볼것이 없었던 금나라는 이를 수락하기에 이르렀죠.

 

그렇게 두 나라가 요나라 정벌을 위해 군대를 출진 시켰지만 오랜기간 휘종의 폭정에 더하여 방랍의 난을 진압할때 국력이 굉장히 많이 소비되었기 때문에 금나라가 요나라 전체를 먹을때까지 송나라에서는 단 1개의 성도 함락시키지 못했죠.

그렇게 송나라에 주기로한 연운 16주까지 금나라가 모두 먹어버린 것입니다.

 

1125년, 송나라는 연운16주의 일부는 받는데 성공하였지만 휘종은 겁없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는데요.

금나라가 점령한 나머지 요나라 땅을 빼앗기로 계획했고 요나라 황제에게 금나라가 점령한 10개의 주를 같이 협공해 탈환하자고 밀서를 보냈습니다.

게다가 바로 금나라에 바치기로 했던 공물은 전혀 바치지 않았고 밀서를 보낸 사실이 결국 금나라 태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죠.

 

이에 극대노한 금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송나라를 침공하자 깜짝 놀란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재빨리 자신은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그나마 안전했던 장강 이남의 남쪽으로 도망쳐 도교에 푹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얼떨결에 황위를 물려받아버린 흠종도 역시 도망을 칠려다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안했고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비단에 말까지 금나라에 주는 조건으로 이 사태를 마무리 지었죠.

 

금나라 군대로부터 도망치기위해 아들에게 황위를 넘기고 자신은 태상황이되어 장강 이남으로 내뺐던 것인데 결국 흠종은 휘종을 다시 개봉으로 불러들였고 그렇게 다시 휘종은 개봉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정신 못차린 휘종은 개봉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해서 돈을 펑펑쓰며 좋아하던 취미활동들을 했고 휘황찬란한 연회를 즐기기도 했으며 수많은 여자들과 얽히고 섥혀 놀아 나는등 평상시처럼 망나니 같은 생활을 이어나갔죠.

 

어쨌든 금군이 물러나자마자 주전파 신료들은 갑자기 금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고 이에 막 황제가 된 흠종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또다시 금나라의 분노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금나라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로 침공을 시작했는데요.

당시 도교에 심취해있던 휘종 앞에 육갑도사 곽경이란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도를 수련하여 득도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귀신을 마음대로 부리고 산을 옮기며 바다를 뒤집어버리는 술법을 익혔으니 10만의 금군이 쳐들어 온다할지라도 일주일만 주시면 그들을 물리쳐 보겠다고 휘종에게 말했죠.

그의 그말을 들은 휘종은 굉장히 반가워 하며 그를 수도 개봉의 수비책임자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낼 천단(天壇)을 만들고 어린 남녀 아이들 24명을 선발해 촛불을 들게 한 뒤 출생일시가 같은 육갑신병(六甲神兵) 7,777명을 선발해 모두 똑같은 흰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부적을 붙이고 비단과 각종 제물들을 제단에 올린다음 하루 세번씩 향을 피워 하늘에 금군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를 드렸죠.

 

이 의식을 7일 동안 계속하면 금군을 물리칠수 있다고 하자 그를 찰떡같이 믿고 있었던 휘종은 금나라 군대가 코앞에까지 들이닥쳤는데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채 태연하게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마침내 제사를 지낸지 7일째가 되었고 곽경은 성문을 활짝열어 7,777명의 육갑신병을 출병시켰는데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금군은 순식간에 신병을 쓸어버렸으며 군사들이 밀물처럼 성내로 밀고들어와 송나라의 수도 개봉은 손쉽게 함락되어 버렸죠.

 

이 모든일의 원흉인 곽경은 어느새 도망치고 그곳에 없었습니다.

결국 1126년, 금군은 순식간에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고 그렇게 휘종과 흠종은 함께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황후, 후궁들, 황자, 황녀, 그리고 여러 황족들과 어마어마한 양의 금은보화와 재물들, 그림, 서책 등 예술품들도 전리품으로 금나라로 가져갔죠.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 없는점은 휘종은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주제에 기생 이사사와 함께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바람앞에 촛불인데 정신못차리고 기생을 찾는거보면 진짜 답도없는 인간이라는걸 알수가 있는것 같죠.

 

어쨌든 이때부터 송나라 황족들은 처참할 정도로 최악의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가는도중 한 백성이 휘종에게 술과 고기를 올리자 호송하던 금나라 대장이 그 술과 고기를 땅에 버린다음 강제로 주워먹게 하기도 했고 또 다른 금나라 대장은 군대가 어딘가에 머물때 술을 마셨는데 흠종의 황후를 불러와 옆에서 술시중을 들라고도 했습니다.

 

휘종의 후궁들이나 수많은 황족들은 굉장히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데요.

많은 수의 공주들은 먼길을 끌려가다 지쳐 쓰러져 죽기도 했죠.

게다가 휘종의 후궁들은 150여 명에 달했는데 운이 좋은 경우에는 금태종이나 금희종 아니면 금나라 황족들 또는 장군들의 첩이 되었고 첩이 되지 못한 후궁들과 황족 여성들은 처녀, 유부녀 할거 없이 모조리 세의원(洗衣院)으로 보내졌습니다.

 

세의원은 바로 금나라 병사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매춘굴이었는데요.

송나라 황족 및 후궁들은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금나라 병사들을 상대했어야 했죠.

첩이된 경우에도 세의원에 보내진것보단 그나마 나았다는 것이지 좋은 대우는 받지 못했습니다.

첩이된 여인들은 모시던 남자가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허다 했고 그렇게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의 첩이되어 평생을 노리개마냥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금태종은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휘종을 정신이 혼미한 자라는 뜻의 '혼덕공' 그리고 흠종은 정신의 혼미함이 중한자 라는 뜻의 '중혼후' 라는 치욕스러운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휘종이 더 최악의 암군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는데요.

 

자신의 부인들과 딸들이 이런 모욕을 받고 금나라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을때도 화내거나 용서를 빌기는 커녕 초연한 모습을 보였는데 자신이 정성스레 모은 예술품들과 그림들을 빼앗기고 훼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눈물흘리며 슬퍼했다고 하죠.

또한 금태종은 휘종의 딸들을 첩으로 삼아 아이까지 낳았는데요.

 

금태종은 휘종에게 '너의 딸이 나의 아이를 낳았으니 너에게도 옷 두벌을 보내주겠다' 라는 내용의 서신과 옷 두벌을 보내줬는데 휘종은 "저같이 쓸모없는 놈과는 달리 제 딸들이 폐하께 도움이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을 많이 생산하시길 기원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휘종과 흠종 두 황제는 1128년 평민으로 강등된 후 어느정도의 땅을 하사받아 밭을 개간하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휘종은 1135년 4월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흠종도 26년을 더 살다가 1161년 5월 사망하게되었죠.

그런데 남쪽으로 도망을 쳤던 흠종의 동생 고종이 현재 항저우 지역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남송을 건국했습니다.

 

남송은 금나라와 화의하고 중국의 남부지역을 지배했지만 1234년 몽골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하고 1279년 애산전투에 패배하여 152년 만에 남송도 멸망했죠.

고종은 오랜기간 금과의 협상끝에 휘종의 유해를 송환받아 영우릉에 묻었는데요.

훗날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에의해 파괴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송휘종은 중국역사상 최악의 암군으로 손에 꼽히고 있는데요.

왕이나 황제가 공부외에 딴짓 좀 하려하면 신하들은 송나라 휘종처럼 될꺼냐고 난리쳤다고 할 정도였죠.

하지만 휘종은 예술가적 기질이 워낙 타고났었기 때문에 궁내의 도화원에도 엄청난 지원을 해주었고 능력있는 미술가 발굴에도 힘썼으며 휘종 자신도 서예나 그림 등 여러 예술가로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 냈기에 휘종시기에 중국 미술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덕분에 송나라때 그림이나 서예 등 많은 걸작들이 탄생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의 업적은 딱 이거 밖에 없고 황제로써는 취미활동만 해대고 사치를 일삼는 암군일 뿐이었습니다.

적재적소에 훌륭한 신하들만 끼워넣고 적당히 정치도 하면서 취미활동까지 했으면 중국 역사상 최고로 훌륭한 성군이 되었을수도 있겠네요.

 

예술적인 업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지만 북송과 남송이 갈리고 북송을 멸망에 이르게했던 암군 송나라 휘종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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