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야오팅은 배고픔에 굶주리지 않으려고 거기를 자르고 힘겹게 환관이 되자마자 청나라가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한 이후 마지막 환관이었던 그는 정말이지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는데요.
환관이라 하면 얇은 목소리에 수염이 없고 허여멀건한 얼굴로 황제나 왕의 곁에 구부정하게 서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말 그대로 환관은 황제나 왕의 곁에서 그들을 모시는 최측근이었죠.
그래서 환관이 되기는 굉장히 힘들었는데요.
그중 제일 큰 이유는 아마도 거시기를 절단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환관들은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하루 24시간 내내 궁에서 생활했죠.
당연히 모든 궁녀는 왕이나 황제의 여자였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 환관과 궁녀 간의 연애질을 막기 위하여 남자의 거시기를 잘라야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환관 지망생들에게 진짜 환관이 될 거냐고 여러 번 물어봤는데 혹시나 지망생들이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않거나 대답이 없으면 거세를 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항생제도 없었기에 거세를 했을 시 염증이나 쇼크, 과다출혈로 인해서 80%~90%가 죽었기 때문이었죠.
심지어 한국에서는 고환만 실로 묶은 후 잘라낸 반면 중국에서는 음경과 고환을 모두 잘랐기에 더 위험했다고 합니다.
운이 좋거나 체력과 면역력이 월등히 강한 사람만 환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황제나 왕의 가까이에서 경호원 역할도 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 우리가 생각하던 환관의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환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환관은 자신의 절단한 거시기를 조그만 항아리에 담아서 보관을 했죠.
이 항아리는 내시감이라는 환관이 관리를 했는데 항아리에는 거시기 주인의 이름을 적고 창호지로 밀봉하여 밀봉 자리에는 내시감의 직인을 찍어놓았습니다.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고자여서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으로 죽으면 구천을 떠돌게 된다.'라는 전설 때문에 환관이 죽으면 거시기를 다시 바늘로 꿰맨 뒤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하죠.
환관은 워낙 황제를 가까이서 모셨기 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삶을 누렸다고 합니다.
쑨야오팅은 천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생계가 너무나도 쪼들렸던 쑨야오팅의 가족은 하루에 밥 한 끼 챙겨 먹기도 어려울 정도였죠.
그러던 어느 날 관복을 입고 멋진 가마를 탄 사람이 동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 주는 것을 보고 그들을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황제의 최측근이던 환관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쑨야오팅은 환관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환관이 되겠다는 결심을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아버지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죠.
그러다 아버지는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결국 낫을 들게 되고 쑨야오팅의 거세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쑨야오팅은 거세 후 엄청난 고통으로 쇼크에 빠져 한동안 깨어나질 못했고 고온 속에 기절했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다 보름 후에야 겨우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죠.
하지만 깨어나 보니 세상은 뒤집혀 있었습니다.
그가 혼절한 사이 중국에선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청나라가 멸망해버리고 만 것이죠.
그리고 새롭게 건국된 중화민국은 더 이상 환관을 뽑지 않았습니다.
기원전부터 있었던 환관 제도가 3천여 년간을 이어져 내려오다 하필 자신이 목숨을 걸고 거시기를 잘랐을 때 환관 제도가 사라져 버린 것이죠.
이 말을 들은 쑨야오팅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절단된 거시기를 들고 무작정 자금성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청 황실 우대조건’ 이라는게 있었는데 청나라는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잃고 멸망했지만 선통제 푸이는 자금성 내에서는 황제로써 기본적인 예우는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쑨야오팅도 간신히 환관이 될 수는 있었던 것이죠.
환관이 되면 배를 곪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권세를 얻거나 부귀영화를 누리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이미 거세를 한 그에게는 환관이 되는 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죠.
그러던 중 1924년 9월에 펑위샹이 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하고 ‘핍궁사건’ 을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 청나라 황실에 대한 예우는 폐지되었고 선통제 푸이와 환관들은 자금성을 쫓겨나게 되었죠.
배고픔에 굶어죽지 않으려고 거세를 하면서까지 겨우 환관이 되었지만 자금성에서 쫓겨난 쑨야오팅은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집안이 너무나도 가난해서 경작할 땅도 없었기에 농사일 마저도 할 수 없었죠.
그는 형제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은 쑨야오팅을 호기심 어린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봤고 동정을 받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자라며 놀림 받거나 빈정거림,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시선들과 놀림이 너무 괴로웠던 쑨야오팅은 결국 고향을 떠나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고 흥륭사라는 절에 들어가 그곳에 잠시 몸을 의탁했죠.
하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힘들어졌고 그는 또다시 먹고살기 위해 길거리를 떠돌았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살았는데요.
쓰레기를 주워 돈을 벌기도 했고 경극단에 들어가 삐에로 노릇도 하며 겨우겨우 목숨만 보전하다가 한 가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죠.
그 소식은 자신이 모셨던 선통제 푸이가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었고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무작정 만주국으로 갔습니다.
쑨야오팅은 운이 좋은 건지 다시 환관이 되어 약 10년간 환관 노릇을 더 할 수 있었지만 1945년에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마저 멸망하게 되면서 환관이란 제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죠.
쑨야오팅은 이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다시 놀림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환관이 아니던 그는 단순히 고자인 사람이 되어버렸죠.
문화대혁명 당시에 쑨야오팅은 봉건의 잔재라며 홍위병들에게 잡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머리카락이 잘리는 등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참하고 질긴 인생을 계속해서 이어가다가 한 사찰에 들어가 몸을 숨기며 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17년 이상을 살았고 무려 97세까지 살다가 1996년 12월 17일에 불쌍하고 한 많던 그의 삶은 끝이나게 되었습니다.
쑨야오팅은 신체의 일부가 불완전했기 때문에 평생토록 목욕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서인지 임종 전에 그는 모두에게 당부한 말이 있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체면을 차리고 떠나고 싶다며 시신을 씻기지 말고 바로 화장해달라고 말했고 모두가 그의 뜻을 존중해 사망한 당일 바로 화장하게 되었죠.
단순히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자신의 중요 부위를 자르면서까지 환관이 되었지만 환관 제도 자체가 사라지며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중국의 마지막 환관 쑨야오팅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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