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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원숭환. 목숨 바쳐 기껏 명나라 지켜냈더니 오히려 억울한 누명으로 처형당한 중국의 명장

by 사탐과탐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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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던 명나라를 위해 목숨을 다해 지켜냈더니 오히려 억울한 누명으로 처형당해버린 중국의 명장 원숭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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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나라가 멸망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중국의 드넓은 땅을 다스리던 강대국 명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후세 역사가들은 한 인물이 죽어서 그렇다라고 평가할 정도이죠

오늘은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된 인물이라 일컬어지는 원숭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는 1584년 6월 6일 광동성 동완현에서 태어났고 만력 47년인 1619년, 3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죠

그는 원래 문관으로 관직에 나갔지만 전쟁이나 군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기 때문에 과거 전쟁에 나가 싸웠던 경험이 있던 병사 출신 노인들이나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 등에게 변방의 정세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밤새 군사나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후순이라는 사람에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게 되었고 그렇게 병부에 관련된 관직을 받게 되었죠

그런데 당시 명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웠는데요

 

여러 대에 걸쳐 암군이 나왔고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해 만주 지역을 다 빼앗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원숭환은 혼자 위장을 하고 요동으로 잠입해 그곳을 정찰하고 돌아온 뒤, 산해관을 방어하고 싶다고 지원했고 그렇게 그는 산해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병력면에서는 금나라에 비해 크게 뒤지지는 않았지만 후금군에 계속해서 패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상황을 뒤집은 사람이 바로 요동경략사 웅정필이었죠

웅정필은 삼방포치책을 구상해 약 1년간 후금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만력제가 사망하고나서 태창제를 지나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몇몇 조정 대신들이 웅정필이 후금과 싸우려들지않고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한다고 고발하면서 웅정필이 쫓겨나 버렸죠

그리고 훗날 당시 권세를 잡고있던 환관 위충현에 의해 웅정필은 모든 책임을 떠안고 처형되고 맙니다

 

웅정필이 쫓겨났다는 소문을 들은 후금의 누르하치는 곧바로 명나라 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명나라군은 속절없이 패하기 시작했는데요

후금에 의해 요양과 광녕까지 점령당했고 50여 개의 요새와 70여 개의 성이 순식간에 함락당했으며 산해관까지 넘어올 조짐이 보이자 북경까지 위기감에 휩싸이게 되었죠

 

당시 만리장성의 끝인 산해관은 난공불락의 관문이었지만 이곳이 열리기만 하면 명나라는 바로 끝장이나 마찬가지인 말 그대로 명나라 방어의 핵심이었던 곳입니다

그렇게 후금의 강력한 기세에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명나라 조정은 산해관 방어에만 모든 힘을 기울이게 되었죠

 

이 사태를 지켜보던 원숭환은 산해관의 위험부담을 더 줄이기 위해 산해관 북쪽 200리 지점에 영원성을 지어야 효과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다며 조정에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대학사 손승종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영원성을 만들수 있게 되었죠

그 이후 원숭환은 요동의 원수가 되었고 영원성이 만들어 지면서 산해관 전방에 방어선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의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덕에 후금도 이때만큼은 섣불리 공격할 자세를 취하지 못했죠

이에 자신감을 얻은 원숭환은 손승종에게 다른 여러 요새에도 군사들을 배치해 방위를 더 단단하게 굳힐것을 건의했고 손승종이 흥쾌히 받아들이자 요서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홍이포' 라고 불리는 최신식 대포를 구입해 산해관에 배치했으며 나중에는 자체제작까지 성공하게 되어 막강한 후금의 기병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죠

 

그러나 최고 권력자이던 위충현은 자신의 말을 잘 안듣던 손승종을 조정에서 쫓아내 버렸고 고제라는 인물을 산해관 방어의 지휘관으로 임명해버렸습니다

고제는 원숭환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방어선들을 모조리 내버려 둔 채 산해관까지 방어선을 후퇴시켰는데요

 

그러자 원숭환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고제는 영원성만 남기고 다른 요새와 방어선을 다 포기해버렸죠

그리고 후금군과 싸우다 죽으라는 생각에 원숭환에게 영원성의 방어를 맡겼습니다

원숭환이 구축한 요서 방어선 때문에 요서지역까지 점령을 하지 못해 답답한 상황에 처해있던 누르하치는 고제의 이런 뻘짓을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1626년에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으로 쳐들어갔죠

 

그런데 원숭환이 지키고 있던 영원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훗날 '영원대첩' 이라고 불렀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여태껏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는데 영원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누르하치는 크게 한탄했다고 하죠

거기다가 영원대첩의 충격이 컸던 탓인지 누르하치는 8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반면 명나라는 1618년 이후부터 후금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만 해오다가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었죠

 

이 영원대첩의 공으로 원숭환은 병부시랑 겸 요동순무의 관직을 제수 받았습니다

원숭환과 손승종을 위기에 빠트렸던 위충현도 영원성의 대승에 기뻐하면서 고제를 자르고 원숭환을 요서 방어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했으며 여러 지원까지 해주었죠

 

1627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침공을 시작했는데요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여러 작은 요새들을 점령하고 금주성까지 포위했는데 그곳에는 원숭환이 신뢰하던 부장 조솔교가 완벽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14일간이나 금주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홍타이지는 금주성을 포기하고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으로 향했지만 역시나 영원성 공략에도 실패했으며 다시 금주성을 공격해봤지만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죠

 

그렇게 홍타이지는 금주성과 영원성 사이만 우왕좌왕하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퇴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누르하치뿐만 아니라 아들인 홍타이지도 정말 굉장한 인물이었지만 원숭환은 이런 사람들과 싸워서 모두 이겨버렸던 것이죠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홍타이지를 물리친 이 전투를 훗날 '영금대첩'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살아있는 한 요서를 뚫는 건 힘들 것이다 생각해 명나라 공략 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혼란했던 명나라 상황과 의심이 많던 숭정제를 이용해 명나라가 스스로 원숭환을 제거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당시 위충현에게 모든 정사를 맡겼던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하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위충현이 죽임 당했고 그의 세력들도 대부분 숙청당했는데 이때 원숭환이 위충현의 지원을 받았다는것을 걸고 넘어져 관직을 삭탈당하고 조정으로 소환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후금을 막아낼 사람이 원숭환 밖에 없는 상황이라 결국 여러 대신들의 청원으로 이후 다시 요서 방어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죠

게다가 승진까지해서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 관직을 받았고 휘하의 모든 장병을 보고 없이 처형해도 좋다는 특권과 이를 상징하는 상방보검까지 하사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5년안에 요동을 되찾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그는 1629년 4월, 수군 좌도독 모문룡에게 의논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당시 모문룡은 평안도 철산군 가도 라는 곳에 주둔하여 자신에게 맡겨주면 요동의 전 지역을 되찾을수 있다고 하던 인물인데요

그는 조선의 의주에 들어가 광해군과 인조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고 가도에 주둔할때는 밀무역으로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후금과 싸워야 한다며 명나라 조정에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심지어 백성들 약탈에 후금을 상대로 온갖 거래도 하는 등 문제가 많았던 인간이었죠

 

그렇게 모문룡과 만나게 된 원숭환은 함께 활쏘기 경기를 하고 나서 자신이 설치해 둔 장막에 그를 데려간 뒤 12가지의 죄를 지었다며 숭정제에게 하사받은 상방보검으로 그의 목을 쳤습니다

그리고 가도에는 모문룡의 부하였던 진계성에게 병사들을 지휘하게 했고 자신의 부하인 서부주를 파견해 이들을 감시하게 하면서 가도를 요동 수복의 전진 기지로 삼았죠

 

한편 명나라 정벌 계획을 다시짠 홍타이지는 결국 가장 좋은 루트인 산해관을 돌파하는 것은 포기하고 크게 돌아가 동북쪽의 희봉구(喜峰口)를 지나 북경으로 치고 들어가는 걸로 계획을 바꿨습니다

그렇게 홍타이지는 요서지역의 영원성, 금주성 등을 툭툭 건드려주면서 1629년 10월, 자신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가 북경일대를 초토화 시키는 동시에 온갖 약탈을 일삼았고 10월 26일이 되자 북경성 코앞까지 진격할 수 있었으며 북경성을 포위해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명나라 조정과 북경 백성들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는데요

그러자 원숭환이 홍타이지에게 길을 터줘서 그들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며 원숭환의 정치적 반대파였던 엄당이 (엄당 (閹黨) : 천계제 시절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형성한 당파) 이 소문을 더욱 크게 키우면서 맹렬히 원숭환을 비난하기 시작했죠

 

엄당은 당시 모문룡에게 엄청난 뇌물을 받아오고 있었는데 그런 그를 처형한 원숭환이 그들에게도 원수인 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당시 고작 19살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던 숭정제도 원숭환을 탓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사실 원숭환은 예전부터 후금이 요서를 우회해 북쪽으로부터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조정에 계속 알리면서 경계하라며 주의를 주고 있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버렸던 것입니다

홍타이지가 북경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숭환은 깜짝 놀라 병력을 끌어 모아 북경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준화성은 함락되어 그곳에서는 대학살과 약탈이 벌어졌으며 이 소식은 북경에도 전해져 북경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원숭환에 대한 원망도 더욱 깊어져갔죠

 

하지만 원숭환은 11월 17일이 되자 북경 광거문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3일 후 다시 공격해 들어온 후금군에 맞서 10번 이상을 싸워 결국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숭정제에게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뒤 곧바로 전투에 임해 병사들이 지칠대로 지쳤으니 성안으로 들어가 쉴수있게 요청했지만 숭정제는 이미 원숭환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청을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그렇게 원숭환과 병사들은 추운 겨울 날씨 속에 밖에서 노숙을 할수밖에 없었죠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11월 27일에는 북경 좌안문 근처에서 또다시 후금군을 격파하자 홍타이지는 결국 퇴각을 했는데 가면서 약탈할수 있는 건 모조리 약탈했고 수만 명의 명나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습니다

비록 철수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홍타이지는 이를 명나라의 약점으로 생각해 계속해서 하북, 산서 지방뿐만 아니라 심지어 산동 지역까지 끊임없이 쳐들어가 약탈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잡아갔죠

 

이런 상황을 종결시키려면 원숭환이 만들어놓은 요서 방어선처럼 북쪽에도 방어선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이뤄낼 수 있는 사람도 원숭환 밖에는 딱히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죠

홍타이지는 광거문에서 원숭환에게 패해 철수를 했지만 양춘과 왕성덕이라는 환관 두 명을 포로로 잡았었는데요

 

이들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홍타이지는 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옆방에서 부하인 고홍중과 포승선에게 두 환관이 들리게끔 원숭환과 홍타이지가 내통을 하고 있으며 곧 북경이 함락될것이라는 거짓 밀담을 나누도록 했죠

그렇게 두 환관은 이 두사람의 밀담을 듣게 되었는데 이후 홍타이지가 자신들을 풀어주자 곧장 숭정제에게 달려가 자신들이 들은 말을 고했습니다

 

이전부터 원숭환을 의심하고 있던 숭정제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고 생각해버린 것이죠

사실 이 이야기는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많이 받아 오긴 했지만 홍타이지가 명나라에 두명의 환관을 이용해 반간계를 사용한것 자체는 맞다고 합니다

그렇게 1629년 12월 1일, 숭정제는 원숭환에게 의논할 것이 있다며 황궁으로 소환했고, 원숭환은 아무 의심없이 얼른 황성으로 달려갔죠

 

그러자 아직 후금군이 완전히 물러난건 아니니 성문을 열어줄수는 없고 바구니를 내려 보낼 테니 그걸 타고 올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북경성으로 들어가 숭정제를 만난 원숭환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숭정제의 엄청난 추궁이었죠

생각지도 못한 추궁에 원숭환은 당황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1629년 12월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원숭환이 투옥되자 조정의 대신들은 놀라며 숭정제에게 후금군이 북경 코앞에 와있는 상황에서 원숭환을 죽이는 것은 스스로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 일과 같다 라고 말하며 그의 구명을 청했지만 엄당의 인물들은 그를 바로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죠

거기다가 북경의 백성들도 원숭환을 처형시켜야 한다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원숭환을 구명하려는 동림당과 그를 처형시켜야 한다는 엄당의 대립은 몇개월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숭정제의 의심병은 결국 원숭환을 처형하기로 결정하죠

그렇게 1630년 8월 16일 (음력) 원숭환은 모반의 죄와 황제를 속인죄로 인해 거리에서 능지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당시 능지형은 정말 잔인한 형벌이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곳에서 살점이 한점식 잘려나가는 것으로 수백 번에서 수천번까지 칼질을 해 뼈와 살을 발라내어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죠

전해져 내려오는 설에 의하면 당시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북경의 백성들은 환호하며 잘려진 그의 살점을 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라는 2명의 걸출한 인물에게 승리를 거두며 명나라의 명맥을 유지해주던 원숭환이 너무나도 억울하면서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죠

그렇게 그의 시신은 광거문의 광동의원에 묻혔는데요

그런데 그의 무덤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평탄화 되었고 비석도 모두 부숴져 흩어져 버렸습니다

 

한편 원숭환이 죽은 뒤 요동을 방위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명나라 장수들은 언제 자신도 억울하게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황제에게 충성을 할 필요를 못 느꼈고 후금에 투항하기 시작했죠

또한 원숭환이 체포되었을 당시 부하이던 만계가 북경 방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요

후금군이 다시 몰려와 북경을 포위했을 때 숭정제의 명령으로 어쩔수 없이 성 밖으로 나가 후금군과 맞선던 만계는 결국 전사하고 말았죠

 

후금군이 여러 명나라 지역에 출몰해 약탈을 해도 그들을 지켜줄 사람은 명나라에는 더이상 아무도 없었고 명나라의 성 밖을 후금군이 그냥 지나가도 수만 명이나 되는 명나라 군은 성 안에서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을 뿐 화살 한발 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요서 방어선을 공략하기 시작했는데 원숭환이 없는 요서 방어선은 줄줄이 격파되어 그곳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들의 후금으로 이탈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방어선은 산해관까지 후퇴하고 말았죠

 

그러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1644년 4월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약 1달후인 1644년 5월 27일 청의 도르곤은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해 격파한 뒤 북경에 진입했고 완전히 명나라 멸망과 함께 이후 중국대륙은 청나라가 통치하게 되죠

 

원숭환은 과거 송나라 때 금나라에 맞서다 진회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악비와 함께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추앙되었습니다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지는 원숭환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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