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청은 여동생인 위자부가 한무제의 총애를 입어 후궁이 된 이후 낙하산으로 입궁하게 되었는데요
비록 조카였던 곽거병에 비해 명성은 덜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한나라의 3대 대장군이 되었던 명장입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대장군 하면 딱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한신이죠
한신은 한나라의 1대 대장군이었습니다
그만큼 유방이 한나라를 만들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한명이 바로 한신 이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한나라의 3대 대장군이었던 인물로 그는 굉장히 궁핍하고 하찮은 삶을 살다가 갑자기 엄청난 전공을 세운 '위청'이라는 인물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위온'이라는 여인으로 평양후 조시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정계'라는 하급 관리였는데 그가 잠깐 조시의 집에서 일할때 위온과 눈이 맞아 잠자리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태어난게 위청이었죠
그래서 처음 그의 이름은 정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정계는 위온과 위청을 내버려 둔 채 원래 자신이 살던 곳으로 떠나버렸죠
이에 위청은 아버지를 찾아가 거기서 살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위청에게 양을 치는 일만 시켰고 새어머니와 그의 이복형제들은 위청을 형제 취급은 커녕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온갖 일을 시키는 등 노비같이 부려먹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핍박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던 위청은 어느새 청년이 되었고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 다시 평양후의 집으로 와 평양공주의 기사 노릇을 하게 되죠
그러던 어느날 한무제가 자신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 들렀다가 거기서 노래를 부르던 위청의 여동생 위자부를 보고 반하게 되고 그렇게 위자부는 한무제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됩니다
그 이후 위자부의 형제들 모두 신분이 상승하면서 위청도 정씨 성을 버리고 위씨 성을 쓰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위청이 된 것이죠
그런데 여동생이었던 위자부가 한무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황후로써 한무제의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던 진황후의 질투심이 폭발해버렸는데요
진황후의 어머니인 관도장공주가 화를 내며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위자부를 어찌 할수는 없으니 그녀의 오빠인 위청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했죠
그 소식을 들은 위청의 친구 공손오는 힘깨나 쓰는 장사들을 이끌고 위청을 구하러 와서 다행히 목숨을 건질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알게된 한무제는 위자부의 오빠인 위청을 보호해 줄 명목으로 그를 불러들여 자신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일을 맡겼죠
그리고 한무제는 위자부의 동생들까지 모두 벼슬을 내려주거나 좋은 집안에 시집을 보내주면서 귀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위자부의 동생인 위소아의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곽거병'입니다
위청과 곽거병은 삼촌과 조카사이였던 것이죠
이 둘은 훗날 있을 흉노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위청은 태중대부로 임명이 되는데 여동생 한명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니 집안 전체가 잘 먹고 잘살게 되는 그런 로또를 맞은 셈이었죠
한편 한나라는 세계 어떤나라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초 강대국이었지만 유방이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패배를 한 이후 흉노에 굉장히 밀리던 상황이었는데요
흉노족의 침입을 겨우겨우 막아내는 수준이었고 그들을 공격할 정도의 여력은 되지 않았었죠
하지만 한무제 대에 들어서 한나라의 국력이 다시 강해지자 기원전 133년, 마침내 한무제는 3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혀오던 흉노를 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 썼던 책략은 마읍성을 바친다고 유인한 뒤 복병으로 흉노를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는데 군신선우는 마읍으로 가는 동안 가축은 있지만 사람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순찰을 돌던 한나라 병사를 잡아다 물어본 결과 유인책이었던걸 알게 되자 그대로 철수하게 되죠
이때 30만 대군을 움직이면서 막대한 비용을 들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기에 이 책략과 관련된 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졌고 이 작전을 주장했던 왕회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이때 위청도 처음 전장으로 출진했었는데 아무것도 못해보고 끝난것에 대해 굉장히 아쉬워하면서 우울해 하기까지 했다고 하죠
그로부터 4년 뒤인 기원전 129년, 한나라는 다시 흉노를 치기 위해 출진했는데요
이때 위청은 여동생인 위자부의 힘 덕분에 거기장군에까지 임명되어 1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상곡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도 위청과 함께 각각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출진했는데 공손하는 적과 대면도 못했고 공손오는 흉노와의 격전 끝에 3천명의 병력만 남긴 채 겨우 퇴각할 수 있었죠
심지어 오랜기간 전장을 누비며 경험이 풍부했던 이광의 군대는 전멸에 가까울정도로 대패했으며 이광은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도망쳐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양치기 일이나 하고 전쟁에 전자도 모르던 위청이 만리장성을 넘어 용성회의가 벌어지는 땅인 (용성회의 : 흉노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회의) 용성까지 쳐들어가 수백명의 목을 베고 700여 명의 포로를 잡는 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죠
함께 출진한 다른 장수들은 모두 패했던 반면 위청만 유일하게 이기고 돌아왔고 심지어 매번 흉노에 패배하기만 했던 한나라가 드디어 처음으로 흉노와의 전투에서 이긴 값진 승리였던 것입니다
이에 한나라 조정에서는 기뻐 날뛰었으며 위청의 공을 치하해 그를 관내후로 봉했죠
기원전 128년, 여동생 위자부가 아들을 낳고나서 황후가 되었는데 이때 위청 자신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군 수천명을 무찌르는 공까지 세우면서 그의 명성은 한나라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가만히 맞고만 있을 수 없었던 흉노는 한나라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고 이때 요서태수가 죽임 당했으며 어양과 안문 등에서 많은 장군들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고 수많은 한나라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죠
이에 위청은 병사를 이끌고 출진해 흉노의 백양왕과 누번왕을 꽁지 빠지게 달아나게 만들었고 빼앗겼던 땅을 다시 되찾는 동시에 흉노의 땅이었던 허타오 지역까지 빼앗는 등 엄청난 전공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승진해 장평후가 되었죠
기세를 탄 위청은 기원전 124년,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의 우현왕과 맞붙게 되었는데 우현왕이 술파티를 벌이고 있던 밤에 야습을 감행했고 깜짝 놀란 우현왕은 수백명의 기병만 이끌고 간신히 도망쳐버렸습니다
이때 위청은 수많은 전리품을 얻고 복귀하는 와중에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요
바로 자신이 대장군에 임명되었다는 소식과 자신의 아들 3명이 후작에 봉해졌다는 소식이었죠
이에 위청은 "이 모든 군공은 폐하의 신령함과, 여러 교위들, 병사들이 힘써 싸워준 공인데, 아무일도 한 게 없는 나의 자식들을 후작에 봉하는건 가당치 않다" 라는 식으로 말하며 상을 주려면 부하들에게 줘야 마땅하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한무제는 당연히 부하들도 상을 줄것이니 걱정 말라고 대답했다고 하죠
그만큼 위청은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운 부하들에 대한 배려심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던 위청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형편없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위청이 한무제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였고 심하게 눈치를 보고 아부하고 아첨하는 모습 때문이었죠
하지만 노비출신인데다가 여동생 덕분에 낙하산으로 장군에 임명된 그였기에 위청에게는 정치적 기반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무제의 총애를 잃어서는 안 됐고 그에게 잘보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간신배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 위청의 부하 한 명이 위청에게 자신의 권력과 힘을 보여주라는 의미로 사대부들을 한번씩 불러 모으라고 권했지만 위청은 "그런짓은 남의 주인이 되는 자들이 하는 권한이다.
나는 단지 직무에만 따르면 그만인데, 내가 어찌 사대부들을 불러 모으겠냐" 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죠
그만큼 그는 비록 황제에게 잘 보이려 눈치 보고 아첨했지만 권력이나 정치 보다는 장군으로써 임무에 충실히 임하고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선 살아남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위청은 어린시절부터 엄청나게 고생을 했던 터라 부하들과 아랫사람들을 돌볼줄 아는 어진 사람이었는데 사마천은 위청에 대해 '사람됨이 어질고 선하고 겸손하다'라고 평가했다고 하죠
어쨌든 그 이후에도 위청은 열심히 전투에 임해 여러 전공을 세우는 와중에 정말 대단한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그 인물은 바로 곽거병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었죠
곽거병의 어머니는 위청의 여동생이던 위소아 였는데 그는 첫 출전때부터 엄청난 전공을 세우며 종횡무진 활약을 하게 되었고 곽거병은 고작 18살의 나이로 사단장 급의 직위인 관군후에 봉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무제의 눈길도 위청에서부터 곽거병으로 점점 기울게 되었으며 위청보다 기백과 자신감이 넘치는 처조카 곽거병을 매우 총애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곽거병은 관군후에 봉해지고 나서 고작 2년 후 대장군 바로 다음 자리인 표기장군에 임명되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기원전 119년 한무제는 장수들과 의논한 결과 흉노의 땅에서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처음부터 엄청난 대군을 동원한 단기전을 노리게 되죠
그렇게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의 기병을 주었고 이광, 공손하 등 흉노전에 경험이 많던 장수들을 모두 참전시켜 수십만에 달하는 보병 등을 동원해 사막을 넘어 흉노를 뿌리 뽑아버리기 위한 전쟁에 돌입합니다
진군을 하던 도중 흉노의 포로를 통해 선우의 위치를 알게 된 위청은 곧바로 그곳으로 진격했고 얼마 안 가 전투가 벌어졌죠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차이가 났던 덕에 위청군은 흉노군을 포위했고 그렇게 흉노군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되는데 가까스로 포위망을 돌파한 선우는 뒤도 안돌아보고 멀리 도망쳐 버렸습니다
흉노 선우의 군대를 작살낸 위청의 공은 마땅히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위청이 전투를 치르고 있을때 곽거병은 흉노의 땅을 완전히 가로질러 고비사막을 지나 1000km를 주파했고 그렇게 흉노 선우의 최측근 신하이던 장거를 잡았으며 흉노의 왕 3명과 80여명에 달하는 흉노의 장수들과 신하들을 처형시켰고 포로로 사로잡은 흉노족의 숫자만 약 7만 5천명에 달하는 등 믿을 수 없는 전공을 세워버렸죠
그렇게 곽거병과 그의 수하들은 전투 후 많은 상을 받았지만 위청은 흉노 선우를 패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대사마 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표기장군과 대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에 위청과 곽거병의 녹봉도 같아졌으며 위청을 따르던 수많은 부하들도 점점 곽거병 쪽으로 붙어버렸고 훗날 그를 따르는 부하는 임안이라는 사람 딱 한 명만 남았을 정도였다고 하죠
그만큼 위청은 곽거병에게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대규모 원정군을 꾸리고 있을때 이광은 한무제에게 찾아가 자신도 나가 싸우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었는데요
한무제는 이광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정 나가 싸우고 싶으면 위청을 따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위청은 한무제로부터 은밀히 "이광이 늙고 운수가 사나우니 선우와 대적하게 되면 일을 망칠까 걱정이다. 선우와 싸우지 못하게 하라" 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죠
이에 위청은 선우의 위치를 알고 그곳으로 진격할 때 이광에게 약간의 병력을 나눠주고 뒤로 빙돌아 선우를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광은 그럴수 없다고 위청에게 따졌지만 결국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게 되죠
그렇게 이광의 군대는 길을 잃고 오랜 시간을 헤멘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이미 선우와의 전투는 끝나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위청은 이광에게 늦게온 이유를 물으며 질책했는데 화가 난 이광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참사가 벌어지게 되죠
그러자 이광의 군대와 부하들은 비통한 눈물을 흘렸고 그의 죽음이 나라안에 퍼지자 수많은 백성들도 그를 위해 슬퍼했습니다
그렇게 위청은 이광을 죽인 천하의 나쁜놈이 되어버린 것인데요
이 소식을 들은 이광의 아들 이감은 위청을 찾아가 만나자마자 그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위청은 이감을 용서해 주었고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일을 비밀로 부쳤다고 하죠
이광이 죽고난 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더더욱 위청에서 곽거병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곽거병이 24살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급사해버리는 일이 벌어졌지만 나이가 많았던 위청이 다시 관심을 받기엔 늦어버렸죠
또한 한나라도 남월이나 고조선을 상대하다 보니 위청의 전문인 흉노와의 전쟁은 한동안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위청은 천천히 사람들 기억속에서 사라지며 기원전 106년 조용히 눈을 감았죠
비록 여동생 덕분에 장군에 올라 여러 전공을 올렸지만 본인의 능력이 없었다면 낙하산으로 장군에 올랐어도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위청은 대장군이 될 만한 역량은 갖추고 있었던 인물이긴 한 것 같네요
노비의 신분에서 한나라의 대장군까지 올랐던 위청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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