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동은 양반 가문의 여인으로 총명하고 참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고 그 이후로 그녀는 비뚤어지기 시작하여 희대의 간통녀가 되어버린 유감동 이야기입니다.
유감동은 검한성부사를 지낸 유구수의 딸로 양반집의 예쁜 딸이었죠.
어릴 적에는 글이나 시도 잘 짓고 총명한 소녀였습니다.
그러다 평강현감이었던 최중기와 결혼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모든 게 다 행복하고 좋은 일만 가득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와장창 깨트려버린 일이 발생했죠.
어느 날 유감동은 병을 앓게 되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자 집을 떠나 요양을 하기 위해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하필 밤에 출발을 했던 유감동 일행을 막아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김여달과 그의 부하들이었죠.
김여달은 치안을 핑계로 어두운 밤에 불량배들과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온갖 못된 짓을 일삼았던 일종의 양아치 깡패 같은 인물이었는데요.
순찰을 핑계 삼아 유감동의 일행을 위협했고 공갈협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다 유감동은 김여달에 의해 구석진 곳으로 끌려가 겁탈을 당하게 되었죠.
이런 일을 당했는데 조선 사회에서는 가해자였던 김여달보다 피해자인 유감동의 행실을 문제 삼아 비난했습니다.
또한 정절을 잃은 사대부 여인이 되어버렸고 남편에게 버림받았으며 친정에서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죠.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유감동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 뒤로 유감동은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는데요.
자신의 행복을 무너뜨리고 인생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 김여달을 불러 서로 애정행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양반이라 부르지 않았고 스스로를 기생이라며 신분을 낮춰 불렀죠.
그러다 남편 최중기가 무안군수로 가게 되었습니다.
유감동은 남편과 함께 무안으로 떠났죠.
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섰는지, 최중기는 유감동에게 곁을 주지 않았고 이에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유감동은 병을 핑계 삼아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온갖 음란한 사생활이 시작되었죠.
수많은 남자들과의 스캔들에 대한 소문이 막 나자 남편 최중기는 그녀의 행실을 문제 삼게 되었고 결국 둘은 이혼하게 되었죠.
이혼 후 유감동은 아예 기생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난리도 아니었죠.
우의정이었던 정탁은 유감동에게 첫눈에 반해 서로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더 충격인 것은 정탁의 조카인 정효문은 유감동과 숙부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데도 유감동과 관계를 가지기도 했었죠.
또한 관계를 가진 인물들 중에서는 전남편 최중기의 매형도 있었고 정승 황희의 아들이었던 황치신과도 정을 통하였습니다.
게다가 전수생과 배상동은 개국공신의 아들이었죠.
이외에도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남자들은 대부분이 당시 권세를 누리던 양반 가문의 인물들이었고 거의 40여 명에 이르렀으며 꼬리가 길었는지 한양 바닥이 떠들썩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감동의 간통 사건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사헌부에도 알려지게 되었죠.
사헌부에서는 이런 음란한 여자 유감동을 즉각 잡아들였고 이일은 세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1427년 8월 17일 세종은 "사헌부에서 음란한 여인인 유감동을 잡아 가뒀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여인과 정을 통한 남자가 몇이나 되는가?" 라고 물었죠.
그러자 좌대언 김자는 "이승, 이돈,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등이며 몰래 간통한 사람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계속된 사헌부의 조사로 인해 이후로도 그녀와 간통한 남자의 명단은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습니다.
3일 후인 8월 20일에는 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과 개국공신의 아들, 현재 조정의 녹을 먹고 있던 핵심 인사들까지 9명의 이름이 추가로 나왔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름이 나왔는데 유감동과 관계를 맺었던 남자 중 유감동이 양반인 것을 알면서도 간통했던 경우에는 더 중한 벌을 받았고 유감동이 그냥 기생인 줄 알고 간통했던 남자들은 조금은 벌이 약해졌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유감동이 기생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지만 유감동이 스스로 남자들의 진술을 일일이 바로 잡았죠.
기생인 줄 알았다고 거짓말하는 남자는 유감동이 직접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해버렸던 것입니다.
조선 법률에 따르면 양반 부녀자와 간통한 남자는 극형으로 다스렸지만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사람 중에는 정승이나 개국공신의 아들들까지 연루가 되어있어 형량을 결정하기가 굉장히 곤란했었죠.
게다가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남자가 조선팔도 거의 모든 곳에 있을 정도로 계속해서 명단이 나오자 세종은 "이미 간통한 남자의 명단이 나왔고 그 명단에는 재상도 끼어있으니 이 사건은 대체적으로 다 밝혀진 것 같다.
더 이상 이 여자를 심문하지 말고, 밝혀진 것만으로 죄를 결단하라" 라고 명하며 이 이상 일이 커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혹시나 그녀의 입에서 조정의 고위 관리의 이름이 더 나오게 되면 정부의 기능마저 흔들릴까 봐 염려한 것이었죠.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사람만 40여 명이었을 뿐이지, 유감동이 간통한 남자는 1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남자들의 처벌보다는 '간통한 여인 유감동'의 죄를 어떻게 처벌할까가 더 중요한 일로 다뤄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에 연루되었던 관리들 40여 명 중 단 20명만이 곤장이나 유배, 파면 등의 처벌을 받았죠.
심지어 20여 명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감동은 ‘남편을 배반한 죄와 거짓으로 기생이라 일컬으며 사욕을 방자하게 행사한 죄, 음란한 행위로 인륜을 문란케 한 죄’를 물어 사헌부에서는 극형에 처하자는 주장이었으나 세종은 “남녀 사이의 정욕을 어찌, 한낱 법령으로만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끝까지 극형에 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는 곤장을 맞고 변방의 관비로 보내지며 이 일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유구수와 그의 일족들 역시 끌려와 곤장을 맞고, 유구수는 파직당했죠.
그 이후의 유감동에 대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지은 시와 작품들은 음란한 여자의 작품이라 하여 모두 버려지거나 사라져서 현재에 전해지지 않고 있죠.
현재의 그녀에 대한 평가는 불륜, 간통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주장과 유교 시대의 도덕, 윤리에 의한 피해자라는 시각이 양립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견해가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로 지체 높은 권세가들이나 양반들과 간통을 했고, 양반인 줄 몰랐다고 뻥치는 남자들을 콕콕 집어서 사실을 알려 주었던걸 보면 간통을 한 이유도 남자들에 대한 복수심 같기도 하네요.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한 여인이 겁탈을 당하고 나서 가족과 남편에게 버려진 후 인생 자체가 망가져버린 충격적이고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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