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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이완용. 고종의 총애를 받고 독립협회 위원장이던 그가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 민족반역자가 된 이유

by 사탐과탐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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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총애를 받고 독립협회 위원장이던 그가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 민족반역자가 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나라를 팔아먹은 인물 이완용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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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5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찾아가 "승낙하든 거부하든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거부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것인지 생각하셔야 할겁니다" 라며 고종을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2일후인 11월 17일, 이토는 헌병들을 이끌고 궁으로 쳐들어와 고종에게 대답을 재차 물었는데 고종은 지금 몸이 안좋으니 대신들과 협의해 처리하라며 이토가 원하던 대답을 미루려고 했죠

 

한편 병사들이 궁으로 쳐들어 온걸 본 대신들은 겁에 질려 궁을 벗어나려했지만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중명전에 모이게 됐고 그곳으로 찾아간 이토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일본과의 한가지 조약을 맺는것에 대해, 찬반을 묻는것이었죠

이 조약에 대해 한규설은 반대했고 이하영은 현재 급박한 정세를 운운하며 확실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토는 그가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는다고 찬성으로 생각하겠다며 넘어갔죠

 

그리고 다음 사람인 이완용에게도 찬반을 물으니 이완용은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다. 이 조약을 체결하는것이 좋다" 라고 말하며 찬성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이 차례로 찬성표를 던지며 11월 18일 새벽 1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이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죠

 

이때 고종이 대답을 미뤘고 어전회의에서는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던 이 조약은 바로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늑약입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 당했고 이때 찬성을 했던 다섯명을 '을사오적'이라 부르죠

오늘은 을사오적 중 최초로 찬성을 한 인물이자 친일파, 매국노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 '이완용'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놀라운 사실은 독립협회 첫 위원장이 바로 이완용이었고 독립문 건립에 앞장섰던 핵심인물 중 한명이 바로 이완용이었죠

그리고 고종의 총애도 받았고 일본을 피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기까지 했던 그가 어쩌다가 친일파 매국노의 최고봉이 되었을까요?

 

그는 1858년 6월 경기도에서 2남 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완용의 집안은 사실 몰락한 양반인 잔반이었지만 그가 10살이 되던해에 당시 정계의 거물이자 먼 친척이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해에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갈수 있었습니다

 

양아버지 이호준의 비호아래 굉장히 빠른속도로 승진가도를 달릴수 있었죠

당시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내정 간섭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고종은 청나라의 손에서 벗어나기위해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활발히 소통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유창하게 할수있는 조선인이 필요했고 그런 인재 육성을 위해 고종은 육영공원이라는 근대식 학교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죠

 

이완용은 앞으로 미국과의 교류가 굉장히 중요할거라 생각했고 스스로 육영공원에 입학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육영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했는데요

그러다보니 이완용은 조선인 중 몇명 되지 않는 영어실력자가 되었죠

 

그런데 이완용은 영어는 원어민수준으로 유창하게 하는 반면 일본어는 몇마디밖에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사람들과는 영어를 쓰거나 통역사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하죠

어쨌든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공부했던게 계기가 되어 그는 주미 공사관원 중 한명으로 발탁되었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굉장히 근대화 된 미국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하죠

그런데 도착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주미 공사에게 귀국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청나라의 간섭 때문이었죠

그 덕분에 이완용은 약 2년간 임시대리 공사로 일했고 1890년 10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3년간의 미국생활로 그는 대미외교의 1인자이자 친미파의 대표격인 인물이 되었죠

그리고 이후 여러 관직들을 두루 거친 후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고종에게 이완용은 꼭 필요한 인재였기에 고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고작 34세이 나이에 종 2품의 관직까지 제수받았습니다

 

그러던 1894년 6월, 고부민란으로 촉발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청나라에 병사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에 일본도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병력을 파병하게 되었죠

그렇게 양국군대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와해되고 말았고 얼마안가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의 지배를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를 청일전쟁이라 부르는데, 이때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요동반도와 타이완섬을 차지했고 배상금으로 2억냥을 받아냈는데 이는 청나라의 2년치 세수에 버금간다고 하죠

일본의 급격한 세력 확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압력을 행사했고 (삼국간섭)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다시 반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러시아와의 외교를 돈독히 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친미 친러 성향의 인물들로 내각을 재편했는데 이때 친미파의 핵심인물이던 이완용은 학부대신에 임명되었습니다

 

조선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는데 분노한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침입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했던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했고 다시 조선 조정에 친일내각을 집권시켰습니다 (을미사변)

이때 이완용은 자신과 친분이 돈독했던 미국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있었죠

고종이 친일파와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고종을 구출해 미국공사관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미국 공사관으로 고종을 구출하는것은 실패했지만 1896년 2월 11일, 이완용은 친러파와 공모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했죠 (아관파천)

이때까지만해도 이완용에게 일본은 침략자이자 물리쳐야할 적이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이후 곧바로 친일 내각을 모두 몰아내버렸고 다시 조정은 이범진, 이완용 등의 친러 내각으로 조직되었죠

 

아관파천을 성공한 뒤 고종은 더욱 이완용을 총애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무려 세개의 직급을 받고 최측근 관료로 우뚝 서게 됩니다

하지만 고종을 향한 일본의 압박은 계속되었는데요

일본은 조선 백성들이 보는 신문에 '자신의 궁을 떠나 외국에 보호를 요청한 국왕을 폐위시켜야 한다' 라며 기사를 쓰기도 했죠

 

이에 이완용은 신문사에 강력한 경고를 했으며 일본 공사에도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1896년 7월 2일, 이완용은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그곳의 위원장 직을 맡았죠

훗날 그는 독립문 건립에도 앞장섰던 핵심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고종의 환궁운동을 전개했는데 그렇게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궁궐을 방어할 군사가 갖춰지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지 1년만인 1897년 2월에 다시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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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에 고종은 조선은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부터는 러시아의 간섭이 심해지기 시작했는데요

러시아는 1년간 보호해 주었다는것을 명분으로 각종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여러 이권들을 요구했으며 사사건건 내정 간섭을 한것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더이상 국제사회에서 위신이 떨어져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이완용과 대한제국의 내각은 러시아의 침략 위험을 무릅쓰고 금광 및 석탄 채굴권 요구를 거부했죠

 

또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완용은 미국과 손을 잡자고 주장했는데요

그렇게 그는 주한미국공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을 통해 각종 이권을 헐값에 넘기면서 미국의 힘을 이용해 보려고 했지만 미국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우려해 이완용과 대한제국의 도움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러시아의 압력이 있기도 했지만 미국이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대한제국의 요청은 모른체하자 이완용은 능력을 의심받기 시작했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나면서 결국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고 말았죠

 

게다가 업친데 덥친격으로 그의 명망이 바닥을 치는 일들이 신문에 실렸는데요

그가 외부대신이던 시절에 각종 이권을 싼값에 미국에 죄다 넘겨버렸다는 의혹과 나라의 세금 및 공금을 횡령한것, 그리고 직무태만으로 관찰사 자리에서 마저 좌천 될 뻔했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 독립협회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죠

또한 1901년에는 아버지 이호준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3년상을 위해 정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3년상을 마친 이완용은 1904년 2월 다시 정계로 복귀하는데 얼마안가 대한제국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벌어지죠

그러자 고종은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고 이에 이완용을 다시 기용해 여차하면 미국공사관으로 파천할 목적으로 미국과 비밀교섭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하는것으로 약속을 되어있던 것이죠

 

그렇게 친하게 지내려고 이권을 마구 넘겨줬지만 미국은 매몰차게 대한제국에서 발을 빼버렸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결국 대한제국은 기댈곳 하나 없이 일본 세상으로 되어버렸죠

그러자 이완용은 곧바로 일본과 친하게 지내던 이하영을 찾아갔고 그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우리가 잘아는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이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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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앞서 말했던 1905년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친일 행각이 시작되었죠

이때 외교권이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이 단돈 5달러에 강제로 일본에 매각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 일본 등 10여 개의 해외 공관들이 즉시 폐쇄되는 국가적 치욕을 맞기도 했죠

을사늑약의 과정 중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은 이완용은 이후부터 이토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그는 이토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조약 파기를 외치며 맹비난했는데 이완용은 분노한 민중들을 '조약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자들' 이라고 치부해버렸고 '외교권은 잠깐 맡긴것일뿐, 나중에 나라가 부강해지면 다시 돌려 받으면 된다' 라며 비난하던 민중들을 비난했죠

을사늑약후 1906년 3월에 일본은 통감부를 만들었고 초대 통감으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새로운 내각의 총리대신이 되었죠

거기에 더해 광산사무국총재까지 임명되며 권력은 물론 재력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는데요

사전에 이 일을 알게 된 일본의 수작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죠

 

그러자 이토는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이일을 어떻게 수습할거냐고 하니 그들은 앞다투어 고종에게 찾아가 '일본 황제 폐하께 석고대죄를 해야한다', '퇴위를 통해 사죄해야한다' 라며 협박을 했고 고종은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버텼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압박과 친일파 신하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못이겨 마지못해 고종은 대리청정의 명만 내렸죠

 

그런데 이완용은 아예 내시 2명을 데려와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는 강제로 황위를 고종에서 순종으로 교체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1907년 7월 19일 고종은 강제퇴위 당했고 한국사 마지막 군주인 순종이 즉위했죠

순종이 즉위하고나서 이완용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모든걸 다 갖다 바치기 시작하는데요

 

순종이 즉위 후 5일 지난 7월 24일,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고등관리 임명권 등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인 정미 7조약을 이완용의 전권을 이용해 체결해 버립니다

이로써 이제 대한제국은 내정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죠

그리고 정미 7조약에 찬성한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과 더불어 정미 7적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죠

 

이에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었을때 그를 처벌할것을 순종에게 상소를 올렸고 결국 허위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1909년 7월 12일, ‘한국사법 및 감옥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에 (기유각서) 총리대신으로써 서명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7월 26일에는 '한국 중앙 은행에 관한 각서'를 조인해 중앙은행 운영과 권리에 대한것들도 일본에 넘겨 대한제국의 경제권도 송두리째 일본에 넘어갔죠

 

이러한 이완용의 매국적 행위로 인해 그는 독립운동가들의 1급 암살 대상자가 되기도 했으며 분노한 민중들은 그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09년 10월,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죽임당하자 이완용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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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개월후인 1909년 12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했던 이완용은 인력거를 타고 길을 가다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던 한 남자에 의해 허리와 어깨에 3번 칼에 찔리는 일이 발생했죠

이완용을 찌른 남자는 바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였습니다

 

그렇게 이완용은 대한의원에 실려가 대수술을 받은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죠

살아남긴 했지만 이때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을때까지 지독한 폐렴을 앓았습니다

이때 일본은 친일파 관료중 가장 높은자리에 있던 이완용에게 최고의 의료진을 제공해 겨우 살려냈다고 하죠

이 사건을 계기로 이완용은 반성은 커녕 더욱 더 매국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하는데요

 

1910년 6월에는 경찰권을 일본에 넘겼고 1910년 8월, 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체결 협상을 벌였는데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이 조약에 주저하는 이들을 데라우치에게 꼰질러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순종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8월 22일, 이완용은 이를 반대하던 학부대신 이용직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내각 회의를 열어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켜 버렸죠

 

이 조약의 제1조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의 모든 일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입니다

결국 그 해 8월 29일, 마침내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고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던 조선, 바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경술국치라고 하는데 이때 이 조약을 찬성한 친일파 매국노를 '경술국적'이라고 했고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경술국적에도 이름을올리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죠

당시 이완용은 일본에 "먼저 너무 오래끌면 여러가지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것이 좋겠다" 라며 합병을 먼저 제의 했는데 그의 적극적인 합병 제안에 일본은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 들어온 기분이였다' 라고 했다고 하죠

 

그렇게 한국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나라를 팔아먹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해 일본은 그에게 백작의 작위를 주었고 이후에도 이완용은 죽을때까지 일본이 조선과 조선인들을 착취하는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기도 하고 조선인들을 착취하던 나쁜 제도는 더 악랄해지도록 자문하기도 하는 등 나쁜 일본인들보다 더 악질적인 사람이 되었죠

 

조선인이 조선인들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 역시 그가 내놓았던 아이디어였습니다

또한 조선인 아이들이 일본어를 배우도록 공교육에 일본어 시간을 도입했고 이순신전과 같은 위인전은 읽지 못하게 하면서 민족의 정신까지 말살시키려 했죠

1919년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신문에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면서 중지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12월에 그는 친일매국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이 되었죠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하고 친일단체인 동민회의 고문으로도 활동하면서 살다가 1909년 이재명에 의해 입은 상처로 인해 천식과 폐렴, 흉통 등으로 고통을 겪던 와중 그 후유증으로 1926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일본 순사들의 호위속에 고종황제 장례행렬을 뛰어 넘을 정도의 규모로 치뤄졌다고 하죠

 

나라를 팔아먹은 만큼 이완용의 재산도 대한제국 황실 다음으로 많았다고 하는데 그의 집은 3700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고 조선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요

이완용의 재산은 대부분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인데 당시 이완용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약 7~8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훗날 자신 소유의 토지를 현금화 했지만 총 규모는 현재까지도 파악되지 않는다고 하죠

 

훗날 그의 증손자는 친일파 후손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997년 7월 승소하였으며, 그렇게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가로 30여억 원이나 되었는데 이완용의 증손자는 곧바로 이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가버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친일 반민족주의자이자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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