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과 졸장 원균이 서로 앙숙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우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은 유능한 무관을 선발하고자 선조에게 한 명의 인물을 추천했습니다
곧 이어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이조판서 류성룡은 이 인물을 종6품인 정읍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시켜줬죠
순식간에 여러 품계를 뛰어넘어 전라좌수사가 된 이 인물은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동인 세력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자 당연히 정철과 윤두수 등 서인 세력은 원균을 밀기 시작했죠
이 두 인물은 이후 서로 으르렁 대며 욕하기에 바빴는데요
임진왜란의 최고의 성웅 이순신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몰살시킨 원균이 왜 이렇게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만 봐도 원균을 너무나도 싫어했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죠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습니다
난중일기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면 경상 우수사 원균은 흉악하고 음험 하다느니 원균의 말이 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어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느니 원균이 술을 먹자 해서 조금 줬더니 나중에는 엄청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러 지껄였는데 이를 매우 해괴하게 여겼다 라는 등 원균을 못잡아 먹어 안달나 보이기도 합니다
훗날 원균이 도원수 권율에게 혼날 때 이순신은 그를 비웃으며 비난을 하기도 했고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원균이 문상을 보내자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했지만 이는 도원수 권율의 명일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은 깊었죠
이렇게 원균은 난중일기에 1593년 2월부터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험담이고 약 30여 차례나 나왔습니다
이 정도로 원균과 이순신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죠
이 둘은 애초에 서로 다른 점이 많았었는데요
원균의 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으로 그의 집안은 무인 집안이었죠
하지만 이순신의 집안은 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보니 역적 집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 이정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채 평생을 조용히 숨죽여 살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둘은 성격도 많이 달랐는데요
원균은 용장으로써 물불 안 가리고 돌격하는 스타일의 장수였죠
1576년 32살의 나이로 무과에 합격한 원균은 처음엔 주로 북방에서 근무하며 여진족을 상대했었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원균의 이름만 듣고도 공격을 멈추고 달아나기 바빴다고 하니 그의 용맹함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죠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우며 명성을 날렸던 원균이었지만 때로는 지나친 용맹함이 무모함으로 변해 부하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습니다
반면 이순신은 미리 적의 정보를 얻은 다음 적들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전략을 꼼꼼히 짠 다음에 작전에 돌입했었기 때문에 전투를 할 때도 실패할 확률이 없다시피했죠
그가 23전 23승이란 믿지 못할 기록을 세운 것도 바로 그의 치밀한 성격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한 원균은 적의 수급에 집착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 안방준이 저술한 은봉전서에는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데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했다고 하죠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은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한 공기보다 많다며 뒤에서 그를 비웃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원균은 학살당한 조선 백성 시신을 왜적으로 둔갑시킨 뒤 목을 거두기도 했으며 왜군에게 협조를 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형을 시키기도 했던 것이죠
난중일기에는 그가 남해안의 섬으로 배를 보내 조선인 어부들의 목을 찾는 것을 들은 이순신이 이를 저지하고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있으며 왜군에게 협조했다는 누명을 씌운 뒤 목을 베어 바친 것을 바로 잡았다는 장계를 올린 기록도 있습니다
원균의 이 모습만 봐도 이순신이 그를 싫어한 이유가 충분할 것 같죠
이 둘이 서로 싫어하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자 생기게 되는데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원균은 경상우수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였죠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700여 척의 전선들과 18000여 명의 병력이 부산포로 진격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원균은 지레 겁을 먹고 싸워보지도 않고 100여 척에 달했던 조선의 전함들을 모조리 침몰 시켜버리고 도망쳤는데요
사실 당시 조선 수군은 상비군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병력이나 격군 등이 모이기에 시간이 부족했다고 하죠
왜군이 도착하기 전에 병력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선들을 자침 시키지 않았다면 왜군이 수많은 조선의 배들을 사용했을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순신이 평가하기를 "당시 상황으론 누구도 딱히 방법이 없었겠지만 평소에 미리 바다에 정찰선을 띄워놓아 빨리 적을 발견했으면 방비를 굳힐 수 있었을것이다" 라고 했다고 하죠
어쨌든 그렇게 100여 척의 아군배를 자침 시킨 원균은 달랑 한 척의 배에 타고 도망 가면서 전라 좌수사이던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전라좌수군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출진하자 그제서야 1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원균이 나타났고 이후에 도망쳤던 경상 우수군 장수들이 3척의 판옥선과 2척의 협선을 이끌고 합류하게 되었죠
그렇게 이순신의 지휘 아래 옥포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게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열심히 싸워 왜군을 격파했다고 조정에 보고를 올리자" 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조금만 있다가 올리자고 말하고는 밤에 몰래 자신과 전라좌수군의 전과 위주로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원균은 군사들과 전함들을 다 잃었고 적을 공격할 때도 별로 공을 세운 것도 없었다' 라는 식의 보고서를 올려버린 것이었죠
사실 원균이 들고 온 경상 우수영의 병력은 기껏해야 4척의 판옥선과 2척의 협선이 다였기 때문에 실제로 공을 많이 세운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원균은 이순신을 미워하게 되었고 이순신 역시 원균을 싫어하게 되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죠
이후로도 원균이 이순신에게 몇 번 원군 요청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무시해버리기도 했는데요
당시 이순신은 상황을 보고 판단을 한 것이었지만 원균은 이순신의 이러한 점에 더 열받아 한 것입니다
반대로 원균은 이순신에게 날이 밝는 대로 출진해 왜적과 싸우자고 해놓고 다음날이 되자 술을 너무 많이 먹어 취기에 정신이 없다고 핑계를 대며 출진 하지 않은 적도 있다고 하죠
그렇게 서서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다 서로 더 으르렁 대게 되는 일이 또 일어나는데요
바로 한산도 대첩이 있기 전 작전회의를 할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순신이 견내량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적은 수의 판옥선만 보내 유인해낸 뒤 한산도 근처 바다에서 섬멸하는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니 이를 듣고 있던 원균이 그럴 필요 있냐며 그냥 전군을 이끌고 바로 공격해버리자고 말한 것이었죠
이에 이순신은 수많은 부하 장수들 앞에서 원균에게 "공은 전술을 모르시오?" 라고 면박을 줬던 것입니다
당시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이도 5살이나 많았고 무과 급제도 9년이나 더 빠른 선배였는데 후배인 이순신이 그런 그에게 창피를 준 것이었죠
그러지 않아도 옥포해전의 보고서 사건 때문에 이순신에 대한 심기가 불편하던 원균에게 이 날의 사건은 이순신을 더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산도 대첩에서 왜군을 대파한 이후 신설된 관직인 종2품 삼도 수군 통제사 직에 원균을 제치고 이순신이 되어버린것이죠
서열이나 신분 등이 분명하던 당시 조선시대에 원균에게는 이보다 더 한 치욕과 모욕은 없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래서 이순신과 원균 사이는 더 멀어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1593년 7월엔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진영을 한산도로 옮기면서 운주당이라는 작전통제실을 지었는데요
그리고 그는 일개 병사라 할지라도 작전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도록 운주당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었죠
전투에 앞서서 누구든지 의견을 내고 충분히 토론하면서 치밀하게 작전을 짰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그만큼 전투에서 패할 확률이 굉장히 낮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운주당에 첩을 데려다가 같이 술이나 먹으며 지내는 원균이 진짜 꼴 뵈기 싫어했을 것 같죠
이런 원균의 태도에 심지어 병사들마저 '만약 왜적을 만나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을것이다' 라고 그를 비웃었다고 합니다
부하들의 신망도 잃어버린 원균은 지휘관으로써의 체통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얕보고 두려워 하지 않는 병사들이나 부하 장수마저 생겼죠
신중하게 생각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짠 뒤 승리가 확실해야만 움직이던 이순신에게는 원균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거니와 무모한 사람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의 전투에 임하는 스타일 마저 이렇게 다르니 친해질 수 없었던 것이죠
이후 정유재란을 일으키기 전 이순신을 너무 두려워 했던 일본은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요
고니시 유키나가는 간첩을 조선으로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언제 바다를 건너 재차 침략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흘렸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고니시와 가토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고니시가 가토를 제거하기 위해서 일부러 정보를 알려줬다는 이야기도 있죠
어쨌든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가 그들이 상륙하기 전에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죠
하지만 왜군이 조선군보다 더 병력이나 전함도 많았기에 부산으로 출정했다가 오히려 적에게 당할 위험도 있었고 확실하지 않은 첩보만으로 병력을 운용할 수도 없었으며 심지어 이 첩보가 적들의 계략이라면 조선수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에도 출정하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순신의 그런 태도에 원균은 정반대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렸는데요
"우리 수군이 출진해 부산 앞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가토 기요마사가 수전에도 약하기 때문에 그냥 물러날것이다" 라는 내용이었죠
이에 선조는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은 이순신을 아니꼽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원균의 상소를 보자마자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상도의 주요 항구나 포구와 같은 거점들은 왜군이 거의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순신이 정박해있던 일본 수군을 개작살 낸 적이 많았었기 때문에 곳곳에 왜성을 쌓아 조선 수군 방비를 굳건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원균의 상소는 조선수군을 의도적으로 수몰시키려 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죠
어쨌든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은 정작 본인이 말한 대로 출진하지는 않고 주저 하고 있었는데요
원균이 보기에도 부산포를 공격했다가는 수군이 아작날 것이 뻔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도원수 권율은 1597년 7월, 원균을 불러다가 왜적 공격을 안 하고 있다는 이유로 곤장을 쳐버렸죠
수많은 부하들 앞에서 치욕을 당한 원균은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출진 준비를 하던 중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고 엄청난 타격을 받아 이순신이 애써 만들어놓은 배 100여 척이 파괴되었고 고작 12척만 남았으며 조선 수군 1만여 명이 전사하고 마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원균도 육지로 도망갔는데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죠
아마 쫓아온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을 거라고 예상되는데요
이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이 그나마 배 12척을 살려 간신히 도망쳤던 덕에 명량대첩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루어 냈던 것이죠
원균이 경상 우수사일때 100여 척의 배를 자침 시켰고 칠천량 해전 전과 후에 또다시 100여 척을 잃었던 반면에 이순신은 자신이 직접 잃은 배는 한 척도 없으며 왜군의 배만 500여 척을 수장시킨 것을 보면 둘은 비교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기도 합니다
어떤 한 인물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반대되는 악당이나 빌런이 필요하긴 한데요
임진왜란의 희생양이 바로 원균 아닐까 싶죠
어쨌든 이후 선조는 비록 원균이 칠천량에서 왜군에 대패했지만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점을 높이사 원균에게 이순신과 같은 선무 일등공신을 내렸다고 합니다
지금 와서 보면 원균과 이순신은 너무너무 스타일이 다른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던 것 같기는 하죠
한편으로 둘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한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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