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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조선시대 모순된 성문화. 그 누구보다도 성에 집착했던 내로남불에 모순덩어리였던 양반들의 성생활

by 사탐과탐 202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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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유교의 나라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성에 집착했던 계층이 바로 양반들이었는데요
내로남불에 모순된 조선시대 성문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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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은 인간의 본성인데요

이 성욕이란 놈은 강제로 막으려 해도 결코 막지 못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사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면서 겉으론 성적으로 아주 깨끗한 척, 폐쇄적인척했었죠

 

오죽하면 '남녀칠세 부동석'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녀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조차 금기시했었습니다

조선의 엄격한 유교 사상과 신분제도는 성별에 따라, 그리고 신분에 따라 성문화를 각기 다르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반 남자들은 자유롭게 할거 다했고 여성들은 성적으로 억압받았으며 신분이 낮은 백성들에겐 유교사상이니 유학이니 하는 것은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당시 모든 권력을 독점하다시피했기 때문에 폐쇄적인 성문화에도 많은 혜택을 받았고 이에 반해 여자들은 억압된 사회였던 만큼 성적으로도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이죠

<소녀경>이라는 책은 대표적인 성의학서 인데요

성과 관련된 도교의 수행법인 '방중술'에 관한 중국의 고전 서적이죠

성적인 본능을 억압하지 않고 올바르게 발산하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방중술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소녀경과 방중술 역시 조선으로 넘어와 조용조용히 널리 알려졌는데요

조선시대 때 남자들에게 알려진 방중술은 좀 특이하긴 했습니다

남자의 정액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이를 아껴 써야 한다고 했죠

여자와 관계 시 심적으로 만족만 하고 정액은 배설하지 않은 채 보존하는 것이 체력을 강하게 하고 몸을 보호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광해군 12년, 이창정이 지은 <수양총서류집>에는 음양의 조화나 남녀의 화합이란 것이 자연스럽고 본능이라고 적고 있지만 지나친 성욕은 오히려 원기를 갉아먹어 생명을 단축시킨다라고 기록되어 있죠

그래서 잠자리 횟수까지 정해주는데요

20세 이전에는 이틀에 한번

30세까지는 3일에 한번

40세까지는 10일에 한번

50세까지는 한 달에 한번

60세까지는 7개월에 한번

그 이후는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또한 과식하거나 술 먹고 난 후, 화가 났을 때나 춥거나 더울 때, 천둥번개가 치거나 무지개가 뜰 때는 남녀가 합방을 하면 안 된다고까지 기록해 뒀다고 하죠

하지만 유교사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 건 아니었는데요

노비들이나 천민들에게는 유교니 뭐니 하는 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노비들끼리 성생활을 했죠

그리고 원칙적으로 노비남자는 노비여자와만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남자노비가 여자노비를 아내로 맞기 위해서 강제로 몹쓸 짓을 해버리는 경우도 흔히 있었던 일이었죠

하지만 여자노비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바로 주인이었던 양반들이었는데요

 

양반 남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일 뿐인 여노비에게 강제로 몹쓸 짓을 하는 것을 '갓김치 먹기' 라고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격한 노동을 하다 보니 여노비의 몸에서는 땀 냄새가 났기 때문에 그들을 갓김치라고 칭했던 것이죠

심지어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 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여노비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훗날 출산을 하더라도 아기는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양반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죠

양반들은 여자노비가 자식을 낳더라도 자신의 자식이지만 철저히 모르는척했고 절대 자식 취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에 대해서 이렇게 폐쇄적이던 만큼 외부인에 대한 경계는 굉장히 심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모르는 남자가 허락도 없이 집안에 들어오면 죽여도 괜찮았을 정도였고 남자노비가 중문 안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목숨이 두 개라도 모자랐죠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 한 점은 권력을 가졌던 남자들이나 양반들에게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유교사상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무용지물이 될 만큼 성에 대해서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나 양반들이 성에 대해 자유로웠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조선사회가 모순되었는지 대충은 알 수 있는 것 같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생제과 축첩제 인데요

이 두 가지는 기득권 남자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양반들은 합법적 매춘부인 기생들 덕분에 법도 어기지 않으면서 편하게 성적 욕망을 채우기도 했죠

처음에 기생들을 법적으로 허용해 준 명분은 변방에서 군 복무 중인 아내 없는 군사들을 위해서였는데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생들은 조선시대 기득권 세력인 양반의 전유물이 되어갔죠

그러다보니 기생들과의 별의별 스캔들도 많았습니다

국상 중일 때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기생과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 탄핵당해 파직되기도 했고 기생과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곤장을 맞거나 상투가 잘린 양반들도 있었죠

 

거기다가 조선시대에는 기생 외에 불법적인 매춘부도 있었는데요

바로 '유녀(遊女)' 와 '화랑(花郎)' 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간통이나 강간 등의 이유로 순결을 잃은 여성들이나 먹고살기 힘들었던 천민들이 제도권 밖에서 매춘행위에 종사한 것이었죠

 

그리고 양반 남자들은 정실부인 외에도 첩을 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첩을 들이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자들의 성적 욕망 해소가 가장 컸죠

그런데 여자들이 여러 명의 남편을 둔다거나 남편 이외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남자가 첩을 뒀다고 질투하거나 투기하는 것은 <칠거지악>이라고 해서 금기시하기까지 했죠

나중에는 남자들이 축첩을 하는 행위가 자기 과시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러다보니 태종은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편법을 동원한 양반들의 축첩은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태가 그 정도까지 가자 축첩을 하다 걸리면 맞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장 90~100대의 강력한 처벌을 내린다고까지 했죠

하지만 조선시대 왕들도 왕비 이외에 후궁들을 둔 것처럼 양반들도 비공식적으로 일부다처가 적용되어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고 살아도 그냥저냥 넘어갔습니다

남편은 첩을 여럿둬도 되고, 아내는 질투조차 금지시킨 건 모순된 조선의 성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죠

 

게다가 축첩은 남자들에게만 좋은 일이었지 정실부인과 첩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관계였습니다

대체적으로 첩은 예쁘고 젊은 경우가 많았기에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남편 외에 집안의 모든 권력은 정실부인에게 있으니 첩 입장에서는 정실부인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고 눈치 보며 사는 것이 고역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만약 남자에게 또 다른 첩이 생겨 자신이 눈밖에 나버리면 종들에게조차 갖은 수모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실부인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는데요

투기와 질투를 하는 것은 부인으로써 부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눈엣가시 같은 남편의 첩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모든 고통은 여성들이 받았지만 남자들은 성적인 욕망 충족만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탕에 남존여비 사상이 깔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그러다보니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조선시대에는 유독 심했죠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든 간통을 저질렀을 때는 엄격한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백제는 간통한 여자를 노비로 삼았고 고려 때는 아내가 간통한 경우에는 남편이 상대 남자를 죽여도 무방했으며 아내는 내쫓아버려도 상관없었죠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성 윤리가 강조되다 보니 간통에 대한 처벌이 다른 때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게다가 근친 간에 간통을 하게 되면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남자들이 처가에 들어가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장모와 사위 간에 간통이 많았고 그 외에도 형부와 처제, 제부와 처형과 같은 매우 가까운 친척 사이에 간통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하죠

 

간통을 하다 발각됐을 시, 남녀 동일하게 처벌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유부녀에게는 더 강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죠

단적인 예가 바로 남자가 여자노비를 사랑방에 들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여자가 남자노비를 사랑방에 들이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에게 열녀라는 미명하에 죽음을 강요하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만큼 조선시대 양반 남자들은 알게 모르게 여자보다는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고 성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웠던 것이죠

한편 궁에서는 동성애가 많이 발생하기도 했는데요

왕에게 선택받지 못한 궁녀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남자 손길 한번 못 받아보고 외로운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간에 동성애를 즐겼던 것이죠

 

문종의 아내이던 순빈봉씨는 궁녀와의 동성애 때문에 폐서인 되기까지 했던 적이 있습니다

실록에는 궁녀들의 동성애가 적발되면 곤장 백대를 때리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죠

실록에 실렸을 정도면 당시 궁녀들끼리의 동성애가 많긴 많았었나 봅니다

재혼이 금지된 과부들도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런 조선의 남자들만 특혜를 입고 차별적이던 성문화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개화기 때인데요

 

1889년 3월, 수십 명의 여성들이 덕수궁 앞에 모여 시위를 벌린 것입니다

바로 '한 남자가 두 명 이상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라며 남자들이 첩을 두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한 것이죠

그리고 마침내 1905년 4월에, 대한제국 형법대전이 반포되고 시행될 때 간통죄도 포함되었죠

이후 시간이 흘러 1953년에는 대한민국 형법 제정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양반 남자에게만 유리했던 조선시대 모순된 성문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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