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태후는 북제의 황후로 훗날 태후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선천적으로 음탕했던 호태후는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훗날 역사상 전무후무한 선택을 하기에 이릅니다.
중국 역사에서 420년~589년까지 약 170년을 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수많은 나라가 생겼다가 멸망하다를 반복하다 훗날 '고양'이라는 사람이 북제라는 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인 문선제가 되었죠.
호씨는 북제 조정에서 후궁을 뽑을 때 선발되었는데 아름다운 미모의 그녀는 문선제의 동생이었던 고담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고담은 북제가 건국된 후 장광왕에 봉해졌고 그녀도 장광왕비가 되었죠.
남편 고담은 야망이 가득했던 인물인데요.
형 문선제가 죽자 아들 고은이 다음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친형인 고연과 힘을 합쳐 조카인 고은을 내쫓았죠.
그다음 황제는 형 고연이 되었지만 1년 만에 낙마사고로 죽자 561년. 고담은 마침내 무성제로 즉위했습니다. 당연히 호씨도 황후로 신분이 상승되었죠.
무성제 고담은 황제가 된 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무성제는 호황후 외에도 이씨, 팽씨, 왕씨, 마씨 등의 후궁을 두었고 특히 형수인 이조아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해 강제로 관계를 맺었죠.
무성제는 총애하던 형수 이조아의 거처인 소신궁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호황후는 남편인 무성제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하며 독수공방했죠.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음탕했던 호황후는 자신의 끓어오르는 속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든 건 바로 무성제가 굉장히 신뢰하던 심복인 내시 화사개였죠.
그녀는 화사개에게 은밀한 눈빛을 보내며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야심가였던 화사개는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자신이 권력을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겨 호황후의 은밀한 눈빛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죠.
두 사람은 서로 너무 잘 맞았는지 금방 깊은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습니다.
낮에는 황제에게 밤에는 황후에게 총애를 듬뿍 받는 화사개는 나라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백은 생겼지만 실질적인 권력도 손에 거머쥐고 싶었죠.
또한 호황후와도 밀회가 아닌 드러내놓고 향락에 빠지고 싶었습니다.
그는 호황후와 말을 맞춰 무성제에게 “태자에게 황제를 물려주고 상황으로 편안한 삶을 즐기소서.” 라고 건의했습니다.
음주가무와 향락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던 무성제는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죠.
그러고 나서 궁내의 깊숙한 곳에 들어간 후 주색에 과도하게 빠져 허우적거리다 3년 후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태자였던 고위가 황제로 즉위하자 호황후는 황태후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호태후와 화사개는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지자 대놓고 음탕한 연애질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두 사람의 치정에 대해 대신들 사이에서는 극도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황제 고위에게 화사개를 처벌하도록 상소를 올렸죠.
하지만 황제 고위는 나이도 어렸고 어리버리 했기 때문에 어머니인 호태후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대신들의 상소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틈을 타서 화사개는 자신을 탄핵하려 했던 대신들을 쫓아내고 황궁을 자신의 심복들로 채워갔으며 나중에는 황제에 의해 회양왕에 봉해졌습니다.
그는 북제에서 최고의 권력가가 된 것입니다.
나라가 점점 개판이 되어가고 어머니 호황후의 더러운 행태를 보다 못한 황제의 동생 고엄이 결국 화사개를 암살해 그의 권세도 끝나게 되었죠.
화사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태후의 뜨거운 가슴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녀는 부처에 예불한다는 명목으로 절에 드나들었는데 곧바로 스님이던 담헌과 눈이 맞아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호태후가 절에 드나들며 비밀리에 둘의 깊은 관계가 이어졌지만 절에서의 비밀 만남이 만족스럽지 못하던 호태후는 스님을 궁으로 불러서 예불 드리겠다며 담헌을 남편이 살아있을 때 거처하던 침실까지 불러들였으며 이제는 밤낮으로 그와 함께 관계를 가졌죠.
담헌은 어느 순간 화사개가 누렸던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담헌의 별명이 태상황이었을 정도였죠.
하루는 세상 물정 모르는 황제 고위가 문안을 드리기 위해 어머니 호태후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호태후 곁에 용모가 뛰어난 여승 두 명이 있는 걸 보고 여승들이 마음에 들었던 황제는 호태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서 여승들을 자신의 침실로 불렀죠.
아리따운 두 여승과 즐기고자 했던 황제 고위는 뜻밖에 벽에 부딪힙니다.
그 여승 두 명이 황제와 관계를 하지 않기 위해 죽자 사자 반항했던 것이죠.
이에 제대로 열받은 황제는 강제로 여승의 옷을 벗겼는데 알고 보니 여승들은 여장을 한 남자였습니다.
그 두 명은 담헌의 밑에 있는 어린 중들이었는데 얼굴이 예쁘게 생겨서 호태후의 눈에 들었던 것이었죠.
궁으로 데려가려니 남자를 들이는 것이 황제 고위가 알까 봐 두려웠던 호태후는 여승으로 분장시켜 궁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이들을 심문한 황제는 어머니 호태후의 이런 문란한 행실에 분노했고 그 어린 중들과 담헌화상까지 모두 참수했습니다.
조사 과정 중 드러난 호태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원산왕 등 지방관리들도 모두 참수 당했죠. 그리고 호태후는 북궁에 유폐되었습니다.
그러다 577년. 사치와 향락으로 얼룩진 북제는 결국 북주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나라가 멸망하니 호태후는 유폐 상태에서 풀려나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죠.
40살도 채 안 된 나이의 호태후는 황태후의 지위는 잃게 되었지만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며느리였던 목황후와 함께 북주의 수도인 장안에서 기방을 열었죠.
스스로도 기녀가 되어 온갖 남성들과 즐기며 돈도 버는 일석이조의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전직 황태후와 전직 황후가 몸을 파는 기녀가 되었다는 소식은 장안의 화제가 되어 그녀와 잠자리를 한번 가지기 위해 수많은 권력자와 재력가들이 줄을 섰고 기방은 엄청난 성황을 누렸습니다.
이에 호태후는 며느리 목황후에게 “기녀 노릇이 황후 노릇보다 더 재미있다.” 라고 흥분하며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훗날 수나라가 건국되고 조금 지난날에 호태후는 장안에서 병에 걸려 죽게 되었죠.
여자로서 최고의 지위였던 황태후에서 여자로서 제일 낮은 위치인 기녀로 신분이 급격히 추락했으면서도 너무나도 만족한 호태후는 중국 최고의 색녀로써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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