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귀비에게 악수를 피해 살아남은 첫번째 황자이자 궁밖에서 몰래 길러지다가 훗날 한족 최후의 명군이 된 인물 홍치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명나라 황제 성화제가 가장 총애하던 만귀비 라는 여인은 정말 무시무시한 악녀 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후궁들이 임신을 하면 유산을 하는 약을 먹였고 만약 자식을 낳더라도 기어코 그 아이의 목숨을 거두었죠
그렇다보니 성화제는 나이가 많이 들때까지 자식이 없었는데 끝끝내 만귀비의 악수를 피해 살아남은 아들이 한명 있었고 그 아들은 훗날 명나라의 마지막 성군이라 불리는 홍치제가 되는데요
오늘은 명나라 제 9대 황제이자 한족 최후의 명군이라 일컬어지는 홍치제 주우탱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기씨로 성화제가 요족의 반란을 진압하고나서 포로로 잡아와 궁녀가 된 요족 여자였죠
그렇게 궁녀로 살던 어느날 성화제의 눈에 띄게된 기씨는 황제의 승은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귀비의 입김이 워낙 쌨기 때문에 황제의 승은을 입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살았는데 문제는 몇달후부터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만귀비에게 죽임당할것이 분명했던 기씨는 공포에 사로잡혀 배에 천을 둘러매면서 임신한것을 숨기기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임신사실은 만귀비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죠
이에 만귀비는 궁녀를 보내 기씨를 몰래 지켜봤는데 그녀를 지켜보던 궁녀도 기씨가 불쌍했는지 만귀비에게 '임신한것이 아니라 배에 혹이 생기는 병에 걸린것' 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래도 안심할수 없었던 만귀비는 사람을 시켜 유산하는 약을 기씨에게 보냈는데 다행히 그 약을 배달해 온 사람도 기씨가 불쌍했는지 그 약이 무슨약인지 말해주었고 기씨는 약을 먹지 않을수 있었죠
그리고 만귀비는 그녀가 중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녀를 안락당에 옮겨가 살게 했는데요
그곳은 중병에 걸린 환관들이 살던 곳이었죠
기씨는 그곳에서 살면서 천신만고 끝에 아무도 모르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사실이 들통나면 자신의 목숨이 여러개라도 부족했을것을 알았던 기씨는 그 아이를 태감이던 장민에게 건네면서 아무도 모르게 처리를 해달라고 부탁했죠
심지어 기씨는 만귀비가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그 아이를 물에 빠트려 죽이는게 낫겠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건네받은 장민은 아이가 너무 불쌍했던 나머지 몰래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 아무도 모르게 그를 기르기 시작했죠
한편 1472년 어느날, 태자였던 주우극이 만귀비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성화제는 태자를 잃은 슬픔에 깊은 상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을 자식이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자 걱정이 태산 같았죠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날 태감 장민이 성화제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화제가 갑자기 "짐이 지금 늙었지만 아들 하나 없구나" 라며 탄식하는 것이었죠
그말을 들은 장민은 잠깐 고민하다가 성화제 앞에 엎드리며 "사실 폐하께도 자식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말을 들은 성화제는 깜짝놀라며 그게 무슨말이냐 물으니 장민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성화제에게 알려주었죠
궁 밖에서 몰래 황자를 키운건 만귀비가 황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했지만 성화제는 만귀비를 너무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죄를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기뻐하면서 그 아이를 얼른 궁으로 데려오라 명했죠
그렇게 주우탱은 1475년, 드디어 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성화제는 곧바로 주우탱을 태자로 책봉했으며 태자의 친모인 기씨는 거처를 영수궁으로 옮겨주었고 비로 책봉했습니다
그렇게 기씨도 잘 먹고 잘 사는가 했지만 불과 몇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기씨가 죽은 이후, 주우탱을 길러주었던 장민도 금덩어리를 삼킨채 죽어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죠
성화제는 이것도 만귀비의 소행인지 짐작했지만 처벌은 하지 않았고 기씨의 장례만 후하게 치뤄주었다고 합니다
만귀비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태자 주우탱을 해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요
이에 성화제의 어머니인 효숙태후 주씨는 만귀비에 의해 손자 주우탱이 또 목숨을 잃을까 염려해 그를 자신이 거주하는 인수궁으로 데려와 함께 살게 되었죠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아 온갖 권력을 휘두르던 만귀비라도 황제의 어머니이자 황실 최고의 어른인 주태후의 거처까지 들어가 주우탱을 해칠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귀비의 온 신경이 주우탱을 향해 있을때 1476년에 주우원이 태어났고 2년후엔 주우륜이 태어났으며 그로부터 1년후인 1479년에는 2명의 황자가 더 태어나면서 만귀비도 더이상 성화제의 자식들에게 손을대지 않았다고 하죠
하지만 만귀비는 죽는날까지 태자를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주우탱은 황태자가 된 이후 열심히 황제 자리를 이을 공부에 충실히 임했죠
그에게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붙어 교육을 실시했는데 그런 스승들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며 학문에 충실히 임했습니다
그러던 1487년 봄, 자신을 그렇게 죽이고 싶어하던 만귀비가 세상을 떠나고 성화제도 같은해 8월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명나라 9대 황제 홍치제로 제위에 올랐죠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대신들은 만귀비의 악행을 벌해야 한다며 상소했지만 홍치제는 아버지가 그렇게 총애하던 만귀비였으니 그녀의 모든 죄는 없던일로 하기로 하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까지 해치려 했던 그녀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족 최후의 명군 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정책을 착착 진행해 나가는데요
그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연을 하기 시작했는데 경연이란 임금과 신하가 국정을 협의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그런 모임 같은것이었죠
경연을 하면서 왕과 신하 간에 의견대립이나 다툼도 많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시대 왕들은 굉장히 하기 싫어했었습니다
다만 경연을 좋아한 왕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왕이 바로 세종과 정조이죠
그들은 뛰어난 말빨로 신하들을 조져버렸는데 심지어 정조는 신하들에게 공부좀 하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죠
어쨌든 이런 귀찮고 어려운 경연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더 이로운 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것이 바로 홍치제 였습니다
또한 아버지 성화제가 불교의 사상과 도교의 신선술 같은것에 빠져 궁에서 행하던 불교와 도교의 행사나 의식을 금지 시켰고 승려와 도사들에게 하사했던 칭호들 역시 모조리 철폐 시켜버렸죠
또한 성화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던 간신들을 처단했는데 이때 파면을 당하거나 유배를 떠난 부패한 관리가 천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도량이 넓었기때문에 간신들을 처단할때 가급적이면 잔인한 형벌을 내리지 않았죠
그는 대명률을 손봐 잔혹한 형벌 조항들을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홍치제는 상소문이나 공문서 등을 자신에게 바로 전달하게 하였으며 이 문서들을 밤늦게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직접 처리했는데요
어찌보면 당연한것이라고 볼수 있지만 당시 황제들에게 올라오는 문서들은 하루에 수백건에 달했는데 그렇다보니 과거의 황제들은 중요한 문서들만 직접 보고 처리했을뿐 대부분의 문서들은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해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환관들이 얼마든지 사실을 왜곡할수 있었으며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강력한 권력을 얻게되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홍치제가 한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그는 수많은 상소들을 일일이 보고 다음날 대신들과 회의를 거친후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백성이나 신하들의 간언은 즉시 받아들일줄 아는 현명한 명군이었죠
또한 변방이나 국경을 지키는 장수들을 엄격히 검열하고 부패하고 나약한 장수들을 파직시키기도 했으며 건주여진과 타타르족 등 여러 부족들과도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서 명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다시 명나라가 부흥하기 시작했으며 홍치제가 행한 치세를 '홍치중흥'이라고 불렀죠
그리고 그는 원말명초에 메가히트를 치던 고려양의 복식을 금지 시켰는데요
고려양이란 고려의 문화와 풍습이 원나라에 퍼져나가 명나라 초기까지 유행하던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찌보면 고려양이 원조 한류라고 말할수 있죠
고려 청자와 나전칠기, 먹, 종이 등이나 원피스 스타일이던 전통 중국식 한푸와 다른 풍성한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 투피스 스타일이의 복식 역시 고려양이었습니다
이 복식은 당시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 여성들 사이에서 대유행 했는데요
명나라 관리였던 육용이 쓴 숙원잡기에 따르면
'마미군(馬尾裙)은 조선국에서 비롯되어 수도에 유입되었고 수도 사람들이 이를 사고 입었으나, 능히 이를 짤 수 있는 직공이 있지 않았다
-중략-
성화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이를 입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대유행을 했던 것이죠
이런 고려(조선)의 복식은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대에 이를때까지 유행이 계속 되다가 홍치제 시기에 들어서야 원래 자신들의 풍습과 문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금지가 된것입니다
최근들어 중국에서 과거 원나라, 명나라 사람들이 고려양에 의해 입었던 한복을 근거로 한복이 한푸의 일종이라느니 한푸를 베꼈다느니 하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정반대인 억지 주장인것이죠
그리고 홍치제는 역대 수많은 황제들과는 다르게 후궁을 단 한명도 뽑지 않고 오직 정실황후인 효성경황후 장씨랑만 살았는데요
심지어 홍치제와 장황후는 금슬도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홍치제와 장황후 사이에는 아들이 단 한명밖에 없었다보니 대가 끊길것을 우려한 신하들이 후궁을 들이라고 몇번이나 요청을 했지만 홍치제는 끝까지 후궁을 들이는것을 거부했다고 하죠
이렇게 홍치제는 모든면에서 훌륭했지만 피로가 누적되었던 탓인지 1505년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다가 어의가 가져온 탕약을 마시고 갑자기 코피를 쏟으며 쓰러진 뒤 신하들에게 태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36세의 젊은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성군인 아버지의 뒤를 이은 황제는 바로 정덕제였고 그는 명나라 암군 F4에 이름을 올린 최악의 암군 중 한명이 되었죠
여담으로 홍치제의 유일한 사랑인 효성경황후 장씨는 남편인 홍치제가 죽고나서부터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데요
유일한 아들인 정덕제가 황제가 되고나서 색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요상한 짓을 하는 꼴을 두고만 봐야했고 결국 아들인 정덕제가 물놀이를 즐기다 물에 빠진 후 시름시름 앓다가 31살의 나이로 죽어버리는 모습도 봐야했던 것이죠
그렇게 홍치제의 명맥은 끊어지고 말았고 이후 황제 자리에 오른 가정제 대에 이르러서는 '대례의 의' 사건으로 인해 가정제와 잦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장황후의 가족과 친척들이 역모에 휘말리면서 그녀는 동생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낡은 옷을 걸친채 가정제 앞에서 무릎꿇고 빌었지만 결국 장황후를 제외한 가족 대부분이 처형 당해 버렸죠
이후 그녀는 외진곳에 있는 별궁에서 혼자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최고의 명군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그녀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 불쌍하고 슬프죠
지금까지 명나라 부흥을 이끌었던 한족 마지막 명군 홍치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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