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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황희. 청백리의 대명사이자 명재상으로 불리던 그의 비리 투성이 사생활

by 사탐과탐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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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의 대명사이자 명재상으로 불리던 황희 정승의 비리 투성이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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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최고의 관직은 당연히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 입니다

그리고 좌의정, 우의정까지를 삼정승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 정승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 한명 있는데요

그는 바로 청백리의 대명사 '황희' 정승입니다

 

그는 청렴하고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청백리로 대표되는 조선최고의 정승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까놓고 보면 청렴결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죠

황희는 정도전과 같이 고려말, 조선초 신하였습니다

나중에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르는 그이지만 정치적으로 라인을 잘 타지는 못했는데요

 

황희는 고려 공민왕때인 1363년, 개성에서 태어났죠

그리고 그의 나이가 30세가 된 해에 나라가 뒤집혀 버렸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며 조선의 건국을 결사 반대했는데요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고 결국에는 성균관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그리고 세자이던 이방석의 보좌관이 되어 그를 보필하게 되었는데 결국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자신이 보필하던 세자 이방석은 이복형이던 이방원에게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조선 개국을 반대했던 이유로 관직 생활도 순탄하지는 못했는데, 세자였던 이방석 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것이죠

그러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고나서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황희는 또 결사 반대 하며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이것마저도 황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후 나중에 세종으로 즉위하게 되죠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유배를 가기도 했는데요

결론은 그가 충성하던 고려는 망했고 자신이 보필하던 이방석과 양녕대군도 죽거나 폐위 당하고 만것이죠

 

하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세종은 얼마 지나지않아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나중엔 영의정에 올랐고 오랜시간 그 자리에서 세종을 도와 말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일하다가 1452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태종과 세종 두 임금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만큼 여러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며 정승의 대명사가 될정도로 엄청난 명성을 떨쳤습니다

 

또한 청렴한 인품 덕분에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황희는 현재까지도 청백리로 대표되는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 불리고 있죠

그런데 그는 위인전에 나오는것처럼 청렴 결백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황희는 24년동안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탄핵을 받은 인물이었던 것이죠

 

그만큼 그는 많은 비리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중 하나는 뇌물수수와 매관매직이었죠

주로 청탁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는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과 친한사람을 천거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다고 하죠

 

세종 10년 6월, 황희가 대사헌의 직책에 있을 때 어떤 승려에게 금을 뇌물로 받았는데 그 이후 사람들은 그를 황금대사헌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세종 12년에는 말 1000마리를 관리를 잘못해 죽게 만든 태석균이라는 인물의 처벌을 좀 약하게 해달라고 형조에 협박같은 부탁을 한적도 있죠

그리고 한 지방 수령의 아들이 조정의 벼슬자리를 부탁한적이 있는데요

그 대가로 황희는 땅을 받게 되었죠

 

그러나 결국 그가 땅을받고 벼슬자리를 판걸 알아낸 사헌부에서는 황희를 맹렬히 탄핵했습니다

이에 결국 황희는 잠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그를 몹시도 신뢰하고 있던 세종이 얼마안가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고 하죠

세종실록에는 황희에 대해서 "그가 정무를 담당한 여러해 동안 매관매직을 하고 형옥을 팔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여기서 형옥을 팔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사건 당사자에게 뇌물을 받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미 이죠

당시 워낙 높은자리에 있었으니 그의 한마디에 형조가 어쩔줄 몰라 했을것 같긴 합니다

그 외에도 황희의 사위였던 서달이 신창현의 고을 아전을 때려 죽인일도 있었는데요

그는 우의정이던 맹사성을 통해 신창현의 수령에게 이 사건을 무마해달라고 청탁했고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조용히 이 사건이 묻힐뻔했지만 결국 이사건에 대해 알게된 사헌부에서는 이 사건을 캐내게 되었죠

 

그렇게 모든 사실을 알게된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에 대해 모든걸 기록한 상소를 올렸고 결국 그는 또다시 파직되었습니다

워낙 그를 예뻐했던 세종은 황희를 파직시키고 1년도 안되었을 때 다시 그를 고용해 일을 시켰죠

 

어쨌든 이러한 일들 때문에 그는 사적인 인연을 기회로 공공연하게 청탁을 한다며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 일쑤였습니다

또 다른 의혹도 있는데 아버지와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비가 얼마 되지 않았던 반면 훗날 황희가 거느린 노비의 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재산 축적에 대한 의혹을 받기 시작한 것이죠

 

황희는 수십년 동안 오랜기간 관직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노비의 수는 많았지만 당시 그가 받은 녹봉에 비해서는 비정상적으로 너무 많았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의 아들들 역시 문제가 많았는데요

황중생은 세자궁의 물건을 훔치다 발각 되기도 했고 이 사건을 조사하던 와중에 황보신도 재물을 착복한것이 드러나 함께 처벌을 받았죠

 

그런데 더 어처구니 없는점은 황보신의 땅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그의 기름진 땅이 아까웠던 형 황치신이 자신의 땅과 바꿔치기를 하다 걸려 파면되기도 했던점입니다

또한 세조때 영의정까지 올랐던 황희의 막내아들 황수신은 세조 실록에 "뇌물이 폭주했으며 한 이랑의 밭이나 한사람의 노복까지도 탐하고 다투어서 여러번 탄핵을 받았다" 라고 기록되어있기도 하죠

 

본인뿐만아니라 자식들까지 그렇게 많은 욕심을 부렸지만 어떻게 그는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받으며 오랜시간동안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이자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길수 있었을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일화가 있는데요

 

그가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노비의 자식이 종이 위에 오줌을 쌌지만 화내지 않고 오줌을 닦았다거나 노비의 어린 자식들이 황희의 방에 들어와 수염을 잡아당기거나 때리기도 하고 술상위에 안주를 집어 먹고 했지만 황희는 "아프다 아파" 라고 말할뿐 아이들을 혼내지 않았다고 하죠

또한 어느날 세종이 평상복 차림으로 황희의 집에 방문을 했는데 집에 멍석을 깔아놓고 살고 먹을거라곤 보리밥에 된장과 고추밖에 없는 청빈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고 감동해 새집을 하사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고 백성들 사이에서만 구전되던 이야기라고 하죠

세종이 승하하고 실록을 편찬할때 사관들 사이에서는 황희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동안 황희가 무서워서 아무말 못하던 사관들이 그의 비행을 폭로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청렴결백하다던 황희가 그랬었다는걸 믿지 못하는 사관들도 많았지만 결국엔 세종실록에 황희의 비리와 부정부패들이 모조리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실록은 아무나 함부로 손댈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 황희의 부정부패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게 백성들에게서만 구전되던 내용만 퍼지게 되었고 황희를 청백리의 대명사이자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또 다른 의문점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이렇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관리인 황희를 태종과 세종은 왜 그렇게 총애했던 것인가 하는점이죠

그 이유는 그의 그런 지저분한 점을 상쇄하고도 남을정도로 황희의 능력이 탁월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일만 잘하면 도덕적 문제가 많더라도 심각한 경우만 아니면 왠만해선 그냥 넘어갔던 것이죠

그리고 황희는 태종과 세종의 참모로써의 역할을 잘 해내기도 했습니다

문종실록의 <황희 졸기>에 의하면 황희는 태종, 세종과 기밀사항에 대해 의논을 많이 했지만 입이 무거워 함부로 어디가서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죠

 

태종은 어느날 황희와 국가기밀에 대해 의논한 뒤 "이 일은 경과 나만 아는 일이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가 한 일일 것이오" 라고 말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킬방원이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그의 입이 무거워 질만 하기도 했던것 같죠

어쨌든 기밀사항 외에도 황희와 둘이서 나눴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온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종은 그를 굉장히 신뢰했다고 합니다

 

또한 황희는 왕의 의지를 튼튼히 지지해 주되 왕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죠

사실 태종이 그동안 왕권을 위협하는 사람들은 비록 처남들이라 할지라도 무참하게 살해했던 걸 보면 다른 누구라도 감히 왕권을 위협할것 같지는 않은데요

어쨌든 당시 황희는 태종의 밀지를 받아 민무구, 민무질을 사형으로 몰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죠

 

태종의 비밀은 지켜주되 좋은일이든 나쁜일이든 시킨일은 완벽하게 해낸 황희가 이방원은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세종시대에 들어서는 세종을 열심히 서포트하며 여러 정책들을 성공시켜 나가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기도 했고 세종의 왕권에도 전혀 위협을 하지 않은채 가려운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역할을 해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당시엔 조선이 건국되고나서 한동안 불안정한 시대였기 때문에 정도전과 한명회 같이 모든걸 새로 뒤엎어버리려는 역모의 마음을 가진 그런 신하 보다는 황희처럼 왕이 하려는 일을 굳건히 뒷받침 해주고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자신의 뜻을 실현시켜줄 참모가 더 필요했기 때문에 왕권 안정화가 가장 중요한 과제 였던 태종과 세종에게는 그의 부족한 도덕심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얻어 굉장히 오랜기간동안 정승으로 지낸것 아닌가 싶죠

여담으로 황희가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당시 사관이던 이호문이 황희에 대해 악의적으로 비난한 내용의 기록이 많았기 때문에 이 내용들을 검토하던 정인지나 성삼문 등도 이호문이 쓴 사초들을 근거도 없이 써놓은것이라 결론 지었다고 하죠

이에 최항과 정창손은 "이호문의 기록들을 삭제 해도 무방하겠지만 실록을 고의로 고친 선례를 만들어 놓으면 훗날 그 폐단을 막기 어려울것이니 고칠수 없다" 라고하여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희가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터무니 없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죠

황희는 도덕적으로 많이 아쉬운 점이 많지만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그냥 넘어갈수도 있었던 일이었나 봅니다

아무튼 황희가 정승의 대명사는 될순 있어도 청렴결백한 청백리의 대명사는 되지 못할것 같네요

 

알려진 것과는 달랐던 황희의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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