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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김조순. 조선이 망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세도정치의 시작을 연 인물

by 사탐과탐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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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세도정치의 시작을 연 인물 김조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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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8월 18일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정조가 등용했던 남인세력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고 소론 세력 역시 노론 벽파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지낼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노론 벽파는 모든 정국을 쥐고 흔들며 온 조정은 벽파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안가 정순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고 벽파는 몰락하게 되면서 노론 시파였던 김조순이 정권을 잡게 되었죠

오늘은 조선이 막장으로 치닫는 계기가 된 세도정치의 문을 활짝 연 인물 김조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김조순은 1765년 8월, 안동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고조부가 영의정이자 노론 4대신 중 1명인 김창집이었고 더위로 올라가면 노론의 초대 영수인 김수항,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인 김상헌의 후손이었죠

그야말로 노론 계열의 엄청난 다이아몬드 수저 집안에서 태어난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20살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과 규장각 대교를 지냈는데요

 

규장각 대교를 지낼때 노론 벽파와 시파가 정치 경쟁을 벌이자 중립을 지키며 이런 당쟁을 없앨것을 정조에게 주장하고 나섰는데 이 모습을 본 정조는 그를 마음에 들어했고 총애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조순은 평소 소설을 굉장히 좋아해 직접 '오대검협전' 이라는 무협소설을 쓴적도 있죠

또한 예문관에서 숙직할때 연애소설을 보다가 정조에게 걸린적이 있는데 이때 정조는 그에게 반성문을 써오라고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자기 변명 하기 바빴던 여느 반성문과는 달리 그는 잘못한것은 확실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며 기가 막히게 반성문을 잘썼고 그걸 본 정조가 극찬했다고 하죠

정조가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정조의 건강이 나날이 악화되자 왕세자 책봉을 하면서 동시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기위해 간택까지 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다는걸 느낀건지 정조는 간택을 폐하고 중매를 통해 얼른 김조순의 딸과 순조를 혼인 시키려고까지 했죠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할수 없었고 결국 간택하게 되었는데 초간택과 재간택까지 했지만 삼간택을 하지못한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정조가 죽기 전에는 어린 순조를 잘 보필해 달라는 유지를 받기도 했을 정도로 정조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죠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김조순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세자빈 간택도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 였기 때문에 김조순의 지위도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노론 벽파들이 모든 권력을 손에 쥐게 된것이었습니다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수 없었던 정순왕후는 그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비변사 제조도 겸임 시켰지만 김조순은 얼마안가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공격을 당하게 되죠

 

1801년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엄금 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기회로 삼아 노론 시파와 소론, 남인까지 벽파를 제외한 여러 인사들 역시 공격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김조순의 친족인 천주교 신자 김건순이 체포 된후 처형되었고 김조순과 친하게 지내던 김려라는 인물도 체포되고 말았으며 정약용 등의 남인들과 소론, 그리고 시파까지 개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살떨리는 상황이 계속되던 가운데 정순왕후는 그를 이조판서에 까지 올리는데요

김조순은 병환을 핑계삼아 사직서를 내버렸습니다

거기다가 노론 벽파의 사람이던 권유가 삼간택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조순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하게 하려고까지 했지만 정조의 유지를 뒤집을수 없다며 정순왕후는 권유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해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었고 김조순은 국구가 되어 영안부원군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훈련대장이나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에도 제수되었지만 계속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관직에 나아가려 하질 않았고 나름대로 처신을 잘해 벽파로 부터 큰 견제를 받지 않았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순조가 15세의 나이가 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순조가 친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만해도 정순왕후는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지 않아도 벽파가 정국을 주도 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산이었고 김조순 어린 순조를 대신해 섭정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파의 인물들이 속속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한 것이죠

김조순은 섭정을 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쳐내기 시작했는데요

벽파를 쳐내는 신호탄으로 삼은것은 자신의 딸과 순조의 국혼을 방해한 권유를 처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권유는 체포되었고 같은 노론 벽파인 이안묵과 벽파의 유생이던 정재민 또한 붙잡혀와 처형당하고 말았죠

그러자 아차싶었던 정순왕후가 다시 정사에 관여하기위해 수렴청정을 하려했는데 시파의 대신이던 이시수가 따지자 어쩔수없이 정순왕후도 물러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자신의 신변에도 위협을 느꼈는지 자신은 국혼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해명을 하고 얼마안가 1805년 세상을 떠나버렸죠

 

노론 벽파의 중심이라고 할수있던 심환지도 1802년에 세상을 떠났고 정순왕후까지 죽어버리자 초조해진 우의정이자 벽파였던 김달순은 순조에게 사도세자의 허물을 강력하게 인지하게 함으로써 벽파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박치원과 윤재겸을 추숭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 자신의 목을 옥죄는 자충수가 되었으니 순조는 그의 주장에 반대를 했고 조득영과 신헌조 등은 정조가 살아있을때는 한마디도 안하고 있더니 이제서야 왠말이냐며 사도세자를 모함하는것은 선왕인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결국 김달순도 탄핵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이 발언으로 인해 김관주 등 벽파의 지도부가 제거 되고 말았죠

거기다가 김달순이 이렇게 높은 위치에 있게 된것은 심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심환지와 정일환 등도 처벌해야 한다고 하자 결국 이미 세상을 떠난 그들의 관작도 추탈되었고 김귀주와 김종수는 역적으로 낙인찍혀 벽파는 역당의 무리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정순왕후의 친정 가문인 경주 김씨가 대규모로 숙청되었고 노론 벽파는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죠

 

이후 조정의 빈 자리는 노론 시파 계열 인물들과 일부 소론의 인물들을 대거 발탁해 채워나갔고 그렇게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노론 벽파를 숙청할때도 모든일은 측근들이 대신 수행하면서 그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는데요

김조순은 벽파를 몰아내고 당시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가장 높은 벼슬이라 할수 있는 정승의 반열에는 오르지 않았죠

 

대신 그는 부제학이나 병조판서, 이조판서, 훈련대장과 같은 하나같이 실세 중에 실세 자리들인 핵심 요직들을 꿰찼으며 당시에 배의 현황이나 이동 등을 관리 감독하면서 배를 통해 이루어지던 상업, 상권 등을 장악할수 있던 주교사 당상직과 당시 대동법으로 거두어 들인 대동미의 출납을 담당하는 재정 부서였던 선혜청 제조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모든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그는 죽는날까지 유지하던 직위가 바로 비변사 제조였는데 당시 국정 전반을 운영하던 핵심 정치기구는 의정부가 아닌 비변사 이기도 했고 제조는 명목상으로는 비변사의 2인자 자리였지만 실권은 도제조 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핵심 요직은 그가 대부분 차지했던 것이죠

그렇게 그는 눈에 띄는 최고로 높은자리올라 모든일에 앞장섰다기 보다는 한발짝만 물러선뒤 뒤에서 국정을 장악한채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정도로 권력을 쥐게 된 인물들은 대체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정권을 마구 휘두르며 매관매직 등을 통해 부정축재를 하기 마련인데 의외로 당시 김조순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좋았죠

김조순 개인적인 품성은 나무랄데가 없었던 것인데요

 

김조순에게는 부정부패나 부정축재 등의 기록이 전혀없고 오히려 왕이 높은 관직을 제수하거나 상을 내릴때도 극구 사양하면서 받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과거 제도 또한 개판이었기 때문에 그로인해 출사길이 막힌 젊은 유생들과 학자들을 등용하기도 하고 1827년엔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가 그곳의 열악한 백성들의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해 환곡과 대동미의 폐단을 정리하게 했다고 하죠

 

그래서 그는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 정도의 언급만 나올뿐 간신이었다라는 평은 없으며 당시에도 좋은 평가를 받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당시 최고의 권력가는 김조순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 청양부부인 심씨가 사망했을때 순조는 아들인 효명세자를 보내 조문하게 했지만 김조순이 극구 사양해 조문은 하지 못했다고 하죠

 

이후 그는 1832년 4월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고나서 세도정치는 전성기를 맞게 되어 소수의 인물들이 정권과 권력을 독식해버리기 시작했고 점점 조선도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죠

세도정치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 라고는 할수는 없겠지만 엄청난 영향은 끼친게 맞으니 이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도 부정적인 평가는 피해갈수 없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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