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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임화수. 이승만의 개로 살면서 대한민국 연예계의 어두운면을 만든 장본인

by 사탐과탐 2023.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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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수는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나라를 팔아먹었을거 같은데요
이승만의 개가 되길 자처하고 이정재의 오른팔이었지만 혼자 살기 위해 배신했으며 온갖 더러운 짓을 모조리 했었던 임화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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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유지광, 이석재 등과 함께 이정재의 대표적인 부하로 알려졌지만 나중에는 혼자 살려고 두목 이정재를 팔아먹은 간신배 부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양아치 끝판왕급 인간인데요

독특한 점은 이 사람이 한국 영화계를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하죠

오늘은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 이자 정치깡패 겸 영화제작자 임화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1921년 1월 10일 여주시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지 얼마안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임화수의 이름은 원래 권중각이었지만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새아버지 성인 임씨를 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이름도 화수로 바꿔 이름이 임화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소매치기와 강도짓을 일삼았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죄목으로 감방을 들락날락거렸죠

하지만 임화수는 어릴적부터 영화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출옥 후 극장에서 매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요

 

광복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평화극장이 적산 자본으로 나오자 임화수가 정말 말도안되는 적은 금액으로 인수할 수 있었고 동시에 영화사까지 만들어 그는 영화계와 연예계를 주름잡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강한 세력을 과시하던 깡패 이정재의 밑으로 들어가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의 넘버투가 되어 강력한 힘까지 얻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 책임자이던 곽영주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치권력도 얻기 위해 곽영주 뿐만아니라 여러 정관계 인물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뿌리기 시작했죠

그러던 어느날 곽영주의 주선으로 대통령이던 이승만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승만을 만나자마자 갑자기 큰절을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각하, 아버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라고 하며 펑펑 울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감동받은 이승만이 임화수를 아들이라 부르며 그를 다독여 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의 마수가 대통령에게까지 뻗어있다 보니 그는 훗날 문교부 장관(현 문화체육관광부)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실제로 자유당 말기 쯤에는 임화수가 문교부 장관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가 신문에까지 나올정도였다고 하죠

하마터면 초등학교를 중퇴한 정치깡패가 대한민국의 문화와 교육, 그 외에 여러 가지를 담당하는 장관까지 될뻔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정치권력까지 손에 쥐게 된 그는 1955년에 한국연예 주식회사를 세운 뒤부터 당시 영화, 연예계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는데요

임화수는 국내 최초로 홍콩과 합작해 <천지유정> 이라는 영화를 제작했고 이후로도 계속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계의 거물로 우뚝 서게 되었죠

 

그가 만든 영화 중 대표적인 영화는 1959년에 만들어진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이라는 영화인데 이 영화는 제작할 당시 자유당에게 엄청난 돈을 받았고 감독에는 신상옥이 맡았으며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찬양하는 내용의 영화라고 합니다

또한 <이국정원> 이라는 컬러 영화를 만들기도 하면서 신상옥의 <성춘향>과 홍성기의 <춘향전>과 함께 한국의 본격적인 컬러 영화 시대를 열기도 했죠

 

그 외에도 1960년 <물망초> 라는 영화까지 약 20편에 달하는 영화를 제작 하면서 한국 영화계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그는 깡패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포악한 기질을 숨길수 없었고 마음에 안드는 점이 있기라도 하면 남자 연예인과 배우들을 구타하기도 했죠

심지어 훗날 재판 기록에 의하면 그들에게 담배불로 지지는 일명 담배빵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최악의 인간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임화수는 자유당과 더욱 가깝게 지내기 위해 1959년 3월에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했는데 이 단체는 반공예술을 빙자해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고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죠

이들은 자유당과 경찰의 옹호를 받아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는데 이 단체의 단장이 임화수 이다보니 영화나 연예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임화수는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로 치부해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에 꼼짝하지 못했죠

그러던 1958년, 자유당 감찰부장 등을 맡고 있던 이정재가 이기붕과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 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결국 자신이 맡고 있던 여러 직을 내려놓고 동대문 상인연합회 회장에서도 은퇴하게 되었는데 이때 임화수는 이정재의 후임 회장이 되면서 명실상부 동대문파의 1인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한 반공 청년단에 가입해 종로지역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유지광 등 수많은 부하들에게 자유당 정권 반대를 외치는 야당 정치인들을 향한 정치테러를 지시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죠

이 반공예술인단에서는 연예인들을 동원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도록 선전하기도 했으며 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역시 연예인들을 자유당 선거 운동에 이용했는데 이때 불참했다는 이유로 당시 최고의 희극배우인 김희갑에게 무지막지한 폭행을 가해 늑골이 부러지는 등 전치 4주라는 큰 부상을 입히기까지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김희갑 구타사건으로 인해 기자들이 엄청난 기사를 쏟아내면서 그는 유명해지기 시작했죠

그는 결국 구속되긴 했지만 권력의 비호 아래 고작 3만환의 벌금을 선고 받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그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는데요

 

그는 더 강한 권력을 얻고 권력가들과 친분을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미모의 여배우들과 가수들 등 여자 연예인들에게 성 상납을 강요하는 파렴치한 일을 벌이기도 했죠

영화배우인 김지미는 과거에 여자 배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임화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를 '미친개 같은 사람' 이라고 말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근처를 지나던 임화수가 듣게 되었고 그녀를 엄청 째려보면서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김지미는 이제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며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하죠

며칠 후 김지미는 임화수가 보낸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자신은 미친개 같은 깡패는 맞지만 여자를 때리지는 않는다'며 '혹시 자신 때문에 여배우들이 무서웠다면 사과하겠다' 라고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60년 4월 18일, 최고로 잘나가던 그에게 최후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3천여 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시가지를 행진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데모를 한 뒤 오후 4시쯤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에 종로 4가에 있던 천일 백화점 앞에서 임화수의 지시를 받은 반공청년단 소속 화랑동지회 깡패들에게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것이죠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은 다음날인 4월 19일에 신문에 실려 전국 각지로 퍼졌고 대학생들은 21일날 예정돼있던 시위를 19일로 앞당겼습니다

그렇게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났고 이 사건이 바로 4.19혁명 이죠

 

그렇게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결국 파멸을 맞고 말았고 이들의 권력 아래에서 하수인 노릇을 하던 임화수 역시 정치테러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게 되었습니다

이 혁명재판에서 임화수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것과 여러 정치테러 그리고 고대생 습격사건은 모두 이정재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고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으며 자신은 영화인인데 왜 여기 잡혀 있는지 모르겠다고 발뺌을 하면서 재판 내내 울먹거리는 등 온갖 추잡한 짓을 해댄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임화수가 갑자기 폭로한 화랑동지회 사건으로 인해 이정재는 범죄단체의 조직 등의 혐의가 추가되었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임화수가 제공한 셈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임화수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책임을 이정재와 유지광 등에게 떠넘기며 어떻게 해서든 발을 빼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죠

 

그러자 이를 듣고 있던 유지광이 분노해 포승줄에 묶인 채로 임화수에게 달려들었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만류로 겨우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국 임화수도 이정재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선고 받았고 사형 집행 당일에 사형장에 끌려오면서도 살려달라며 몸부림 치다가 곽영주와 함께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죠

 

한편 임화수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는 그가 사형을 면하려면 여러군데에 뇌물을 써야 한다고 임화수의 가족들에게 막대한 돈을 뜯어 냈으며 심지어 사형집행 전날에도 돈을 뜯어갔고 임화수의 사형이 집행되자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고 하죠

그는 많은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사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나이 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던 효자이기도 했지만 워낙 포악하고 온갖 추잡한 짓들을 다했던 인간이니 만큼 인간쓰레기, 개망나니 정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50~60년대에는 참혹한 전쟁에 온갖 더러운 비리에 나라 마저 너무나도 혼란해 정말 살기 힘들었을 것 같네요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를 자처한 대한민국의 정치깡패 겸 영화 제작자 임화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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