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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더럽지만 재미있는 조선시대 똥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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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하늘에 똥벼락 2탄!
위생관념이 전혀 없던 조선시대 똥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마른하늘에 똥벼락 2탄 한반도의 똥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예전에 유럽의 화장실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요.

 

옛날 동양에서는 화장실이 존재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변을 모아서 밭에 비료로 쓰기 위해서였고 2천 년 전의 중국 한나라에서는 돼지 변소를 만들어 변을 돼지 먹이로 사용하기도 했죠.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 똥돼지는 유명하기도 한데요.

또한 백성들이 사용한 '통시'라고 불리는 짚이나 나무를 엮어 만든 화장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일을 보고 난 후 뒤처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왕이나 양반들은 주로 무명 천이나 비단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종이가 너무나도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천을 사용한 뒤 씻어서 또 사용했다고 하죠.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가난한 백성들의 뒤처리 방법은 더 기가 막힙니다.

백성들은 용변을 보고 난 후 먼저 돌멩이로 대충 닦고 나서 새끼줄이나 볏짚을 사용해 마무리했죠.

 

그나마 이건 괜찮은 방법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새끼줄 하나로 몇 번이고 문질러 대는 경우도 허다했죠.

훗날 18세기에 호박이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큰 호박잎을 뒤처리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나무나 긴 나무로 만든 '측목'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1950년대까지만 해도 볏짚이나 나뭇잎, ​ 머우잎, 옥수수 수염 등을 사용했죠.

 

변을 비료로 사용하는 시비법은 중국에서 유래했는데요.

시비법으로 인해 농산물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하긴 했지만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생충에 쉽게 감염되는 것이었는데요.

기생충 알은 인간들의 인분으로 배출된 뒤에 채소 등의 농산물에 달라붙어 다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감염되었던 것이죠.

실제로 경복궁의 담장이나 광화문 광장, 종묘 광장 등 조선시대의 지층을 분석해 본 결과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 알들이 발견되기도 했었습니다.

 

(시비법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선시대 지방 시골의 변 처리 방식은 이렇게 비료로 써서 그나마 처리가 가능하긴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한양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한양의 거리에는 똥투성이가 되기 시작하며 처리 방법에 골머리를 썩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도성 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하고 있었으니 변을 모아서 비료로 사용하기도 힘들어서 백성들은 마당에 변을 늘어놓고 말린 뒤 인근 밭에 팔기도 했죠.

 

어떤 이들은 강이나 하천에다가 냅다 버려버리는 일도 수두룩했는데 이를 본 박제가는

도성의 물맛이 짠 이유는 함부로 내다 버리는 똥오줌 때문이다.
다리 밑을 보면 인분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어서 장마나 큰비가 오지 않으면 씻겨 내려가지도 않는다.

 

라고 말하기도 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천이나 강에는 똥이 둥둥 떠다녔고 장마철에 물이 범람 하기라도 하면 똥오줌 섞인 오수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가를 덮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거리에는 똥으로 가득했으며 청계천에는 돌로 쌓은 둑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기도 했죠.

 

이렇다 보니 한양의 수질 또한 심각한 수준으로 더러웠는데 영국인 비숍의 말에 의하면

도랑에는 초록색 끈적끈적한 오물이 고여있고 냄새가 지독했다.
이는 집집마다 버리는 분뇨들 때문이었다.

 

라고 이야기했죠.

또한 미국인 언더우드는

조선의 좁은 하수에는 오물로 가득 차서 도로로 흘러넘쳤고 그런데 조선 여인들은 그런 오물에 야채를 씻어 먹었다.

 

라고 말했으며 선교사인 알렌은

서울은 어딜 가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다.
대신들의 담장 옆에는 하수로가 나 있는데 이곳에는 씻고 버린 채소들과 쓰레기들이 쌓여있어 악취가 엄청났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오물들은 억수 같은 장대비가 와야 겨우 씻겨 내려갔죠.

심지어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던 자수궁과 같이 지대가 낮은 궁에는 비가 온 뒤엔 똥오줌 섞인 오물이 고여버려 고민이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시비법이 들어오기 전인 고려시대 이전에는 배설물을 모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요강을 사용했죠.

당연히 조선시대에도 요강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었는데요.

대소변을 보고 난 후 그 오물이 어디로 갔을까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바로 하천이나 길거리였습니다.

덕분에 한양의 거리는 똥오줌이 온천지에 널려있었고 그만큼 악취도 굉장히 심했습니다.

조선 후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남긴 조선 기행문에는 거리 곳곳에 있는 오물들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었는데요.

 

영국인 여행가 새비지 랜도는

조선에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려 오물이 씻겨 내려가고 겨울에는 얼어붙어서 괜찮았지만 봄이나 가을에는 거리의 오물들이 풍기는 냄새가 너무 심해 내 코가 없어졌으면 했다.

 

라고 이야기했을 정도였고 어느 독일인은

이런 더러운 도시에서 역병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겨울의 혹한과 여름의 장마 덕분에 오물들을 그나마 없애주기 덕분이고 그리고 남는 오물들은 거리의 개들이 싹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개들은 거리의 청소부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요.

곳곳에 있는 똥들을 개들이 먹어치웠고 아이들이 용변을 보고 나면 개가 뒤를 핥아서 처리해 주곤 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조선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길에 가득한 똥오줌들이었다" 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야말로 조선의 길거리는 더러움 그 자체였죠.

그러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 정부는 한양 거리를 깨끗이 만드는 데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길에 공중 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고종은 쓸데없이 돈 쓴다며 그냥 앞으로 길에 똥 싸지 못하게 하라라는 명령만 내렸을 뿐이었죠.

하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1904년 6월에 위생청결법이 만들어지면서 공중변소가 만들어졌는데

당시 경찰들에게

'집집마다 매일 쓰레기를 청소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한다'

'공중변소를 만들 것이니 앞으로 길에 똥오줌 싸는 것을 금한다'

'물이 더러우면 병이 생기니 앞으로 우물을 깨끗이 사용한다'

등의 위생업무도 맡겼죠.

 

그리고 집집마다 화장실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집마다 쌓여있는 분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는 것이었죠.

이에 일본인은 위생 회사를 만들어 집집마다 매달 위생비를 걷기 시작했고 위생비를 낸 집에서만 화장실의 똥오줌을 수거해갔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일제에 의해 거름 판매를 금지 당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마당에 똥을 널어놓고 말린 뒤 판매할 수도 없었죠.

그렇다고 길거리에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위생청결법 때문에 길에 싸다 걸리거나 버리다 걸리면 큰 곤욕을 맞봐야 했기 때문이죠.

그렇다 보니 위생 회사의 주인인 일본인은 수거비도 받고 수거해간 분뇨를 다시 농촌에 판매를 해서 많은 이익을 챙겼습니다.

 

1908년 10월 대한매일신보에는

몇 백만 명의 한국인의 똥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서 몇 천만 석의 거름의 이익이 일본인 입에 몽땅 들어갔다!
아! 똥구멍이 원수로다.

 

라는 논설이 실리기도 했죠.

 

그 이후로도 길거리에 똥오줌을 싸는 일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화장실을 사용하는 생활이 점점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금과 같이 화장실도 깨끗하고 거리도 깨끗한 시대에 태어난게 정말 행운인 거 같긴 하네요.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똥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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