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전란에 초반에 나왔던 의병장 정여립은 진짜 역적인가 아니면 선조에 의한 희생자일 뿐인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있었던 정여립의 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여립의 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589년 10월, 정여립을 고발하는 한 통의 고변장이 조선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놨죠
과연 정여립은 진짜 역적이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의 계략에 희생된 것일까요?
먼저 정여립이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죠
정여립은 1546년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관은 동래였고, 자는 인백, 호는 죽도라고 불렸죠
전주시에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정여립로'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정여립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하죠
실록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어린 정여립이 새를 잡아 죽인 것을 여종이 일러바쳤다가
앙심을 품은 정여립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후대에 정여립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죠
실제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정여립이 총명하고 박학다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정여립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그는 1570년, 그의 나이 24세 때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수찬의 벼슬에까지 올랐죠
말재주도 뛰어나서 그가 입을 열면 탄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틀린 말을 해도 아무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언변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다만 그는 주변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방약무인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어전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또한 과장된 이야기일 수는 있죠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그가 꽤나 대담하고 소신 있는 성격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정여립은 처음에 율곡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서인 계열이었죠
당시 그는 이이를 매우 존경했다고 합니다
'공자는 푹 익은 감이고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다
반쯤 익은 것이 다 익게 되지 않겠는가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죠
하지만 스승인 이이가 죽은 후 정여립은 동인으로 전향해 서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용납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이가 모친 신사임당의 죽음에 충격받아 잠시 불가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데,
정여립이 이 사실을 발설해서 유학자 이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고 하네요
그는 파격적인 사상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오"라는 말을 했죠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발언이었죠
또한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상들은 후대에 그를 체제에 반항하는 인물로 낙인찍는 근거가 되었죠
한편으로는 이런 진보적인 사상 때문에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한반도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의 죽도에 서실을 차렸습니다
여기서 그는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었죠
대동계라는 이름은 유학의 이상 사회인 '대동 사회'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대동계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 모임이었습니다
양반과 상민, 노비 모두가 계원이 될 수 있었죠
이는 당시 사회 통념을 깨는 파격적인 조직 구성이었습니다
정여립의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 솜씨에 매료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죠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의 명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대동계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활쏘기 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취미 활동만은 아니었는데요
당시 활쏘기는 군사 훈련의 성격도 띠고 있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대동계는 실제로 관군 못지않은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1587년,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왜구를 격파하는 공을 세웁니다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죠
이를 볼 때 대동계는 상당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일로 정여립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그를 추종하는 무리도 늘어났죠
그러던 1589년 10월 2일,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 군수 이축, 재령군 군수 박충간 등이
정여립의 반란 계획을 고발한 것입니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오려 한다는 내용이었죠
또한 병조판서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려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놀란 선조는 즉시 정여립을 체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정여립은 이미 도주한 뒤였죠
그는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쳤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정여립은 도주하다가 관군의 추격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함께 도망가던 동료들을 해치고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하죠
하지만 정여립이 죽고 난 이후에도 그의 난을 둘러싼 의혹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정여립이 도망간 곳이 죽도라는 점이 이상합니다
죽도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동계의 근거지인데
굳이 그곳으로 도망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죠
만약 정말 모반을 꾀했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또한 황해도 관찰사가 전라도의 일을 고발했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당시 행정 구역상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인데, 그가 어떻게 이런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조선에서는 모반 사건에 대해 암행어사나 승지 등을 파견해 면밀히 조사한 후
죄인을 한양으로 압송해서 국문을 통해 역모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그런 과정 없이 바로 군대가 출동했다는 점도 이상하죠
더구나 정여립의 집에서는 수많은 문서와 편지들이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정말 모반을 꾀했다면 이런 증거들을 남겨두었을까요?
보통 역모를 꾀하는 사람이라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문서들을 모두 불태웠을 텐데 말이죠
정여립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도 수상한 점이 많습니다
그가 정말 대규모 반란을 준비했다면, 왜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싸우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동인 측 기록에 따르면,
정여립이 죽도에서 잔치를 벌이다 관군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의문점들 때문에 정여립의 난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죠
일부에서는 서인 세력이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정철과 송익필이 사건의 배후라는 주장이 있죠
송익필은 당시 노비로 신분이 강등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사건을 꾸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김장생의 '송강행록'에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주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기록이 있죠
또 다른 의견으로는 선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여립을 이용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동인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선조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죠
실제로 선조는 이 사건 이후 동인의 주요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특히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 등을
왕의 권력을 위협한다는 명목으로 제거했죠
하지만 정여립이 실제로 반란을 꾀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여립의 형제와 사위가 그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겼다는 증언이 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들도 그가 반역을 꾸민다고 생각해 도망쳤다고 하죠
또한 동인의 영수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편지를 쓴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정여립이 순순히 체포되지 않고 도주했다는 점도
그의 역모가 사실일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싣게 만들죠
처음에는 조정에서도 무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정여립이 도망을 가버리면서 그를 확실한 역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여립의 난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조선의 권력 구도도 크게 바뀌었죠
이 사건으로 인해 약 1,000여 명의 지식인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호남 지역의 피해가 컸는데,
이후 호남 출신의 과거 급제자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하네요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고,
서인의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여립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사람들이 북인이 되고,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사람들은 남인이 되었죠
이는 이후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훗날 '정 씨 진인설'이라는 민간 신앙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정 씨 성을 가진 구세주가 나타나 부패한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의 이 신앙은 조선 후기 여러 반란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죠
특히 18세기부터 유행한 '정감록'이라는 예언서에 이 내용이 담겨 있어,
조선 사회는 끊임없이 반란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정여립의 난 이후 선조는 정철을 비롯한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장한 것을 빌미로 그를 파직시키고,
동인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죠
이는 선조가 어느 한 세력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역사의 진실이 무엇이든,
정여립의 난이 조선 후기 정치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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