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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김덕령. 그는 임진왜란의 영웅인가 그냥 과대평가 된 한 사람일 뿐인가?

by 사탐과탐 2024.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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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은 임진왜란의 영웅인가
그냥 과대평가 된 한 사람일 뿐인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였던 김덕령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선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던 비운의 인물로

수십 년이 지나 현종과 정조 대에 이르러 벼슬과 함께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으며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게 되었죠

과연 그는 어떤 이유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의 업적을 인정받게 된 것일까요?

 

김덕령은 1567년 12월 29일, 전라도 광주 무등산 아래 석저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 해당하는 곳이죠

그는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며

아버지 김붕섭과 어머니 남평 반 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덕령의 할아버지 김윤효는 종육품 문관인 선무랑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김익은 호조 정랑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죠

하지만 김덕령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재주는 있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김덕령은 종조부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동시에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하죠

김덕령의 무예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민간 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두어 길 되는 큰 칼을 들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면 큰 나무들이 마치 폭풍이 지나간 듯 쓰러졌다고 하네요

심지어 하나에 100근이나 되는 철퇴를 양손에 들고 휘둘렀다고 하니,

그 힘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14살 때는 마을에 나타난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이후 총 3마리의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용맹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김덕령은 무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7세에 향시에 합격할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죠

18세 때는 담양에 사는 흥양 이 씨와 혼인도 했습니다

 

20세에는 형 김덕홍, 매부 김응회와 함께 파주로 가

우계 성혼이라는 인물의 밑에서 성리학을 배웠죠

당시 성혼은 서인의 우두머리로, 김덕령은 이때부터 서인 계열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던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는데요

때문에 훗날 서인 계열이었던 김덕령이 동인 출신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했죠

 

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건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25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덕령은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죠

그들은 고경명의 의병에 합류해 활동했는데요

하지만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김덕령은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던 그해 7월, 형 김덕홍이 고경명을 도와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죠

김덕령은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주검동에서 무기를 만들어 의병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많은 영웅들과 조선군이 목숨 걸고 싸웠지만

결국 패배하자 조정에서는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결정했는데요

이때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가 김덕령을 추천했죠

그해 11월, 김덕령은 담양에서 5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충용군을 조직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2월 27일, 전주의 무과시험장에서

세자 광해군 앞에서 무예를 시험받은 김덕령은 '익호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어 선조는 김덕령을 형조 좌랑에 임명하고 '충용장'이라는 군호를 내렸죠

 

1594년 1월, 김덕령은 3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을 이끌고

군량미 3천 석을 실어 담양을 출발했습니다

남원을 거쳐 4월 초에 경상도 진주 대곡리에 도착해 진을 쳤죠

 

김덕령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갔습니다

왜군들은 그를 두려워해 '석저장군'이라 불렀다고 하네요

사실 석저는 김덕령이 살던 마을인 석저촌인데,

왜군은 그가 돌 밑에서 나온 줄로 잘못 알고 김덕령을 그렇게 불렀다고 하죠

그렇게 왜군들은 김덕령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실제 전투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당시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협정이 맺어져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이죠

1594년 9월 2일, 고성 지방에서 왜군과 맞서

포로 50여 명을 구출한 것이 유일한 전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공로로 김덕령은 선조로부터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 받았죠

 

그해 9월과 10월에는 이순신, 원균 등과 함께

수륙 연합 전선을 만들고 장문포의 왜적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왜군 장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성을 철통같이 수비한 탓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죠

게다가 이 전투에서 김덕령은 각기증을 앓아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그의 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때 김덕령의 삶에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1595년 말, 김덕령은 군율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해

부하들을 처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이것이 '제1차 김덕령 옥사'였죠

특히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복을 처형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김덕령은 탈영병을 잡기 위해 탈영병의 아버지를 잡아들였는데,

이 사람이 윤근수의 노복이었습니다

윤근수가 직접 찾아와 석방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덕령은 그의 요청을 거부한 채 노복을 처형했다고 하죠

다행히 우의정 정탁 등이 탄원을 한끝에 김덕령이 풀려났지만,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그의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몽학은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등 의병장들이 자신과 내통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고,

이 때문에 김덕령은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되고 만 것이죠

선조는 김덕령을 직접 국문했고, 김덕령은 20일 동안 6차례나 혹독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결국 김덕령은 1596년 8월 21일, 3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나에게 죄가 있다면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였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에 이순신과 권율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남도의 군민들 또한 그의 죽음을 원통해했죠

이후 남쪽 사람들은 자신들도 김덕령과 같은 꼴을 당할까 봐

무예가 뛰어난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덕령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들도 큰 불행을 겪게 되죠

그의 부인 흥양 이 씨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담양의 추월산으로 피난 갔다가

왜군을 만나자 절개를 지키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들 김광옥은 전라도 용안현(현재의 익산시 용안면)으로 피신해

본관을 용안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죠

후에 평안도 안주로 이주해 혈통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동생 김덕보는 세상이 싫어져 은거생활을 했다고 하죠

무등산 원효계곡 아래 풍암정이라는 집을 짓고 살다가 1624년 11월 28일에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김덕령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요

그의 죽음 후 65년이 지난 1661년,

김덕령은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인정받아 신원이 복권되었습니다

1668년에는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1678년에는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죠

 

1788년에는 정조에 의해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충장이란 '위태롭게 하여 임금을 받들었기에 충이라 하고,

무에 능하고 몸가짐이 진중하기에 장'이라는 뜻을 갖고 있죠

 

특히 정조는 김덕령을 크게 애도하며 그의 제사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내고

절대로 신주를 옮기지 말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또한 김덕령이 태어난 석저촌을 충효리로 개명하기도 했죠

 

1965년에는 김덕령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369년이나 지났는데도 그의 시신이 썩지 않고 미라 상태로 발견된 것인데요

당시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김덕령의 한이 서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김덕령의 유품 중에는 수의와 철릭 등이 있는데,

이 중 8점이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죠

현재 이 유물들은 광주 충장사의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광주에는 그를 기리는 충장로가 있고,

한국군 제31보병사단은 '충장부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광주 북구 충효동에는 충장사라는 사당이 있어 매년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죠

이런 것들을 보면 비록 살아있을 당시 김덕령은 큰 비극을 겪었지만

오히려 죽은 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덕령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하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김덕령의 용맹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실제로 세운 전공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의 충절과 비극적인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평가가 이루어졌죠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 후기 학자들이 김덕령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1747년 영조 대의 원경하는 김덕령을 호남의 10대 인물로 꼽으며

그 용기를 특히 높게 평가했죠

 

김덕령의 이야기는 민간에도 널리 퍼져 많은 설화를 남겼습니다

그의 비범한 능력과 용맹함, 그리고 억울한 죽음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죠

이런 설화들은 주로 전라도에서 전해졌으며, 강원도 횡성군, 경기도 남양주시, 강화도,

경상도 달성과 월성 같은 타 지역에서도 전해졌습니다

 

김덕령이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고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의 어머니가 임신 중 호랑이를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뱃속의 김덕령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 호랑이가 감히 덤비지 못했다는 것이죠

 

심지어 김덕령이 화가 나면 눈에서 불이 나와 10리까지 비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설화들은 김덕령의 비범함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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