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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안원왕. 후계자 선정에 실패하며 전성기 고구려를 나락으로 빠트린 왕

by 사탐과탐 2024.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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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선정에 실패하며 전성기 고구려를 나락으로 빠트린 왕
안원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고구려의 23대 국왕, 안원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고구려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하죠

자, 그럼 이제 안원왕의 시대로 들어가 볼까요?

안원왕은 531년, 형인 안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즉위 과정부터가 미스터리로 가득한 인물이었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안장왕이 후사 없이 죽은 상황에서

그의 동생인 안원왕이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죠

안장왕이 누군가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아직까지 정확한 답을 찾지는 못한 상황이죠

 

다만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당시 고구려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온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권력 다툼의 결과로 안장왕이 비명횡사했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죠

기록에 따르면 안원왕의 키는 7척 5촌으로, 약 173cm였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꽤나 큰 키였겠죠

게다가 도량이 컸다고 하니, 그야말로 '큰 그릇'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끊임없는 자연재해에 시달렸기 때문에

안원왕의 통치 기간이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았다고 하죠

535년에는 홍수, 지진, 우레, 전염병이 연달아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가뭄과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537년 3월에는 기근까지 이어졌죠

당시 고구려는 이러한 자연재해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농작물 피해로 인한 식량 부족, 전염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 등은

국가를 뿌리째 흔들 수도 있는 큰 위기였기 때문인데요

안원왕은 이런 위기 속에서 직접 나서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제했다고 합니다

그는 재해 지역을 순행하며 직접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구휼 정책을 실시했다고 하죠

그의 통치 능력과 백성을 향한 애정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러한 안원왕의 행동으로 봤을 때 당시 백성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을 거라 짐작되죠

 

그는 동위와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남량과도 교류를 유지하며

그전부터 이어져왔던 남북조 양면 외교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540년 백제의 성왕이 우산성을 공격해 오자 이를 물리치기도 했죠

여기까지만 보면 비록 각종 자연재해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안원왕은

안장왕이 회복시킨 고구려의 전성기를 어느 정도 유지한

제법 나쁘지 않은 군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때부터 기반을 쌓기 시작해서

광개토대왕 때부터 전성기를 달려온 고구려가

안원왕이 왕으로 있던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안원왕의 치세 말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고구려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원왕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요

안원왕의 제1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두 명의 소왕후를 새로 들였는데 그녀들이 각각 아들을 한 명씩 낳게 됩니다

안원왕이 병들자, 이 두 소왕후의 아버지들이

각자의 손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싸움을 벌였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쪽은 '추군', 다른 쪽은 '세군'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각각 다른 정치 세력을 대표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권력 다툼은 단순한 가족 간의 갈등이 아니라

당시 고구려 사회의 깊은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국내성 세력과 평양 세력의 대립으로 해석하기도 하죠

 

이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계속된 정치적 갈등이

안원왕의 시대까지 이어져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옛 수도로, 전통적인 귀족들의 근거지였습니다

반면 평양은 새로운 수도로, 왕권 강화를 위해 옮겨온 곳이었죠

 

이들이 맞붙은 왕위 쟁탈전의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요?

추군 측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세군 측에서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들의 숫자만 봐도 당시 고구려의 귀족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짐작할 수 있죠

 

이렇게 많은 인명 피해는 고구려의 국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를 감안하면, 2000명의 사망자는 엄청난 숫자이기 때문이죠

더구나 이들이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지배층이 받은 타격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 사건은 고구려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요

 

안원왕 이후 고구려는 본격적인 쇠퇴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왕권은 약해지고, 귀족들의 권력은 더욱 커졌죠

이전까지는 국무총리 격인 '국상'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이때부터는 왕을 견제하는 '대대로'나 '막리지'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정치 구조가 크게 변화했음을 의미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왕권의 약화는 고구려의 중앙 집권력 또한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능력 또한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했죠

안원왕은 이런 혼란한 상황인 545년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기록이 엇갈리는데요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죽음이 3월이라고 하지만, 일본서기는 12월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중국의 기록은 548년이라고 하니, 정확한 날짜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죠

이렇게 기록이 엇갈리는 것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세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근현대의 역사보다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의견을 내기도 하죠

앞에서도 말했듯 안원왕의 시대는 고구려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은

이후 고구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일들이었기 때문이죠

자연재해와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강대국의 위상을 보여주던 고구려가

안원왕 시대 말기에 있었던 왕위 다툼으로 인해 점점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안원왕은 그럭저럭 나라를 잘 다스려왔던 왕임에도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는데 실패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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