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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중국에서 한창 유비 조조 손권이 싸우고 있을때, 고구려는 뭘하고 있었을까

by 사탐과탐 2024.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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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한창 유비 조조 손권이 싸우고 있던 삼국지 시대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고구려는 뭘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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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연의 때문에 기나긴 중국역사 중에서도 위오촉의 삼국시대는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절이죠

때문에 삼국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보다 보면

과연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드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그 시절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들 중에서

고구려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는 삼국지 시대가 오기 전

통일제국인 한나라 시대부터 계속해서 그들과 분쟁을 벌이고 있었죠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 11년에는 한나라 광무제의 명을 받은

요동태수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때 재상 을두지와 호동왕자의 계책으로 이들을 물러나게 만들었으며

6대 왕인 태조대왕 때는 한나라 유주 자사 풍환이

대규모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 밑에 있던 예맥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때 태조대왕의 동생인 '수성'이 풍환에게 거짓항복을 하는 편지를 보내고

방심하고 있던 풍환을 고구려의 도성으로 유인한 후

몰래 병사들을 보내 남아있던 풍환의 세력을 모두 쓸어버렸죠

이후 태조대왕은 서안평을 기습하는 등 요동지역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고

결국 한나라는 고구려에 요동과 산둥반도 지역의 일부를 내주게 됩니다

 

8대 왕인 신대왕 시절에도 한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는데

이때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국상'의 지위에 올랐던 명림답부가

수비위주로 싸우면서 적들의 식량이 떨어지게 만드는 청야전술을 펼치자는 주장을 했고

그의 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쟁은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죠

9대 왕인 고국천왕 때도 한나라 군사들이 고구려의 국경을 침입해 왔는데

이때 고국천왕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싸운 결과

전투는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나 손견 유비등 여러 지방군벌들이 생겨나던 시기에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부인 '한사군'에는 공손도라는 군벌이 자리를 잡게 되죠

197년 고구려에서 왕위 계승 전 끝에 산상왕이 즉위했을 때

형인 고발기가 이에 반발했다가 패배한 후

공손도에게 도망 와서 군사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선뜻 3만 명의 군대를 지원해 준 것으로 봤을 때 공손도의 세력이 강대했다는 것과

그가 고구려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세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공손도의 세력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외교관계를 맺으며 보내던 고구려는

11대 왕인 동천왕 시절 오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 날 서쪽에서 중국인 한 무리가 나타나자 고구려에서는

그들을 붙잡아 조사를 하게 되었고

그들이 오나라의 군주 손권이 보낸 사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232년 손권은 당시 요동을 다스리고 있던 공손연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에게 '연왕'의 작위와 구석의 지위를 내리겠다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강대한 위나라를 바로 옆에 두고

굳이 오나라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던 공손연은

사신들의 목을 베어버린 후 그들이 가지고 온 보물을 모두 빼앗아버렸죠

하지만 이때 공손연에게 간 사신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일부가 살아남았는데 이들이 고구려로 피신을 한 것이었는데요

 

임무에 실패한 오나라 사신들은 공손연대신

고구려라도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동천왕을 찾아가

자신들의 군주께서 고구려의 왕께 보내는 선물을 준비했는데

공손연이라는 놈이 선물을 빼앗아버려서 빈손으로 왔다는 거짓말을 했죠

그렇게 오나라와 고구려는 국교를 맺게 됩니다

 

이때 동천왕은 '선우'라는 직위를 오나라로부터 받게 되는데

이 선우는 흉노족의 군주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죠

이후로 고구려의 사신들이 오나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오나라의 사신들이 고구려로 와서 군마거래를 하는 등 나름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위나라에서 공손연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오나라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위협을 계속 가해 오면서

결국 고구려도 공손연처럼 손권이 보내온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내버렸고

그렇게 고구려와 오나라의 관계는 박살이 나버리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동천왕 시기 고구려는 위나라와도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비류수 전투'에서

동천왕이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대패하며 수도인 환도성까지 함락 돼버렸기 때문이죠

비류수 전투가 벌어지기 전 위나라와 요동의 공손연 세력 사이에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언제 공손연이 자신들의 영토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던 위나라는

결국 237년에 관구검을 보내 공손연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공손연의 승리로 끝났죠

 

기세가 오른 공손연은 연나라를 건국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위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밑에 있던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었기에

사마의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게 되죠

두 세력이 맞붙은 결과가 위나라의 대승으로 끝나면서 공손연의 세력은 멸망을 하게 됩니다

 

위나라가 공손연을 멸망시킨 후 한반도 서북부에 있는 한사군을 접수하면서

서로 국경을 직접 맞대게 된 위나라와 고구려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죠

위나라와 공손연이 싸우고 있을 때 고구려에서도 위나라를 도와줬지만

위나라에서는 그 어떤 보상도 고구려에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동천왕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당시 중원 최강국이던 위나라를 상대로 과감히 선빵을 치게 됩니다

 

어차피 요동을 점령한 위나라가 계속 세력을 넓히려는 욕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니

차라리 먼저 공격을 하자는 생각이었죠

242년 고구려는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기습공격해 그곳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패자'라는 벼슬을 지내던 고구려의 관리 '득래'는

단식투쟁까지 해가면서 동천왕에게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며 그를 말렸는데

동천왕은 기어이 패자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서안평 습격을 강행했고

패자는 머지않아 고구려 땅이 쑥대밭이 될 거라며 탄식하고는

이후로 밥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훗날 전쟁이 끝난 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관구검도 감탄하며

패자의 무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명을 내렸고

고구려의 백성들도 현명한 패자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하네요

고구려의 기습소식을 들은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은

오환족과 선비족까지 불러 모은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원래 위나라와 고구려는 세력의 차이가 컸지만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직전인 244년에

위나라가 촉나라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가

흥세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위나라의 기세가 꺾인 시점에서 승부를 해볼 만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죠

 

그렇게 위나라와 고구려가 맞붙은 비류수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동천왕은 위군의 2배나 되는 2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소집해 데려온 데다

고구려의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전투였기 때문에

지형적인 이점까지 안고 있는 상태에서 위와 맞붙을 수 있었습니다

초반 흐름은 고구려에 굉장히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죠

 

지금은 압록강의 한 지류인

'혼강'이라 불리는 비류수 근처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끝에

고구려군은 무려 3천 명의 적군을 베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후 양맥의 골짜기에서 벌어진 '양맥전투'에서도 고구려군이 승리했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적의 수만 3천여 명이었다고 하네요

 

무려 6천 명에 달하는 적을 사로잡거나 죽이는 엄청난 대승을 거둔 동천왕은

위나라의 명장이라는 관구검이 많은 병력을 끌고 왔음에도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안에 있다며

5천 기의 기병을 끌고 남아있던 위나라군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관구검이 남아있던 4천의 보병들을 이용해

방진을 치며 고구려 기병의 돌격을 막아낸 후

당황하는 고구려군을 상대로 반격에 나서 역전승을 만들어냈죠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2만 명 중 만 8천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으며

동천왕은 얼마 남지 않은 병사와 가족들을 데리고

수도인 환도성을 버려둔 채 옥저로 달아나야만 했습니다

국왕이 직접 적군의 2배나 되는 병사들을 끌고 나갔는데

대부분의 병력을 잃어버리며 전멸이나 다름없는 패배를 당하면서

고구려는 정말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 상황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정예병사들로 이루어진 주력군을 잃은 고구려는 이후 위나라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었고

위나라군은 그해 10월 도읍인 환도성을 점령한 후

도성 안에 있던 사람들을 만 명 넘게 학살해 버렸습니다

환도성을 점령한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에게 명령을 내려

옥저로 도망가는 동천왕을 끈질기게 추격했다고 하는데요

 

이때 고구려의 장수 '유유'가 귀한 동물의 모피를 들고

추격하는 위나라의 장수를 찾아가 거짓항복을 하는척하면서

모피 속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적장을 죽이면서 시간을 끌었고

또 다른 장수 '밀우'는 결사대를 만들어서

적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동천왕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줬다고 합니다

덕분에 동천왕은 주변에 있는 산과 계곡에 숨어 다시 병사들을 모을 시간을 벌 수 있었죠

 

이후 다시 세력을 회복한 동천왕은 위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수도인 환도성은 적군들에 의해 폐허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임시로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겨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고구려는 각지에서 끌어모은 정예병사 대부분을 잃은 데다

수도까지 쑥대밭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승전국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하죠

 

그래서 비류수 전투는 원균의 '칠천량 해전'이 조선 역사에서 손에 꼽는 참패로 꼽히듯

고구려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하네요

이 시절 고구려가 너무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이때의 패배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머지않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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