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최강의 군주 장수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긴 수명을 뜻하는 시호 그대로, 394년에 태어나 491년까지 97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던 장수왕은 그의 긴 생애만큼이나 1세기에 걸쳐 고구려 역사와 함께 했었는데요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79년 2개월이라는 기나긴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를 동아시아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죠
지금부터 장수왕의 업적을 자세히 살펴보며, 그가 어떻게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이끌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장수왕은 394년에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거련'이었는데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체격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뜻과 기운이 호방하고 컸다'고 전해집니다
장수왕은 412년 10월, 광개토대왕이 서거하자 18세의 나이로 고구려의 20대 왕위에 올랐죠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장수왕의 첫 번째 과제는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계승하고 확고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위 2년 후인 414년, 장수왕은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여 아버지의 업적을 기렸는데요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정복 사업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왕인 장수왕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역할도 했죠
장수왕은 초기에 아버지가 닦아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국가를 안정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는 광개토대왕 시대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확장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체제 정비에 힘썼죠
이 시기에 장수왕은 내정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또한 동시에 고구려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죠
423년에는 충주에 고구려비를 세워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영토 확장을 대내외에 과시했습니다
이 비석은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이미 장수왕 초기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 시기 장수왕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연호 사용이라고 할 수 있죠
연가, 연수, 건흥 등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장수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이는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자주의식의 표현이었으며, 장수왕의 자신감과 야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수왕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427년에 단행한 평양 천도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도 이전 이상의 의미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었죠
고구려의 기존 수도였던 국내성은 압록강 상류의 산간지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농업 생산력이 낮고 대외 교류에 불리한 위치였죠
또한 국내성 지역은 고구려 건국 이래 토착 세력인 귀족들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 확립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평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수도로 적합했죠
우선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농업 생산력이 높았고, 대동강을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어 대외 교류에 유리했습니다
또한 남진 정책을 펼치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였죠
특히 평양은 313년 미천왕이 낙랑군을 정복한 이후 고구려 왕실이 관심을 가져온 지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는데요
기존의 귀족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해 크게 반발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장수왕은 이러한 반대를 물리치고 과감하게 천도를 단행했습니다
이는 장수왕의 강력한 왕권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결국, 평양 천도의 결과는 고구려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선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죠
기존 귀족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천도 이후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도 한층 높아졌습니다
평양은 고조선 이래 한반도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곳으로의 천도는 고구려가 한반도의 정통 국가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효과가 있었죠
또한 중국과의 교류도 더욱 활발해져, 고구려의 국제적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었습니다
한편, 장수왕은 한국사 최고의 외교군주로 칭송받을 정도로 외교능력이 특히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한층 높였는데요
북위와 남조의 여러 왕조들에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고수했죠
장수왕의 외교력은 436년 북연의 멸망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북위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북연의 왕 풍홍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했는데요
고구려군은 북위군보다 먼저 북연의 수도 화룡성에 도착해 북연왕 풍홍과 백성들을 구출했습니다
당연히 북위는 코 앞에서 고구려에게 북연왕을 빼앗기자 분노했지만 막강한 고구려 군사력에 위축되어 반항 조차 못 했다고 하죠
이후 장수왕은 풍홍을 없애버리는 강경책을 취했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풍홍의 무례한 태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북연이라는 정치적 카드를 더 이상 활용할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죠
이 사건은 장수왕의 냉철한 정치적 판단력을 보여주는데요
그만큼 장수왕의 외교 정책은 매우 실용적이었습니다
그는 필요에 따라 남조와 북조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고, 때로는 유연과 같은 북방 유목 세력과도 협력 관계를 맺었죠
이러한 노력의 결과, 5세기 중반 고구려는 중원의 북위, 강남의 유송, 북방의 유연과 함께 동아시아의 4대 최강국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 못지 않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은 475년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킨 것 입니다
이 전투는 장수왕의 뛰어난 전략과 치밀한 준비가 돋보이는 사건이었죠
백제 공격에 앞서 장수왕은 오랜시간 공을 들이는 치밀한 계략을 세우게 되는데요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고구려가 알게 되는데요
이에 극대노한 장수왕은 백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웠죠
장수왕은 도림이라는 승려를 첩자로 백제에 파견했습니다
도림은 뛰어난 바둑 실력으로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뒤, 교묘한 방법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계책을 썼죠
그는 개로왕에게 성곽과 궁궐을 수리하고 왕릉을 크게 만들어 백제의 위용을 과시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국고가 바닥나고 백성들은 가난해졌으며, 귀족들의 불만도 높아졌죠
이러한 내부 분열을 틈타 475년,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위례성을 공격했습니다
고구려군은 네 방향으로 나누어 위례성을 포위했고, 불과 7일 만에 북성(풍납토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어서 남성(몽촌토성)마저 공격받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개로왕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결국 붙잡혀 처형당하고 말았죠
이 전투의 결과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게 되었고, 백제는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례성 함락 이후에도 장수왕은 계속해서 남진 정책을 추진했는데요
481년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신라를 공격해 북쪽 변경 지역의 성 7개를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미질부(지금의 포항 지역)까지 진격했습니다
결국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에 의해 저지당했지만, 이는 고구려의 군사력이 한반도 남부까지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죠
장수왕의 이러한 군사 활동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북으로는 중국 요동 지역부터 남으로는 한강 유역을 넘어 충청도 지역까지, 동해안과 서해안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죠
이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였으며, 고구려가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영토를 넓혀가던 장수왕은 491년 12월,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북위의 효문제는 특별히 직접 애도를 표하고 관작을 추증하며 '강왕'이라는 시호를 내렸죠
이는 장수왕과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장수왕이 남긴 유산은 실로 거대했지만 그렇다고 장수왕의 치세가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적극적인 남진 정책은 백제와 신라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후대 고구려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또한 신라의 성장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점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은 명실상부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만들었죠
특히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외교력은 고구려가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며 이후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과 같은 강대국과 맞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의 사후 고구려가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장수왕이 남긴 업적 덕분에 한민족이 한때나마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줍니다
언젠가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나와서 우리나라가 다시한번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패권을 다툴 수 있는 최강대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최강군주 장수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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