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의 동생과 재혼했던
고구려의 왕후 우씨왕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고구려의 혼인 풍습을 통해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왕후의 자리를 2대에 걸쳐 유지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여인이었습니다
단순히 형사취수제 때문에 그녀가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것만은 아닌데요
빠르게 정세를 읽는 능력과 빠른 판단력과 실행력 덕분에 그녀는 고구려 역사에 기록될 만큼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죠
지금부터 두명의 고씨 형제와 결혼해서 두번이나 왕후 자리에 올랐던 우씨왕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씨왕후는 고구려 5부 연맹의 하나인 연나부 출신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우소'는 연나부의 군장이었죠
연나부는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온 세력으로, 특히 7대 차대왕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8대 신대왕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신대왕은 연나부와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우씨를 자신의 아들인 고국천왕과 혼인시켰죠
이는 단순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고구려 왕실과 강력한 귀족 세력 간의 동맹을 의미했습니다
그녀는 고국천왕이 즉위한 지 2년 후인 180년에 정식으로 왕후에 책봉되었죠
고국천왕 시기 우씨왕후와 연나부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184년 중국 후한의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연나부의 도움으로 격퇴하면서 우씨왕후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굳건해지게 되었죠
그러나 권력의 균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고국천왕 재위 12년(190년)경, 우씨왕후의 친척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횡포를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죠
이에 고국천왕은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우씨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우씨왕후의 정치적 영향력에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되었죠
고국천왕은 반란을 진압한 후 연나부 귀족들을 숙청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놀랍게도 우씨왕후는 처벌을 면했는데, 이는 아직 왕권이 강하지 않았던 고구려의 정치 현실 때문이었는데요
고국천왕으로서는 5부 연맹의 한 축인 연나부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197년 5월에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고구려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이때 우씨왕후는 놀라운 행보를 보였죠
그녀는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한밤중에 고국천왕의 동생인 고발기를 찾아갔습니다
사실 우씨왕후의 이런 행동은 당시 고구려의 왕위 계승 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었죠
고구려는 형제 상속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자식이 없던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우씨왕후는 이러한 관례를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러나 고발기는 우씨왕후의 계략을 알아채고는 모욕을 주면서 집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우씨왕후는 고발기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했을까요
그녀는 곧바로 셋째 왕자인 고연우를 찾아갔죠
형과는 다르게 고연우는 우씨왕후를 정중히 맞이했고, 금세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게 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요
"우씨를 대접하던 연우가 고기를 썰다가 칼에 베이자 우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으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왕궁에 돌아왔다"
이 기록은 우씨왕후와 고연우 사이에 정치적 동맹뿐만 아니라 남녀 관계도 형성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우씨왕후는 고연우와 함께 궁으로 돌아와 신하들을 불러 모아 고국천왕의 유언이라며 고연우를 고구려의 새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죠
이러한 우씨왕후의 행동은 역사적으로 반란에 성공했던 이들처럼 매우 대담하고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왕위계승 서열이 가장 높은 고발기에게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시 고구려 사회의 맥락에서 보면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습니다
고대 북방 민족들 사이에서는 형사취수혼이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형이 사망하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었죠
이는 가문의 결속과 과부와 고아의 보호라는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의 안정을 위한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우씨왕후는 이러한 풍습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매우 영리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죠
고연우가 고구려의 제10대 왕인 산상왕으로 즉위하면서, 우씨왕후는 다시 한 번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산상왕은 우씨왕후 덕분에 왕위에 오른 만큼 그녀를 특별히 더 아끼며 대우했죠
우씨왕후와 고연우의 정치적 동맹으로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고발기는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국천왕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왕권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이후 고발기는 우씨왕후와 고연우가 있는 왕궁을 공격하려 했지만, 뜻밖에도 고구려 귀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죠
이는 고발기의 성품 때문이었는데요
고발기가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가 귀족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죠
귀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고발기는 결국 요동으로 도망가 중국 후한에 항복하고 말았는데요
그러고는 3만에 달하는 후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산상왕은 고발기의 난을 막기 위해 동생인 고계수를 보내 고발기의 군대와 맞서게 했죠
고계수는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고발기의 군대를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패배한 고발기는 고계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형제간의 비극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고계수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형을 크게 꾸짖습니다
이에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를 느낀 고발기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죠
고발기의 반란과 침공을 물리침으로써 산상왕의 왕권은 더욱 공고해졌고, 이는 우씨왕후의 입지 또한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우씨왕후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왕실의 계승 문제와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산상왕은 기이한 꿈을 꾸게 됩니다
꿈에서 그는 작은 왕후를 통해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죠
이 꿈 이야기를 신하들에게 털어놓자, 을파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는 우씨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왕후를 들이지 못하고 있던 산상왕에게 일종의 구실을 제공한 셈이었죠
208년 11월, 산상왕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옵니다
나라의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쳐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그 마을의 한 여인의 도움으로 그 돼지를 잡는데 성공하죠
그녀의 이름은 신기하게도 왕후가 될 여인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후녀'였습니다
산상왕은 이 소식을 듣자 과거 자신이 꿨던 꿈의 계시라고 여기고는 그 마을을 방문해 후녀와 동침하게 됩니다
이때 산상왕은 후녀에게 아들을 낳으면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하죠
한편 이 사실을 알게 된 우씨왕후는 극도의 질투심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그녀는 병사를 보내 후녀를 제거하려 했죠
그러나 후녀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게 되는데요
그녀는 "나를 죽이면 왕의 자식도 함께 죽이는 셈"이라고 말하며 왕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던 거죠
예상치 못한 후녀의 과감한 행동에 우씨왕후의 계획은 무산되고 맙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후녀의 임신 사실이 산상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후녀는 정식으로 후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죠
이듬해인 209년, 후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바로 훗날 고구려의 11대 왕인 동천왕이 됩니다
그 이후에도 우씨왕후는 이 모자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바람에 왕태자 책봉은 태어난 지 4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우씨왕후의 이러한 행동은 그녀의 권력욕과 함께 깊은 불안감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자식이 없는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씨왕후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227년 산상왕이 승하하고 동천왕이 즉위한 후에도 우씨왕후는 왕태후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죠
심지어는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거나, 시종을 시켜 식사하는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는 등 노골적으로 왕권을 무시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우씨왕후의 행동은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 왕권이 아직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강력한 귀족 세력을 배경으로 한 우씨왕후가 왕위 계승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우씨왕후는 23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녀의 유언은 좀 독특했었는데요
"살아서 한 짓을 돌이켜 보니 국양(고국천왕)을 볼 면목이 없어 고국천왕릉에는 묻힐 수 없고, 산상왕의 능에 장사지내 달라" 는 유언을 남긴 것이죠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략결혼을 했던 첫번 째 남편 고국천왕보다는 자신이 선택했던 두번째 남편이었던 산상왕을 진정한 남편으로 생각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씨왕후는 오랫동안 한국 역사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 때는 그녀를 한 몸으로 두번이나 국모가 된 인륜을 어긴 희대의 악녀로 온갖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우씨왕후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지고 있죠
그녀를 단순히 인륜을 저버린 악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했던 능동적인 여성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이나 왕후 자리에 올랐던 고구려의 우씨왕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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