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형이었지만 운명을 달리한 비운의 왕세손
의소세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 뒤에는 조선 왕실의 희망이자 비극이 담겨 있는데요
의소세손은 영조의 첫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으로,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인물로 기대를 받았었죠
그는 정조의 친형이었으며, 만약 요절하지 않았다면 정조 대신 조선의 왕위에 올랐을 인물입니다
의소세손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의 존재는 조선 왕실의 역학과 영조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하죠
1750년(영조 26년) 8월 27일,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의소세손이 태어났습니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57세로 조선 시대의 조혼 풍습을 고려하면 다소 늦은 나이에 첫 손자를 본 셈이었죠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영조는 손자의 탄생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영조가 가장 아끼던 둘째 딸 화평옹주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의소세손이 태어난 때가 마침 화평옹주의 3년상이 끝나는 시기와 맞물렸던 것이죠
영조는 화평옹주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고
이 슬픔이 첫 손자 탄생의 기쁨까지 압도했던 것 같습니다
'영조실록'에는 화평옹주 사망 당시 영조의 반응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화평옹주는 임금의 둘째 딸로 영빈 이씨의 소생인데 임금이 매우 사랑했다
옹주가 죽자 임금이 매우 슬퍼했으며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만류에도 앉아서 밤을 새웠다" 라는 구절이죠
혜경궁 홍씨는 이런 상황에서 아들을 낳은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에게나 혜경궁 홍씨에게 축하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사도세자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화평옹주가 생전에 동생인 사도세자를 많이 챙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의 부재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간극을
더 벌리는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죠
그런데 의소세손에 대한 영조의 태도가 극적으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영조가 의소세손의 몸에서 특별한 표식을 발견한 것인데요
의소세손의 어깨엔 푸른 점이, 배에는 붉은 점이 있었는데
이것이 화평옹주의 몸에 있던 점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조는 이를 보고 의소세손이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여겼고
그때부터 의소세손을 특별히 아끼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무관심했던 영조가
갑자기 의소세손을 극진히 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영조의 태도 변화는 매우 극적이었죠
영조는 의소세손이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세손의 스승을 종1품 관리 중에서 선발하라고 명령했고
8개월 만에 왕세손으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이 빠른 조치였죠
그러나 영조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의소세손의 삶은 불운하게도 너무나 짧았습니다
1752년 3월 4일, 의소세손은 불과 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유모의 부적절한 양육 방식이 한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보모된 자가 외람되게도 술을 마시고 고기반찬을 먹으며
아이를 흔드는 등의 문제가 있으나
유모된 지가 오래되어 쉽사리 바꾼다면 어린 세손이 놀랄까 염려스럽다"
놀랍게도, 의소세손을 돌보던 유모가 술을 마시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아이를 심하게 흔드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던 것이죠
특히 '흔들린 아이 증후군'의 위험성을 고려하면
이러한 양육 방식이 의소세손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처음으로 본 손자가 허무하게 요절하자
그 충격이 너무나 컸었는지 유모를 심하게 추궁하기는 싫다며
사실상 자포자기한 태도를 보였다고 하죠
그만큼 의소세손의 죽음은 영조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영조는 직접 의소세손의 묘지문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에서 영조의 비통함을 엿볼 수 있죠
"오직 너 세손아! 내가 너를 안았을 때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슨 일로 국운이 침체의 운수를 당하여, 내 손자를 죽게 하였더란 말인가?
처음에는 예사로운 질병으로 여겨 저절로 좋아지려니 했는데,
훌륭한 자질이 갑자기 거두어 마침내 아득한 곳으로 가버릴 줄 뉘 알았으리?
아! 슬프도다." 라는 내용의 묘지문이었죠
세 살배기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의소세손의 죽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혜경궁 홍씨는 다시 임신을 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 해 9월, 훗날 정조가 되는 아들을 낳았죠
그렇게 정조의 탄생은 영조와 왕실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었지만, 영조의 마음속에서 의소세손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종종 꿈에서 의소세손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의소세손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죠
의소세손의 짧은 생애는 조선 왕실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존재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 그리고 정조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죠
첫째, 영조는 손자 의소세손에 대한 사랑이 정말 각별했는데 이는 훗날 정조에 대한 영조의 각별한 애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둘째, 의소세손의 죽음은 영조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이는 영조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죠
특히 사도세자와의 관계에서 영조의 복잡한 심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셋째, 의소세손의 존재는 조선 왕실의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만약 의소세손이 살아남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텐데요
정조가 아닌 의소세손이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넷째, 의소세손의 사례는 조선 시대 왕실의 육아 방식과 그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유모의 부적절한 양육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당시 왕실의 육아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이죠
의소세손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그의 존재가 조선 왕실과 역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역사의 '만약'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며 동시에 역사 속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하죠
지금까지 영조가 정말 아낌없이 사랑을 줬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이었지만 안타깝게 잊혀진 조선의 왕세손 의소세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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