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피지컬+무력+두뇌+정치 완벽에 가까웠던
고구려왕 고국천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사실 '고국천왕'도 소수림왕 못지않게
고구려의 토대를 닦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고국천왕은 고구려의 9대 국왕으로
계루부와 소노부 등 5개의 부가 연합해 만들어진 고구려에서
왕권 강화를 추구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죠
그는 명재상으로 불리는 '을파소'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해 나라를 잘 이끌었던 점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어려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인
진대법을 시행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고국천왕은 179년~197년까지 고구려의 왕위에 있었는데
국천왕이나 국양왕이라는 칭호로 불린다고 합니다
국천이나 국양은 왕릉이 위치한 곳으로
고구려 전기 수도인 국내성 지역의 특정 지명을 의미한다고 하죠
고구려에서는 이렇게 왕릉의 위치를 왕의 시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76년 태자로 책봉된 고국천왕은 8대 국왕인 신대왕이
179년 12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를 이어받았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천왕은 키가 9척(약 210cm 정도)이며
늠름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진 데다 힘이 매우 셌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신하들의 의견을 잘 듣고 판단해서 일을 처리하며
관대함과 용맹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문무겸비의 왕이었다고 하죠
그의 왕비는 절노부 출신의 우 씨라는 여성이었는데
고구려의 왕비들은 주로 절노부 출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보통 계루부에서는 국왕이 절노부에서는 왕비가
순노부에서는 대막리지가 배출되며 고구려의 최상위층으로 군림했다고 하네요
고국천왕이 즉위한 시기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고구려와 인접한 중국에서는 이런 고구려의 성장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고국천왕 6년인 184년에는 후한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보내서
고구려를 공격해 온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국천왕은 이런 외부의 공격을 잘 막아내면서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죠
하지만 고구려는 건국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한
다섯 개의 부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연합국가였기 때문에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고국천왕은 왕권을 강화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절노부 수장 우소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절노부 세력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나가려는듯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절노부마저도 왕권 아래에 두려는 움직임을 보였죠
고국천왕 12년인 190년 9월에는 고국천왕이 절노부에서 폭정을 일삼던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를 직접 처벌하려 했습니다
원래 고구려 5부는 자치적인 지역 집단이어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은 각 부의 수장들이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고국천왕이 그들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기 시작한 것이죠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사실 진짜 뜻은 계루부를 제외한 4부의 세력들을 왕이 직접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고국천왕의 의도를 눈치챈 좌가려 등의 절노부는 결국 반란을 일으켰죠
절노부 세력이 수도인 국내성까지 공격하는 등
이 반란으로 인한 권력다툼은 다음 해 4월까지 치열하게 이어졌고
고국천왕은 자신의 직속병사들을 동원해 마침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언제든지 왕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4부의 세력을 왕이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죠
얼마 후 고국천왕은 4부에 명을 내려
자신을 도와 나라를 이끌어갈 대표인재를 추천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추천한 인재가 각 부의 대표가 아니라 왕의 신하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면서
더 이상 4부에서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영역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왕 아래로 들어와 고구려의 일원으로서 고구려를 위해 일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었죠
고국천왕의 명령을 받은 4부에서는 '안류라는 인물을 추천했는데
정작 추천을 받은 안류는 그런 큰일을 하기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다른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유리명왕 시절 대신이었던 을소의 후손인 '을파소가' 가문이 몰락한 후
서압록곡 '좌물촌'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그가 나라를 다스릴만한 인재라며 을파소를 추천한 것이죠
안류의 말을 들은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중외대부로 삼고 일을 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을파소는 다른 4부의 세력이 언제 견제를 할지 모르는데
중외대부 정도의 직책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거 같다며 왕의 청을 거절했죠
고국천왕도 을파소의 뜻을 알아듣고는 그에게 국상이라는 관직을 내렸습니다
국상은 고구려의 국정을 논의하는 '제가 회의'때
모든 부분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실권자의 자리였죠
고구려 중후기의 대대로, 대막리지와 같은 위치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고국천왕은 5부의 수장 출신이 아닌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하면서
다른 4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국왕이 직접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죠
물론 4부의 세력들이 그런 고국천왕의 결정에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을파소에게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죠
하지만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곧 왕의 말을 듣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선언을 해버리면서
만약 을파소의 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본인뿐 아니라
그의 일족들까지 모두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이제 왕권에 함부로 도전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죠
이후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면 또다시 문제가 생겼겠지만
명재상 을파소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나라를 잘 다스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고국천왕은 왕권강화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고국천왕 16년인 194년 이른 가을에 갑자기 서리가 내리면서
농작물이 많은 피해를 입은 탓에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고국왕은 즉시 나라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네요
같은 해 10월에 고국왕이 '질양'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길가에 앉아서 우는 백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국천왕이 왜 우는지 이유를 묻자 그 백성은
자신은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늙은 어머니와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데
얼마 전 내린 서리 때문에 농사를 망친곳이 많아 나라가 어려워진 탓에
자신을 써주려는 곳이 없어 이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울고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고국천왕은 단순히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인 '진대법'을 만들기로 결심하죠
진대법은 봄인 3월부터 추수를 하기 전인 7월까지가
가장 먹을 것이 모자란 '춘궁기'이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나라에서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백성은 추수를 하고 여유가 생기면 빌린 곡식을 갚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고국천왕이 이런 제도를 만든 이유는 먹고살기 어려운 백성들을
나라에서 일시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통해 꾸준하게 지원해 주면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죠
다만 고국천왕이 이 진대법을 시행한 이유가
순수하게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줄 목적만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하는데요
5부가 연합해 만들어진 고구려이다 보니
그곳의 백성들도 자신이 소속된 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각 부의 백성들은 고구려왕의 백성이면서도
자신이 소속된 부의 수장의 밑에 있는 존재이기도 했죠
때문에 각 부가 반란을 일으킬 때는 그곳의 병사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진대법의 시행하면서 고구려 백성들에게
그들은 모두 왕이 다스리고 보살피는 존재라는 걸 확인시켜 주면서
감히 왕에게 칼을 겨누지 못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하죠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진대법 또한
고국천왕과 을파소가 추진한 왕권 강화 정책 중 하나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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