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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채제공이 싸X지 없는 두 유생을 참교육 한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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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이 담배물고 깝치던 싸X지 없는 두 유생을 참교육 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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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정조 임금이 조선을 다스리던 179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당시 좌의정 벼슬을 지내고 있던 체재공은 정조대의 손꼽히는 충신이자 명재상이었죠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좌의정이라고 하면 조선시대 관료 18 품계 중 정 1품으로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영의정의 권력이 가장 대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영의정은 의외로 담당하는 실무가 적었기 때문에 명예직의 의미가 강했고 오히려 실세로 여겨지는 것은 좌의정인 경우가 많았던 만큼 당시 권력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자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체재공이었습니다 

 

그런데 1790년 7월 4일 이 좌의정 체재공이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들의 하극상에 극도로 분노하면서 사직서를 내는 사건이 발생했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1790년의 어느 날 채제공이 지금의 비서격인 권두와 함께 돈의문(서대문)을 지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관순과 김병성이라는 젊은 유생들이 두루마기도 걸치지 않은 채 서로 건방지게 팔짱을 끼고 체재공이 탄 가마 옆에 서서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조선에서는 웃사람앞에서 담배를 피거나 안경을 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로 여겨졌는데 심지어 그 유생들은 옷조차 대충 걸쳐 입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보다 못한 체재공의 권두가 그들에게 얼른 담배를 끄라고 호통을 쳤죠

여기 까지라면 그저 해프닝 정도로 끝날수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김관순이 내뱉은 한 마디가 일을 키우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자면 저 노인네(체재공)가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참견질이냐며 대든 것이었죠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연장자에게 그런 버릇없는 태도를 보인 것만으로도 문제지만 계급으로만 따져봐도 두 유생 중 김병성은 돈령부 참봉인 김세근의 아들이었고 김관순은 동부 봉사 김이의의 아들이었습니다

 

종 8품 종 9품인 말단 관료의 자식들이 권력의 정점인 재상에게 하극상을 벌인 셈이죠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당한 체재공은 너무 어이가 없어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고 옆에 있던 권두가 하인들을 시켜 두 유생을 옥에 가두게 되는데요

비록 그들의 행동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큰 처벌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체제공은 이들을 적당히 꾸짖은 후 다음날 풀어주려 했는데 그날 밤에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3경쯤(밤 11시~새벽 1시)에 성균관 유생이라는 작자들 수십 명이 두 유생이 갇혀있던 옥사 앞에 몰려와 지금 갇혀있는 유생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중부학당의 중요한 인물들이니 당장 대신들에게 전해 이들을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마치 옥사를 때려 부술 듯 과격한 농성을 벌인 것이죠

게다가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지금 옥사를 지키고 있는 관리들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에 전옥서 관리들은 그날의 당직책임자인 입직관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입직관은 이들 두 유생은 체재공께서 직접 체포를 명령했으므로 그분의 허락이 없이는 함부로 그들을 석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죠

하지만 농성을 하던 유생들은 이 사실을 전해 들었음에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서 우리는 그런 것 모르겠으니 그냥 자신의 동기들을 석방시키라고 억지를 쓰며 계속해서 전옥서의 관리들을 협박했다고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유생들이 관리들에게 한 협박의 내용을 들어보면 "너희들을 지금 당장 학궁으로 끌고 가서 때려죽여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여기서 옥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갇힌 사람을 빼내버릴 수도 있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니 얘기만 들어보면 이게 학생인지 깡패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한 말들을 쏟아낸 셈이죠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관리들은 급히 체재공에게 이사실을 보고했고 소식을 듣고 놀란 체재공은 잡혀있던 유생들을 형조로 넘겼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유생들은 체재공을 욕하고 헐뜯는 사발통문(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이름을 적은 문서)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체재공은 처음 생각과 달리 김병성과 김관순을 정식으로 고발해서 엄하게 처벌할 마음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 김병성의 아버지 김세근이 집안의 하인들까지 보는 앞에서 직접 아들의 볼기를 쳐대며 자식의 잘못을 사죄하고 김관순의 할아버지도 체재공에게 손자를 잘못 키워 죄송하다는 편지를 써서 애걸하자 마음이 약해진 체재공도 더 이상 그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죠

 

이렇게 끝났으면 좋겠지만 문제는 난동을 일으킨 유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태가 이지경이 되었음에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체재공이 유생들을 모욕했다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모욕을 할 수는 없다라는 미친 소리가 써져있는 투서를 계속해서 쏟아냈다고 하죠

 

이에 완전히 뚜껑이 열려버린 체재공은 정조와 대신들이 모여있는 조정에서 "대낮에 큰 길가에서 불량한 옷차림으로 담뱃대를 피워 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들에게 벌을 내릴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해도 그저 가만히 참고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소리친 후 자신의 관직을 내던지고 궁을 나가려 했죠

 

깜짝 놀란 정조는 황급히 체재공을 달래고는 전옥서 앞에서 난동을 부린 유생들 중 주동자인 이휘호에게 죽을 때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엄벌을 내렸고 그 외에 난동에 가담한 조학원 윤선양 원재형 등은 이후 10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양반들에게 과거시험이 개인뿐 아니라 그가 소속된 집안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지 생각하면 정조로서는 그들을 매장시켜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엄벌을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꼰대 중 하나였던 정조는 이딴 짓거리에 가담한 놈들은 선비가 아니라며 아예 유학자들의 가계 학통을 기록하는 문서인 유적에서 그들의 이름을 빼버리라고 명했는데요

 

당시에 유적에서 영구히 제명되었다는 소리는 현대로 치면 호적이 말소당한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유적에서 파인 이상 그들은 이제 양반이 아니라고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는 관직에 있는 양반 가문이나 지방에서 세력 있는 사족 가문만이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을 받았는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런 현상이 더 심해졌다는 걸 생각하면 체재공에게 행패를 부린 이 유생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후손까지 영원히 고통받게 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개기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내려주는 참교육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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