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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귀주대첩.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한반도 3대 대첩

by 사탐과탐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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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가 다시는 고려에 침공을 못하도록 제대로 궤멸시켰던 한반도 역사상 3대 대첩 귀주대첩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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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성종 12년인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요나라)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에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이에 대비하게 했죠

 

봉산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장은 고착화 되었고 이에 서희는 거란 진영에 찾아가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강동 6주를 받아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뒤늦게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깨닫고 다시 반환을 요구했지만 고려는 거절하면서 그렇게 오랜기간 거란의 침공을 받게 되죠

 

하지만 끊임없이 침공해오던 거란이 고려에 쌔게 한대 맞고 더이상 고려를 넘보지 못하는 전투가 있었으니 오늘은 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전투는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대첩 이죠

 

강동 6주를 돌려달라는 요구에도 고려가 응하지 않자 거란은 고려를 제대로 침공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1014년 6월, 10월에 고려를 침공해 왔지만 결국 피해만 입고 퇴각했죠

이후에도 계속 사신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거듭된 전투 승리로 자신감이 쌓인 고려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격분한 요나라는 1015년 9월 다시 고려의 통주를 공격했지만 또 다시 실패했고 1017년 5월에도 고려의 흥화진을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큰피해만 입고 후퇴했죠

1018년 10월에도 몇 차례의 고려 공격에 실패하자 극대노한 요 성종은 전면적인 고려 침공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렇게 1018년 12월에 거란의 소배압을 총사령관인 도통으로 삼고 황제 직속 부대인 우피실군을 포함한 10만에 달하는 정예 기병을 끌고 내려오면서 거란의 3차 침공이 시작되었죠

그러자 고려 역시 이에 맞서 서북면 행영도통사 강감찬을 총지휘관인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20만 8천 3백 명의 군사를 준비했습니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는 72세의 고령이었죠

 

강감찬은 거란군이 기병 위주로 이루어져있는걸로 보아 여러 성들을 우회해 수도 개경 함락을 최우선으로 하고 진격할거라 판단했고 성내에서 기병 1만 2천명을 빼내 산중에 매복시키고 소가죽을 엮어 흥화진 동쪽에 있는 삼교천을 틀어 막았죠

거란의 군사들이 흥화진에 도착하자 강감찬의 예상대로 고려의 방어를 우회해 삼교천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고려군은 소가죽으로 막아놓았던 둑을 터트렸고 거란군은 순식간에 불어난 물에 대열이 흐트러지고 혼란해진 거란의 병사를 향해 빼놓았던 1만2천명의 기병으로 돌격해 승리를 거두었죠

이것이 바로 삼교천 전투 였는데요

 

이때는 거란군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것이 목표가 아니라 거란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혼란에 빠트리는것이 목표였습니다

소배압은 이 전투에서 피해를 입긴했지만 기세를 잃지않고 개경을 향해 계속 진격했죠

바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면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강감찬은 이곳 저곳에 별동대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매복을 심어놓아 계속해서 거란군의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치고 빠지는 전술을 썼고 부원수 강민첨을 보내 자주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또다시 격파했으며 거란군의 진로를 평양 근처인 마탄으로 향하도록 유도 했죠

그리고 조원은 마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마탄에서 거란군을 맞이했는데 이때도 1만 가까이 되는 거란군을 무찔렀습니다

 

이런 큰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의 본진은 선봉대의 진로와는 달리 산길을 돌아 개경으로 남하하고 있었죠

이어지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이 개경으로 계속 진군해오자 강감찬은 김종현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밤낮으로 달려 거란군을 견제하면서 개경을 보호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김종현이 이끄는 1만의 병력은 소배압의 군대를 끊임없이 위협했지만 수도 개경의 함락만을 바라보던 소배압은 고려의 수많은 방해를 뚫고 천신만고 끝에 신은현까지 도착하게 되었죠

이때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소배압의 군대가 개경을 향해 다가오자 송악산의 산신이 소나무들로 모습을 바꾸어 거란군이 지나갈때 일제히 사람소리를 내자 거란군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경은 전투를 할수 있는 성이 아니었는데요

또한 병력은 있는대로 긁어모아 올려보냈던 상태라 개경을 방어할 병력도 없었죠

하지만 현종은 두번 도망은 없다고 외치며 들판의 곡식 등 을 제거하고 우물은 메워버리는 청야작전을 펴면서 성밖의 백성들을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게 해 결사항전을 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왕의 이런 모습에 고려 군사들 뿐만아니라 백성들도 감격해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거란군 입장에서는 뒤에서 고려군이 바짝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개경에서는 사기가 충만한채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골때리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소배압은 한가지 책략을 생각해냈는데 어쩔수 없이 퇴각하는 척하고 슬쩍 물러났다가 개경의 방비가 소홀해 졌을때 척후병을 보내 성문을 열어 쳐들어갈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전군 철수를 명령한 소배압은 몰래 척후병 300명만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교역에 대기시켰는데 이 계책 마저 간파한 고려는 100여명의 기병를 보내 거란군 300명을 공격해 사살하게 되었죠

그렇게 이 책략 마저 실패하고 말았고 고려의 청야전술로 인해 보급마저 없었으며 고려 영토 깊숙이 진입한 소배압 군은 아무것도 못한채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1019년 2월, 소배압은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전군 퇴각하기로 결정했죠

거란군은 평양 근처의 고려군을 피해 크게 우회해 연주, 위주에 도착했지만 추격해 온 강감찬의 고려군에 의해 또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고려군은 모든 퇴각로를 틀어막은채 거란군을 귀주로 몰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강감찬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큰 타격을 주기위해 일전을 벌일 생각을 했고 각지에 파견했던 전군을 귀주로 총집결 시켰죠

귀주는 4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 형태 였으며 귀주를 통과하는 길은 좁고 험한 계곡 사이에 있어서 도망가는 적을 몰아넣고 포위한채 섬멸 해버리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거란군은 계속 이어져온 패전으로 지속적은 타격을 입긴 했지만 당시 거란 최고의 장수였던 소배압의 통솔력 덕분에 전투력은 잘 보존되어있었는데요

 

그렇게 강감찬의 고려군과 소배압의 거란군은 귀주의 동쪽 교외에서 맞딱드리게 되었죠

하지만 문제는 총집결 명령을 내렸는데 김종현이 거느리고간 1만의 병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도착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만이나 되는 병력이 빠진채 결전을 해야했던 강감찬은 심리적으로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죠

 

만약 이 결전에서 잘못되면 고려 전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1019년 2월 1일, 거란군 역시 최후의 결전이라 생각한듯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을 보자마자 주저없이 그대로 돌격했습니다

당시 귀주성 앞에는 두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요

 

전략회의 끝에 소배압은 개천을 등뒤에 두는 배수진으로 고려군과 전투를 치르기로 마음먹었죠

배수진을 친 거란군은 2달 가까이 굶주리고 추운 겨울날씨에 지친 상태에서 고려군에 쉴새없이 두들겨 맞았기에 부상병도 많았지만 최정예 병사 답게 고려군에 맞서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느 군이 더 우세한지 알수없는 대혼전이 계속되던 가운데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김종현이 이끌던 1만 병력이 갑자기 거란군 뒤에서 나타났죠

김종현의 군대는 대혼전 상황에 주저없이 돌격해 들어와 거란군을 철저히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그렇게 고려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때마침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고 소나기가 내리면서 고려군의 사기는 더 올라갔으며 이 기세를 몰아 맹렬이 공격해 결국 거란군은 북쪽으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죠

 

퇴각하는 거란군을 집요하게 추격한 고려군에 의해 산과 들에 거란군의 시신이 널려있을 정도였으며 고려가 생포한 포로와 말, 갑옷, 투구 등 전리품은 셀수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10만 거란 병력 중 고작 천여명만 살아남아 요나라로 돌아갔다고 하죠

 

소배압은 갑옷과 무기 등을 버린채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을 쳐 간신히 목숨을 건질수 있었을 정도였고 거란의 유능한 장수들 여럿이 죽었을 만큼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이 귀주에서의 전투를 훗날 우리는 귀주대첩이라고 불렀죠

 

반면 고려 입장에서는 대승중에 대승이었는데 심지어 어찌나 크게 이겼는지, 고려사에 '우리가 거란과 싸운이후 이렇게 거란이 패한적이 없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패전의 소식을 들은 거란 성종은 전쟁의 총사령관이던 소배압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면서 격분했다고 하죠

 

그러나 고려의 왕이던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가 강감찬을 맞이했고 금으로 만든 꽃 8송이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기도 했으며 이 승전 기념으로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바꾸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이후 120여년간의 전성기를 맞이 할수있었고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이상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고 하죠

그리고 이 귀주대첩은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거란을 처참하게 응징했던 귀주대첩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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