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이 많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이 우리에게 빼앗아갔던 여러가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592년 5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20만명이 넘는 왜군은 부산포를 순식간에 함락시켰고 파죽지세로 서울과 평양까지 몰아부쳤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양 점령 보고를 받자 중국 정벌의 꿈에 부풀어 곧바로 부하 장수들에게 중국 정복 이후의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 계획은 바로 "천황을 베이징으로 보내 천황의 직할지를 만드는것, 조선의 왕은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은 황족들이 다스린다
일본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임진왜란때 공을 세웠던 영주들에게는 보상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막대한 땅을 하사한다
자신은 중국 닝보로 가서 인도를 정복하기 위한 준비에 나선다" 였습니다
애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계획은 조선과 명나라에 그치지 않고 당시 세계의 끝이라 생각했던 인도까지 점령하려고 한 것이었죠
하지만 얼마안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조선수군이 바다에서 연승을 거두기 시작했고 조선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전쟁의 판도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수로를 통한 보급로가 막혀 빠른 조선 정복을 실패하고 말았고 심지어 명나라가 10만의 지원군까지 보내줘 이제 일본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되면서 전쟁도 교착상태에 빠졌죠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굉장히 잔인한 짓까지 감행하고 마는데요
바로 조선인을 죽인 숫자에 따라 포상을 준다고 선언했던 것이죠
이에 왜군은 처음엔 머리를 베어갔지만 머리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머리 대신에 귀를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양쪽 귀를 잘라 자신의 전과를 두배로 부풀리는 일이 벌어지자 그 후부터는 코를 베어오라고 지시했죠
그러자 왜군은 눈에 불을켜고 조선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목숨을 빼앗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전사한 왜군의 코마저 베어갔습니다
이렇게 모은 코는 소금을 담은 독에 실려 교토로 보내졌죠
이렇게 모인 코는 훗날 무덤을 만들어 한군데에 묻었는데 이 귀무덤과 코무덤은 현재까지도 일본 곳곳에 남아있으며 이곳에 묻힌 코와 귀만해도 적게는 3만개에서 많게는 10만여개나 된다고 합니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상보다 전쟁이 길어지자 전쟁에서 얻는것보다 잃는게 더 많아지기 시작했고 전쟁 자금마저 부족해지기 시작했는데요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하들에게 조선인들을 잡아 오라고 명령해 잡아온 조선인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인에게 팔아 넘겨버렸죠
왜군은 조선인 납치가 돈벌이가 더 잘된다는걸 알게 되면서 화승총과 비단 등 돈을 벌기위해 조선인들을 무작위로 잡아다 팔았습니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인만 약 10만여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다시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죠
훗날 왜군이 철수할때는 더욱더 처참한 일이 벌어지는데요
그들이 퇴각하며 지나가는곳마다 눈에 보이는 조선인들은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죽임당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일본에 끌려가 노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당한 처참한 일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요

조정의 <임란일기>에는'왜군들은 인가의 재물을 다 거두고나서 불을 질렀고 사로잡은 여인에게 왜군들이 몹쓸짓을 하는 꼴이 마치 개와 같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고
이탁영의 <정만록>에는 '왜군이 여자 하나를 잡으면 30~40여명이 몹쓸짓을 저질렀고 장독에다 방뇨하여 사람에게 먹도록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강항이라는 사람은 왜적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갈때 조카가 죽임을 당하게 된 내용을 기록해 놓기도 했죠
조카의 나이는 여덟살이었는데 며칠간 밥도 못먹고 목도 말라서 짠 바닷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카는 구토에 설사를 하면서 병이 나고 말았는데 이에 왜군은 조카를 바다에 던져버렸고 아버지를 부르는 조카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들려왔다고 하죠
거기다가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조선보다 문화적인면에서 굉장히 뒤떨어져 있었는데요
그들은 조선의 문화마저 약탈해갔죠
당시 일본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굉장히 뒤떨어져있었기에 일본산 도자기의 질은 형편없었고 그러다보니 그들은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엔 조선을 능가할 만한 도자기 제조국으로 급성장 해버렸죠
그렇게 급성장한 이유는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들을 모조리 일본으로 끌고가 기술을 빼앗아버린것입니다
당시 끌려간 조선인 도자기 기술자 중 이삼평이라는 사람은 '아리타 자기'의 모태가 된 백자 자기를 만든 인물이죠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라는 왜군 장수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고 끌려간 이후 일본에서 자기의 원료인 고령토를 찾아내 가마를 지어 첫 백자를 구웠습니다

이것이 아리타 자기의 시작이라고 하죠
그리고 쭉 일본에서 살다가 165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이삼평이 정착해서 살던 아리타에서는 지금도 수천톤의 흙을 파내어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명품 도자기의 생산지로 전세계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의 학문 역시 허접했지만 조선의 성리학이 전해지면서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성리학이 일본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면서 에도 막부 시대에 문화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죠
이런식으로 죽임당하거나 끌려가거나 팔려간 조선인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보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조선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약 7년여의 전쟁기간 동안 농사도 제대로 지을수 없었기 때문에 농사 지을 땅마저 황폐화 되면서 왜란 전까지만 해도 170만 결이던 경지 면적이 전쟁 후에는 54만 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죠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된 가뭄과 호란, 그리고 경신대기근 등 천재지변까지 겹쳐 나라 전체가 피폐해져갔고 영조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임진왜란 전의 경제 규모로 회복할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까지 3개의 궁궐이 불살라졌으며 고려실록 또한 소실되었고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들이 약탈되거나 파손되고 말았죠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이 패하여 철수 했으니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볼수 있겠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것은 조선이었습니다
확실한건 전쟁이 일어났을때 가장 피해를 많이 받는건 노인들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인것 같네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벌어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성들의 피해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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