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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순헌황귀비. 엄귀비라 불리던 영친왕의 친모이자 고종의 마지막 여인

by 사탐과탐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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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귀비라 불리던 영친왕의 친모이자 고종의 마지막 여인 순헌황귀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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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거 아시나요?

현재 인터넷에 떠도는 명성황후의 사진은 다 추정일 뿐 실제 명성황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사에 따르면 명성황후와 너무 똑같이 닮아서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한 여인이 있죠

 

그녀의 실제 모습을 보면 그렇게 미인이라 할수는 없을것 같지만 당시 고종을 모시던 정환덕이라는 인물에 말에 의하면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듯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바로 엄귀비라 불렸던 순헌황귀비 이죠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크게 상심하고 있던 고종을 바로 곁에서 위로해준 여인이죠

오늘은 이 순헌황귀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녀는 1854년에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워낙 가난하게 지내다보니 어쩔수없이 5살의 어린나이에 궁녀가 되어 궁에 입궐하게 되었죠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상궁이 되었고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이 되었습니다 

엄상궁이 나이도 많은데다가 용모도 아름답지 않아서 고종의 승은을 입을 일이 없을거라 생각한 명성황후는 그녀를 많이 아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던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모래와 쌀겨가 섞인 불량쌀로 지급해 일으킨 난인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피난을 갔었는데 그때 엄상궁은 지극정성으로 고종을 보살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지밀상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85년, 32살의 나이로 마침내 엄상궁은 고종의 눈에들어 승은을 입게 되었죠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된 명성황후는 질투에 사로잡혀 상궁 직책을 박탈하고 그녀를 궁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궁에서 쫓겨난 엄씨는 그렇게 오랜기간동안 혼자 쓸쓸히 지내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날 엄씨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난것이죠

이에 고종은 자신도 일본에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고 자신을 돌봐줄 여성으로 엄씨를 다시 궁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게 궁으로 돌아올수 있었던 엄씨는 이완용 등과 함께 모의해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안전하게 도피시키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죠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의 숙식을 전담하며 그를 열심히 보좌했고 고종 역시 그녀에게 정신적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으며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엄씨는 결국 고종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었죠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몸을 피하고 1년이지났을 무렵 독립협회가 전개한 환궁운동 덕분에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8일뒤인 10월 20일, 그녀는 44세의 나이로 아들 이은(영친왕)을 낳게 되었죠

야사에 따르면 그녀는 당시로써는 너무나도 노산이라 무사히 아들을 낳기위해 북한산에 산신각까지 짓고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내를 낳은 공으로 그녀는 엄귀인으로 책봉되었고 1900년에는 순빈, 다음해에는 순비로 봉해졌죠

그리고 당시 명성황후 다음 황후가 정해지지 않아서 그녀는 사실상 고종의 왕비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사실 그녀를 황후로 삼고 싶었는데 엄귀인의 신분이 천한 일개 궁녀 신분이었고 과거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절대로 왕비가 될수 없다는 법도'가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결국엔 왕비가 되지 못했죠

그리고 이때 왕위 계승에 가까웠던 순종의 동생 이준용도 그녀가 왕비가 되는데 크게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결국 그녀는 황후의 바로 아래이자 후궁중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인 황귀비라는 직책을 받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엄귀인은 실질적으로 황후의 대우를 받았으며 복색도 황후의 복색을 갖췄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치뤄진 이후에도 고종은 황후의 자리를 비워두었고 이후 황태자였던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났을때도 아버지 고종보다 먼저 새로운 태자비를 맞이했죠

어쨌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바로 한반도 침략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데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완용은 고종을 찾아가 퇴위를 강요했고 결국에는 고종과 순종도 없는데 내시를 꼭두각시로 세워 황위를 교체해버렸죠

그렇게 고종은 강제 퇴위 당하고 순종이 황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순종에게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병약했기 때문에 엄귀비는 자신의 아들 영친왕을 대한제국 황태자로 올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의친왕은 반발하면서 엄귀인과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죠

당시 후계자 1순위는 의친왕이었지만 그는 1902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때문에 고종의 눈밖에 나있던 상태였는데요

일심회사건 이란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 일부가 고종을 쫓아내고 의친왕을 황제로 옹립시키하려는 정변이었죠

 

그러나 당시 의친왕은 미국 유학중이라 관련이 없었지만 고종은 이후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후 의친왕이 유학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도쿄에 왔을 때 고종이 들어오지 말라고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다시 귀국하려 할때는 엄귀비가 신하를 보내 의친왕에게 막대한 돈을 주며 돌아오지 말라고 압박을 하기도 했죠

 

그러다 결국 다음 황태자는 영친왕이 되었습니다

사실 순종의 후사를 잇는거라서 황태제가 되어야 하는데요

굳이 황태자로 책봉했던 이유는 제위에서 강제로 물러났지만 사실상 황제는 자신이라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던 것이죠

그렇게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드는것에 성공했지만 그녀는 앞으로 죽을때까지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하는 비극적인 이별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신학문을 가르쳐야 한다는 명분으로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데리고 가버렸던 것이죠

다음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유학을 가라고하자 데리고 가지 못하도록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엄귀비는 격하게 반발했지만 자신의 아들을 보호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과 강제로 헤어지게 되었고 평생 영친왕을 그리워하며 애통해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그녀는 일본에 대항을 하려면 어릴적부터 교육을 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배움의 기회가 거의 없었던 여성들을 위한 여학교를 만들었습니다

1905년에는 '양정의숙'(現 양정고등학교)을 그리고 1906년에는 현재 진명 여자고등학교인 '진명여학교'와 숙명 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세웠죠

또한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시켜 교육을 받게 했으며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걸인들을 돕기도 하는 등 많은 사회활동과 자선사업을 하기도 했죠

 

그러던 어느날 아들 영친왕이 일본의 사관학교에서 철저하게 일본식 교육을 받고 강도높은 훈련을 받으며,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모습의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보고 울면서 비통해 하다가 급체를 하기도 했다고 하죠

게다가 유학갔다는 아들이 단한번도 귀국하지 못하고 얼굴도 보기 힘들자 당시 통감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에게 일본 학교엔 방학도 없냐, 아들이 북해도로 여행을 갔다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것이 인지상정 아니냐며 격하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는 경술국치를 맞게 되고 그로부터 약 1년후인 1911년 7월 20일에 덕수궁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57세의 나이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릴적 아들이 일본에 끌려간 이후 단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일본에서 급히 귀국했지만 장티푸스가 전염될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시신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격변의 시기에 태어나 궁녀에서 황귀비 자리에까지 오르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 자리에까지 앉혔지만 결국 남편의 강제 폐위와 아들이 일본에 끌려가는걸 지켜만 보고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채 쓸쓸히 죽음을 맞은 비운의 여인 순헌황귀비, 엄귀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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