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된 이후 새로운 수도인 한양을 기획 사람은 정도전이었지만 실제로 한양을 건설했던 사람은 노비 출신 건축가였던 박자청이었습니다
500년 넘는 역사를 이어간 조선왕조의 토대를 만든 것이 정도전이라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런데 건국 초기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기획을 맡았던 것은 정도전이지만 그 공사를 완성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바로 태종 이방원과 세종에게 총애를 듬뿍 받았던 노비 출신 건축가 박자청입니다
당시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한양을 통째로 새로 지어야 했는데 그때 그 일을 모두 맡아서 한 사람이 바로 박자청이라고 하죠
박자청은 고려말의 무신이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황희석의 하인 출신이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기 전 그는 궁궐에서 낭장이라는 정 6품의 무관직을 맡고 있었는데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그의 주인인 황희석이 개국공신으로 임명되자 박자청도 덩달아 장군을 보좌하는 중랑장자리에 오르게 되죠
역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맥만큼 무서운 게 없네요
그러던 1393년 박자청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궁궐 대문을 지키는 당번이 된 박자청이 임무를 수행하던 중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이 궁궐 대문을 지나가려 했죠
하지만 박자청은 원리원칙대로 왕명 없이는 누구도 통과할 수 없다며 그의 앞을 막아섰는데요
이 의안대군은 이방원에게 정몽주의 척살을 부추긴 인물이었는데 조선의 개국 공신인 그를 하급 무관이 막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자청이 자신을 막자 화가 난 의안대군은 그 자리에서 그를 마구 두들겨 패 버렸죠
폭행을 당한 박자청은 얼굴에 상처까지 입게 됐지만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았습니다
개념 없는 의안대군은 그 길로 태조를 찾아가 박자청을 처벌할 것을 청했지만 태조는 오히려 의안대군을 크게 나무랐고 박자청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표한 후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하며 궁내부를 지키는 내상직으로 임명했죠
이후 박자청은 원리원칙을 계속 지키며 국왕에게는 우직할 정도의 충성심을 보였고 내상직에 있을 때의 근무자세마저 좋다고 평가받으면서 이성계의 고향인 동북면을 지키는 호익사대장군의 직책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태종 이방원의 눈에 띄면서 지금의 국토 교통부 장관에 해당하는 공조전서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그가 갖고 있던 토목건축 분야에 대한 능력이 빛을 보기 시작했죠
그는 각종 건축물의 보수 공사를 시작으로 태조의 첫 번째 왕비인 신의 고황후 한 씨의 묘인 제릉과 태조 이성계의 묘인 건원릉의 공사 감독, 한양의 도성을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하는 대규모의 수축 공사, 청계천 조성, 창덕궁 건설, 성균관 문묘 건설, 경복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경회루 건설 등의 임무를 완수해냈습니다
특히 성균관의 문묘는 겨우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완공시켰으며 연못과 3층 건물이 같이 있는 경회루도 8개월 만에 완공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죠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경회루는 박자청의 놀라운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걸작입니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연못 전체를 돌도록 되어 있고 연못의 바닥이 약간 기울어져 있어 늘 연못이 맑고 잔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죠
건설 당시 이 경회루의 연못은 바닥에서 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바닥 곳곳으로 물이 새어 나가는 곳이 있어 연못이 가득 차지는 않는 상태였는데요
이를 본 박자청은 아예 연못의 물을 모두 빼 버린 후 바닥의 물이 새어 나가는 곳을 검은 진흙으로 메꿔버렸고 그 후부터는 연못에 물이 가득 고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1420년 7월 원경왕후 민 씨의 국장 때 마전 나루터에 부교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는데 처음에는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부교 덕분에 국장 행렬이 마치 평지를 걷는 듯 무사히 강을 건너자 모두가 그를 칭찬했죠
후일 정조가 화성 행차를 위해 한강에 배다리 즉 부교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도 박자청이 마전 나루터에 부교를 설치한 사례를 본뜬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박자청은 그 외에도 경복궁 남쪽에서 종묘까지 이어지는 행랑을 건설하고 동대문 밖에 말을 기르는 목장인 마장을 만들었으며 수강궁, 임금이 머무르는 태평관의 어실, 살꽂이 다리, 연희궁 등을 건설했습니다
정도전을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기획한 설계자라고 한다면 박자청은 서울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 낸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셈이죠
여러 공사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박자청은 1415년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판한성부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뛰어난 건축 능력 탓에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듬뿍 받은 박자청이지만 원리원칙만을 중시하는 성격 탓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는데요
세종 1년인 1419년 상왕이었던 태종은 박자청에게 창덕궁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지시했지만 박자청은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던 것이죠
박자청이 자신의 명을 어기자 화가 난 태종은 박자청이 측량을 게을리했다는 핑계를 대며 그를 하옥시킨 후 그가 짓고 있던 건물을 부숴버리라 명했고 그곳에는 그저 담만 쌓게 만들었습니다
충성심이 강한 박자청이지만 건축에 있어서만큼은 왕과 대립할 정도로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네요
노비 출신인 박자청은 그를 시기하는 양반들 때문에 많은 모함을 당했지만 태종과 세종은 오히려 박자청을 감싸주고 믿어주며 큰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박자청은 세종 5년인 1423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죠
박자청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세종은 사흘간 조회를 중지시켰으며 종이 100권과 손수 지은 제문을 내려 나라에서 직접 장사를 지내게 해 주었고 그에게 익위라는 시호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정리해보자면 박자청의 시작은 하인에 불과했지만 그는 좋은 인맥과 뛰어난 능력 덕분에
지금의 장관과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당시 신생국가였던 조선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새로 지을 건물이 많았던 상황에서 뛰어난 건축 능력과 빠릿빠릿한 현장감독 능력을 보여주며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받은 것이죠
하지만 그에게도 커다란 결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인성이었습니다
하루는 박자청이 공사현장에 있을 때 이중위라는 하급관리가 자기 앞으로 말을 타고 지나갔는데 이를 본 박자청은 이중위가 건방지다며 그를 멈춰 세우고 마구 두들겨 팼다고 하죠
아무리 자신보다 품계가 낮은 사람이지만 그저 건방지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주먹질을 하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두들겨 맞은 이중위가 고발을 하면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간관들은 박자청을 처벌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지만 태종이 끈질기게 그를 보호하면서 겨우 관직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하죠
실록에도 박자청은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없다고 기록돼있다고 하니 평소 그의 성격이 어땠을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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