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두 임금의 선택. 조선 선조와 고려 현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죠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180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한반도 역사 속의 왕들 중 외세의 침입을 받은 상황에서 각각 다른 선택을 하면서 현재까지도 정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는 고려의 명군 현종과 조선의 암군 선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현종과 선조 두 사람은 성장과정을 비롯해 왕으로 즉위한 상황까지 꽤나 비슷하죠
현종은 정식혼을 거친 부부도 아닌 사통으로 태어난 고려 왕실의 불결한 사생아였으며 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된 과정도 합법적인 절차가 아닌 강조의 군부 쿠데타로 옹립된 탓에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선조는 중종의 대군도 아닌 후궁 태생 왕자인 덕흥군의 아들로 태어난 방계 왕족이었지만 명종이 직접 왕위 계승을 인정했기에 현종보다는 그래도 조금 나은 상황이었죠
이들은 처음으로 외세의 침략을 겪었을 때의 대처 또한 비슷했습니다
현종은 2차 여요전쟁이 일어나자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선조는 임진왜란 때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했죠
당시 고려는 건국 초부터 이어져온 호족 연합체 성격이 남아있었기에 현종은 왕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정치적으로 무시를 받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몸과 마음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이 어가 행렬을 따라 피난하는 걸 막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반대로 선조는 백성들이 왕의 몽진(왕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남)을 돕는 등 협조적인 분위기였음에도 자신을 믿고 모여든 백성들을 버려둔 채 도망가버렸고 몽진에 성공한 이후에는 아예 백성들의 피난을 막아버리는등의 만행을 저질렀죠
현종은 몽진을 떠나기 전이나 후에도 직접 완산주와 무진주, 나주지역을 순시하며 비록 자신이 피난 중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불안한 민심을 직접 안정시키려고 노력한 반면 선조는 아들인 광해군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의주까지 도망간 걸로도 모자라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아예 명나라로 넘어갈 마음을 품었는데 그나마 신하들이 결사적으로 말리는 바람에 겨우 선조의 빤스런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실록을 보면 선조는 자신의 도망 소식을 듣고 찾아온 왕실의 종친들에게 자신은 여기서 뼈를 묻을 것이라며 거짓말을 하고는 몇 시간 후에 도망을 갔다던가 자기만 강을 건너고는 배를 가라앉혀 신하들을 버린다든가 하는 등의 추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다고 하죠
현종은 비록 2차 여요 전쟁에서는 몽진을 가야 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3차 여요 전쟁 때는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거란의 장수 소배압은 어떻게든 현종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리를 하면서까지 급히 개경으로 달려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이었죠
송악산 산성은 2차 침공 이후에 거란의 침입을 대비해 만든 요새였습니다
그리고 현종은 개경 주변의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청야 전술을 펼치며 거란군이 먹을 식량을 남겨두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고 먹을 것이 떨어진 소배압의 요나라군은 결국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죠
그에 비해 선조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이순신을 파직시켜 버린 후 무능한 원균을 그 자리에 앉혔고 그 결과는 칠천량 해전의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선조는 끝까지 "이는 나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이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죠
현종과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보여준 모습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현종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잊지 않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줬는데요
그는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을 위해 직접 영파역까지 마중 나가서 꽃가지가 장식된 금비녀를 꽂아주면서 그의 공을 인정해줬죠
그리고 목숨을 걸고 고려를 지켜낸 양규와 김숙흥을 삼한벽상공신에 봉했으며 그 외에도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했거나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이들에게는 직접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고 전쟁으로 인해 굶주린 백성들에게 각종 생필품을 지급했는데 그중에서도 7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토지를 지급하고 세금까지 면제해줬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현종은 전쟁으로 인해 생긴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죠
반면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이번 왜란에 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으며 조선의 장수들은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운 좋게 패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적진을 함락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가 바다에서 적들을 섬멸했고 권율이 행주에서 승리를 거두며 약간의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가장 큰 공을 세운 중국의 군대가 조선으로 파병을 오게 된 이유는 나를 호종한 여러 신하가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위해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왜적을 토벌하고 조선의 영토를 다시 되찾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걸고 왜적과 싸운 장수들의 공을 깎아내렸습니다
심지어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장들이 근거 없이 역모 혐의에 엮이게 된 것을 알면서도 이를 모른척하기도 했죠
이렇게 엇갈린 선택을 한 두 왕을 향한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극과 극입니다
현종은 개인에게 닥친 시련과 국가적인 재난들을 모두 극복해내며 고려 왕조의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한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 반면 선조는 군주로서의 자질은 어느 정도 뛰어났을지 모르나 기본적인 책임감이라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리석은 리더라고 평가받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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