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홍어 장수였던 문순득은 조선 최초로 필리핀과 마카오를 다녀 왔으며 류큐어, 필리핀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필리핀 통역사로 벼슬까지 얻게 된 문순득의 일대기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필리핀과 마카오 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알려진 문순득이라는 인물입니다
문순득은 조선 후기 전라도 신안군의 작은 섬인 우이도에 살고 있던 평범한 홍어 장수였죠
그러던 1801년 12월 24살이 된 문순득과 그의 일행은 홍어를 사러 흑산도 근처 태사도에 갔다가 우이도로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요
열흘 넘게 바다에서 표류를 하던 그들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며 조선땅이 아닌 것으로 짐작되는 이름 모를 섬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바로 지금의 오키나와 지역인 류큐국의 대도라는 곳이었죠
다행히 류큐인들은 조선인들을 따뜻하게 잘 대해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이틀에 한 번씩은 돼지고기까지 제공받았으며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주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8개월 동안 류큐국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류큐어를 어느 정도 배운 후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죠
그것은 바로 중국으로 가는 류큐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청나라 푸저우에 도착한 후 육로로 북경까지 가면 정기적으로 북경에 오는 조선 사신단을 통해 조선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02년 10월 그들은 류큐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싣게 되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완벽했고 모두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배에 조선판 로빈슨 크루소라도 타고 있었는지 그들은 또다시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렇게 남쪽으로 계속 흘러간 끝에 그들은 루손섬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죠
루손섬은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가장 중요한 섬으로 그 당시에는 여송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루손섬 일대를 헤매고 다니던 문순득은 한참 후에 푸젠성 출신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화교 마을에 도착했죠
그제야 겨우 배에서 내린 문순득 일행은 9개월을 그곳에 머물며 마을 곳곳을 구경했으며 문순득은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파블로 대성당의 성당과 종탑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네요
주민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류큐와 달리 필리핀에서는 혼자 먹고 살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문순득은 끈을 꼬아 팔거나 소주 상인들의 쌀 거래를 도와주면서 번 돈으로 먹고 살 음식과 술 담배 등을 샀다고 합니다
문순득은 일을 하는 틈틈이 주변에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관광을 하러 돌아다니거나 그곳에서 인기가 많은 투계(닭싸움) 구경도 하고 현지 성당에도 방문하는 등 나름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다고 하죠
1803년 8월이 되자 문순득은 필리핀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 타고 중국의 마카오로 이동하게 됩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풍랑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한 문순득은 그때부터는 육로를 통해 중국 대륙을 종단해서 북경까지 올라갔죠
1804년 조선의 사신들과 함께 조선 한양으로 돌아온 문순득은 1805년 1월 약 3년여 만에 자신의 고향 우이도로 돌아오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당연히 문순득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죠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다시 홍어장수 일을 시작했고 홍어를 사러 흑산도에 들렀다가 당시 흑산도에 유배와 있었던 정약전을 만나게 됩니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자신이 표류하게 된 썰을 풀었고 그 썰을 들은 정약전은 문순득의 표류기가 너무나 재밌었는지 그 내용을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 책이 바로 '표해시말'이죠
정약전이 쓴 표해시말은 1979년 연구를 위해 우이도를 찾은 최덕원 전 순천대 교수가 문순득의 후손인 문채옥 씨 집에 있던 고서 더미를 뒤지다가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에는 당시 류큐와 필리핀, 중국의 여러 모습뿐만 아니라 문순득이 배운 류큐어, 여송어에 쓰이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네요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으며 여송국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 들은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하게 되기도 합니다
표해시말을 집필한 이후 문순득은 정약전과 서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죠
문순득은 자신보다 19살이나 많은 정약전을 마치 자신의 아버지처럼 모셨고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에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습니다
형인 정약전을 통해 평소 문순득이 한 고마운 행동들을 알고 있던 정약용 또한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는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정약전이 사망한 후에는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러준 것을 감사하는 편지도 보냈다고 하죠
문순득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순조 1년인 1801년 8월 제주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5명의 외국인이 표류 끝에 도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 보낸 이들은 그 외국인들과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 되었죠
고민 끝에 조선 조정에서는 그 외국인들을 북경으로 보냈는데 청나라에서는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며 그들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 이 표류인들은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속절없이 제주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문순득이 이들을 만나보고는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죠
순조실록에 따르면 유창한 필리핀어로 말을 하는 문순득을 본 필리핀 사람들은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다고 감격에 겨워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필리핀 통역사 역할을 한 문순득은 그 공로로 무려 종 2품이나 되는 가선대부 품계를 받게 되는데요
비록 명예직이긴 하지만 평범한 시골의 홍어장수가 고위직인 당상관의 벼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박연이나 하멜의 경우를 보면 보통 표류하다가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진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이는 요즘 시대의 외국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 또한 9년이라는 세월을 조선에서 보냈지만 제대로 된 말을 배우지 못해 자신들의 나라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문순득은 고작 3년 만에 류큐어와 필리핀어를 능숙하게 배웠던 것이죠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필리핀어 통역을 할 정도로 숙달된 실력이었다는 걸 보면 가히 외국어 마스터의 달인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던 재능의 소유자였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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