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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의친왕. 일제에 끌려다녔던 황족들과는 다르게 철저히 일제를 배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대한제국 황족

by 사탐과탐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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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끌려다녔던 황족들과는 다르게 철저히 일제를 배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대한제국 황족 의친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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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를 거친 대부분의 대한제국 황족들은 제대로 된 반항 한번 못하고 일제가 시키는대로 이리 저리 끌려다녔는데요

당시 핍박받던 백성들과는 다르게 일제에게 많은 돈을 받으며 잘먹고 잘살았다는 이유로 많은 욕을 먹기도 했죠

그런데 황족이었지만 일본에 대항하고 일제을 거부했으며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을 하려고 까지 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 그리고 영친왕의 이복형인 의친왕 이강 이죠

오늘은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 했던 의친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1877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죠

어머니였던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 궐밖으로 쫓겨나버리고 말았지만 그는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고 자랐습니다

훗날 어머니 귀인 장씨는 다시 귀인으로 추증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의친왕은 훗날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1894년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고 이듬해에는 6개국 특파대사가 되어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으로 방문하려고 했는데 당시 적모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아버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속에 결국 유럽에는 가지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1899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와 로노크 대학교 등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는데 이때 우사 김규식을 만나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죠

그리고 김규식을 통해 당시 LA에 있던 도산 안창호와도 교류하며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해 자금을 내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1900년 8월에 그는 비로소 의친왕(義親王)으로 승격하게 되었죠

 

의친왕은 쿨하고 방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있는데요

그가 미국에서 유학중일때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고 하죠

또한 파티장에서 권총을 빼들고 샹들리에에 있는 등불을 쏘며 쇼를 벌인 일도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지나가는 여자들을 감상하는걸 즐겨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방탕한척 하고 광인인척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것이 위장이든 아니든 그는 실제로도 여자를 좋아했는지 여러 첩을 두고 자식들도 많이 낳았는데 그의 자식은 총 12남 9녀에 달했다고 하죠

한편 의친왕이 미국에 있을때 한국에서는 그가 연루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본에 유학간 학생들 중 일부가 고종을 양위시키고 의친왕을 황제로 추대하려던 역모사건이죠

하지만 결국 전모가 밝혀져 이 역모는 실패 했지만 이 사건 이후로 고종은 아들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1905년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도쿄로 왔지만 고종의 명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의친왕이 다시 귀국하기 위해 도쿄로 돌아왔을땐 영친왕의 친모인 엄귀비가 그에게 돈 300만원을 주며 돌아오지 말라고 했지만 의친왕은 결국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엄귀비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는데요

결국 1907년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이 다음 황제로 즉위했죠

 

당시 순종의 다음 서열은 다름아닌 의친왕이었지만 고종은 순종의 황태자를 영친왕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과거에 있었던 역모사건도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자신의 친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한 엄귀비의 견제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이완용의 모략으로 인해 의친왕이 황태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죠

시간이 흘러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친왕에서 공(公)으로 강등당해 이강 공이 되었습니다

 

의친왕은 이후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주색에 빠져 폐인이 된 사람처럼 하고 다녔으며 비밀리에 독립 운동가들과 접촉해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죠

1911년에는 도쿄에서 친분을 맺었던 손병희와 극비리에 만나 땅 3만평을 매입했고 그곳에 봉황각을 세웠는데 이 봉황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모의를 하기도 했으며 3.1 운동을 구상 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죠

 

하지만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의친왕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최진동 장군과 연락을 주고 받을때 "3.1 운동을 통해,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의친왕은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사들과도 은밀히 연락하며 지냈는데요

만약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도 일개 신민이 되어 황족으로써의 예우를 버리고 망명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던 것이죠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은 드디어 세를 규합해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당시 상해 임시정부 내무 총장 안창호는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하기에 이르렀죠

의친왕은 내부적으로는 구심점 역할을 해주고 그로 인해 독립운동이 더욱 활성화 될것이며 외부적으로는 독립의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한국인들 뿐만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을 크게 높일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이 계획이 만약 성공한다면 '한국인들이 온 마음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의 주장을 대한제국 황족의 입을 통해서 정면으로 반박할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의친왕은 상해 임시정부에 '나는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알리고 더 나아가 나 또한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라는 편지를 보낸뒤 상해로 망명을 하기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는 독립대동단의 전협과 최익환, 나창헌 등의 도움을 받아 1919년 11월 9일 밤, 변장을 한뒤 자신의 거처를 탈출 했습니다

 

하지만 궁의 후문을 감시하던 리와라는 일본군이 어둠을 틈타 의친왕과 비슷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급히 시내로 빠져나가는걸 보고 이들 뒤를 쫓았던것이죠

하지만 결국 이들을 놓친 리와는 즉시 자신의 상관에게 이를 보고했고 이 사실을 확인 하기위해 궁내 사무관으로 있었던 구로사와가 결재를 핑계로 의친왕의 처소로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거처를 지키던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하자 그냥 막무가내로 의친왕의 처소로 들어갔는데 역시 이미 의친왕은 밖으로 탈출한 뒤였죠

일본은 급하게 의친왕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의친왕 일행은 고종이 남겼던 150만원 상당의 채권을 전달받은 뒤 만주로 향하고 있었죠

 

그러나 결국 만주 안동에서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무관에게 붙잡히게 되어 다시 경성으로 송환 되었고 그렇게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여행의 자유를 박탈 당하게 되면서 사실상 황족들은 강제 연금당하고 말았죠

그리고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에는 일제의 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감시했으며 의친왕의 처소에는 유리창을 달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또한 일제는 그의 망명사실을 조작하기도 했는데요

황족 중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신망을 받고 있던 그가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엄청난 여파를 불러올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의친왕이 자의로 탈출 하려던것이 아니고 돈이 필요했던 의친왕에게 어떤 사람이 3만원을 빌려준다고 해 그 꼬임에 넘어가 궁을 몰래 빠져나갔다가 괴한들에게 납치 된것이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했던 것이죠

 

하지만 당시 의친왕의 행적들을 보면 일제가 주장한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 이후 일제는 의친왕에게 계속해서 일본으로 건너와 살면 후하게 대해 주겠다고 강요 했지만 그는 끝까지 거절했으며 일본을 배척하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죠

또한 그는 이 일로 재판에 회부까지 되었는데요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그는 일제가 대우해야하는 특권 계급이었기 때문에 사법적 제재를 가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그에게 부여되어 있던 공의 작위를 박탈했으며 그의 작위와 전재산은 장남이던 이건에게 돌아갔죠

사실 이는 확실치가 않은데 일제에 의해 작위가 박탈당한 것이라는 주장과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의친왕 스스로가 물러난 것이라는 주장이 있긴 합니다

어쨌든 일제에 의해 작위가 박탈 당하긴 한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의친왕은 장남 이건과 사이가 나빴다고 하는데요

술을 마시면 이건에게 일본에 가서 살아라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또한 둘째아들 이우가 귀국할때는 경성역까지 마중나갔던 반면 이건이 귀국할때는 일부러 바쁜척하며 피하는 등 노골적으로 차별을 했다고 하죠

일제에 부정적이었던 이우는 총애 했지만 친일을 했던 이건은 못미더워 했던 것입니다

 

의친왕은 망명에 실패한 이후 술과 여자에 빠진척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살았는데 실제로 그는 실의에 빠져 집에서 자주 술을 먹기도 했다고 하죠

1940년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할때도 그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45년 8월 광복을 하자 김구,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를 찾아오기도 했죠

 

그리고 딱히 정치적으로 엮이지 않고 일반인으로써 말년을 보냈지만 황족 재산이 국유화 되고 대한제국 황족들을 철저히 배척하던 이승만 정권의 정책으로 인해 꽤나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때는 피죽도 겨우 먹는 매우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70여살의 늙은 몸을 이끌고 부산까지 피난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끼니를 제대로 떼우지 못해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에 시달리기까지했죠

 

그러다 휴전 협정을 맺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사동궁 별궁에 거주 했는데요

1955년 8월, 영양실조의 후유증과 여러 합병증에 노환까지 겹쳐 7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 백성들에게 칭송받던 그의 인기가 무색할 정도로 '이강이 졸했다' 라는 매우 짧은 기사만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려 있었다고 하죠

 

또한 의친왕은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았는데요

그의 다섯째 딸 이해경은 아버지 의친왕의 복권 운동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 의친왕이 임시정부와 대동단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는 점 등이 밝혀지면서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일제에 의해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할때 황족으로써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의친왕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지네요

 

대한제국의 황족이면서 독립운동가이던 의친왕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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