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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조병갑. 조선 후기 탐관오리의 대명사 이자 동학농민운동의 불씨를 당긴 악당

by 사탐과탐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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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은 조선 후기 탐관오리의 대명사 이자 동학 농민운동의 시작점이 된 고부 민란 당시 고부의 군수였습니다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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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는 왕권도 굉장히 약했던 데다가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다 못해 말도 못할정도였죠

오죽하면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나뭇가지 하나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라고 하면서 "굶주린 호랑이와 독수리같이 굉장히 사납게 농민들을 등쳐먹고 빼앗고 있다" 라며 조선의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삼정의 문란이라고 해서 이해할 수 없고 어처구니 없는 명목으로 높은 관직의 관리부터 하급관리까지 거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도 조선 후기의 악명높은 탐관오리 인데요

 

당시엔 차고 넘치는게 백성들을 착취하던 탐관오리들 이었지만 오늘 이야기 할 인물이 중요하고 유명한 이유는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된 인물이라서 그렇죠

오늘은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고부민란이 일어났을 당시 고부군수로 재직 한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의 아버지는 조규순이라는 인물로 조규순의 형이 바로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이었죠

조병갑은 철종 14년인 1863년에 처음 관직에 오른 뒤 시간이 흘러 1892년에 전라도 고부 군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고 각종 탐관오리의 행적을 일삼았죠

 

조병갑이 한 가장 대표적인 악행은 '만석보'라는 큰 저수지를 만든것입니다

농사 지을때 필요한 저수지를 만드는게 뭐 그리 악행이냐 싶은데요

사실 당시엔 이미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보가 있었는데도 더 큰 보를 만들어야 한다며 백성들을 강제로 보 만드는 일에 동원 시켰던 것이죠

 

심지어 산에서 수 백년 된 큰 나무를 베어서 가져와 보를 쌓게 하고서는 백성들에게 노역을 한 대가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처음엔 새로 만든 보의 물을 써도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백성들이 새로운 보의 물을 쓰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죠

 

게다가 만석보 역시 잘 못만들어져 장마철마다 홍수에, 침수피해가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만석보 외에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고 돈을 안준일은 또 있는데요

조병갑은 고부 경내에 집을 짓고 첩을 사서 함께 살았는데 이 집을 지을 때 백성들을 데려와 짓게 하고는 돈을 한푼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황무지 땅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개간해서 먹고 살아라 한 뒤 향후 5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기로 해놓고 백성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자 또 약속을 뒤집어엎고 세금을 징수했죠

그에게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는지 나라 세금까지 횡령 하는데요

농민에게는 질좋은 쌀을 세금으로 징수하고 조정에 보낼때는 질 나쁜 쌀을 사서 바쳐 거기서 남는 차액을 착복하기까지 했죠

 

흉년이 들었을때는 감영에 보고해 세금을 탕감 받았지만 조병갑은 역시나 무거운 세금을 거둬 들였고 돈은 다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식으로 세금을 착복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냥 돈을 삥뜯는 경우도 많았죠

백성들에게 불효나 음행, 잡기등 온갖 죄목을 뒤집어 씌우고 옥에 가둔뒤 돈을 줘야 풀어줬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모은돈이 대략 2만냥에 이른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이 과거 태인현감을 지낸적이 있는데 공적비를 세운다고 하면서 또 백성들에게 1천냥을 갈취했습니다

그런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조병갑은 경남 함양에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는데요

내용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조선말에 조병갑 군수는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고 사비를 털어 세금도 감면해주고 관청도 고치고 선정을 베풀어 비를 세웠다' 라는 내용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조병갑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부조금으로 2천냥을 걷어오라고 지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이 백성들의 대표로 나서 조병갑을 찾아가 항의를 했는데 조병갑은 그런 전창혁의 곤장을 치라고 했죠

그러다 결국 전창혁은 곤장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고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백성들과 함께 들고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인 '고부 민란' 입니다

 

1894년 1월 전봉준을 대표로 한 농민들은 고부관아를 습격해 조병갑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전주로 도망치고 없었죠

그러자 농민들은 자신들의 수탈의 도구이던 만석보를 헐어버렸습니다

전주로 도망간 조병갑은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에게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며 보고했지만 모든 정황을 파악한 김문현은 조정에 장계를 보냈고 이에 오히려 조병갑 자신이 의금부에 압송되어 버렸죠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조정은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내려보냈고 그는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랬으며 모든 죄를 용서하니 집으로 돌아가서 생업에 힘쓰라고 권유하면서 다행히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해산 시킬수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이후 조정에서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를 파견했지만 이용태는 "이건 다 동학교도의 잘못이다" 라며 조정이 고부백성들과 한 약속을 어기고 동학농민이던 고부 백성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는 살해하기까지 했으며 마을 주변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러 버렸죠

 

이용태의 행위에 고부 백성들은 또다시 크게 분노하게 되고 전봉준은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1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한편 의금부로 압송되었던 조병갑은 결국 고금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지만 불과 1년만에 풀려나게 되었고 1898년에는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이후 동학의 지도자인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하기까지 했죠

 

백성들을 수탈하던 탐관오리에다가 유배까지 갔던 죄인인 조병갑이 지방 한직에 불과하던 고부군수에서 당시 핵심 권력이라 할수 있는 판사로 파격 승진했던것입니다

이후로도 조병갑은 3품인 비서원승으로 승진했고 고종과 친일파들에게 총애를 받아 계속해서 고위관직들을 두루 역임하기까지 했으며 그렇게 쭉 잘먹고 잘살다가 1912년 5월, 69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죠

 

좀 아이러니한점은 왜 이런 악당들은 오랫동안 잘먹고 잘사는지 모르겠네요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의 대명사이자 동학농민운동의 불씨를 당긴 조병갑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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