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영친왕.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니었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by 사탐과탐 2022. 8. 31.
반응형
어린나이에 일본에 볼모아닌 볼모로 잡혀가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평생을 살았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9년 11월 8일,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어떤 인명사전이 공개 되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행각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명사전이었죠

그런데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는 이 책을 만들 때 한 인물을 여기에 넣을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해 많은 의논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 인물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까지 역임했고 일본 황족과 결혼했으며,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던 조선인이었습니다

결국 연구소에서는 이 인물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는 않지만 친일 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사실상 그가 일제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는것을 감안해 사전에 수록하지는 않았다고 하죠

 

이 인물은 바로 '영친왕 이은' 입니다

그는 1897년 경운궁에서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어머니는 귀비 엄씨였죠

순종과 의친왕, 덕혜옹주와는 이복형제 사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어 버리면서 순종이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순종의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원래 다음 황위 계승 순위로는 의친왕이었지만 자신의 아들 영친왕 이은을 황제로 만들려던 순헌황귀비 엄씨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이완용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면서 영친왕이 다음 황태자에 책봉된것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그 해 11월이 되자 갑작스레 10살 밖에 되지 않았던 영친왕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고 말았죠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당시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총명한 이은에게 빨리 신학문을 가르쳐야 한다며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를 고종에게 강력히 요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다음 황제가 될 황태자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라고 하니 조선 조정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늙은 염소라고 표현하면서 늙은 염소가 황태자를 데려간다라며 엄청나게 반발을 했죠

그러자 일본은 일본의 황태자를 조선에 방문 시키는데요

그리고 이토는 조선에서도 이에 대한 답례로 영친왕을 보내라 한것입니다

그렇게 어린나이에 부모와도 떨어져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것이죠

 

또한 고종이 자꾸 일본에 반하는 행동을 하니 대한제국 황실에 친일파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태자태사, 이완용을 태자소사로 임명해 영친왕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죠

그렇게 영친왕은 철저하게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늘 영친왕의 곁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고 하죠

그리고 그를 뼛속까지 일본인화 시키려고 아주 잘 대해 줬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본 천황은 영친왕을 일본의 황태자와 똑같은 대우를 해주라고 지시를 내렸으며 자주 영친왕을 불러 은으로 된 문구나 일반인은 구하기 힘들었던 장난감 그리고 영사기까지 선물하며 엄청 잘해줬던 것이죠

 

영친왕은 이토 앞에서 박수를 치며 뛰어 놀거나 그네를 타면서 놀기도 했는데요

이토는 영친왕 앞에서는 착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인척 하면서 온갖 친절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으로 갈때 영친왕과 나이도 같고 친한 사이이던 엄주명까지 데려가며 영친왕이 조선에 대해 생각도 못하도록 모든걸 맞춰 준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영친왕이 일본에 반항이나 적개심 등은 조금도 가질수 없게 만들었고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천황에게 호감을 느낄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영친왕은 이토를 태사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잘 따랐다고 하죠

심지어 여름방학이 되면 이토는 영친왕을 데리고 일본 일주 여행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에서 30살의 조선인 안중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죠

 

그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크게 충격을 받았고 자신을 보호해주던 후견인이자 자신이 그렇게 의지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에 의해 죽었다며 너무너무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지면서 순종은 이왕으로 격하되었고 영친왕 역시 황태자에서 왕세제로 격하되었죠

 

그리고 이날 이후로 본격적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이후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해 훗날 일본 소위로 임관했으며 1940년에는 일본 중장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을 통해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알게 되는데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일본 황실 여인 나시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방자)와 결혼 한다는 소식을 보게 된것이죠

 

당사자들도 모르게 극비리에 진행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말을 이용해 조선 황족을 일본인과 결혼시키려고 했었고 그래서 덕혜옹주와 의친왕의 아들이던 이건도 일본인과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죠

어쨌든 이 둘은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저택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자는 고종이 세상을 떠나 슬퍼하던 영친왕을 진심으로 위로해주었고 그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영친왕은 그런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며 정략결혼임에도 영친왕과 이방자의 사이는 좋았다고 하죠

사실 이전에 민영돈의 딸 민갑완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어 영친왕과 약혼반지까지 주고 받았었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결혼소식은 조선에까지 알려졌는데요

독립신문은 영친왕에 대해 국권을 빼앗고, 자신의 아버지까지 죽인 원수의 나라에 장가들었다라고 말하며 마치짐승과 같다고 까지 했으며 영친왕이 원수의 여자를 취한것에 대해 죄를 묻겠다면서 영친왕이라는 존칭을 쓰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립운동가 서상한은 영친왕 부부를 죽이고자 폭탄을 준비하다가 발각되기까지 했죠

 

어쨌든 영친왕은 결혼 1년후에 이방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세가족은 조선으로가 종묘에 인사도 드리고 왕실 어른들도 만나고 했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이틀전에 갑작스레 아들이 사망해버렸죠

당시 영친왕의 민심은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이 독살 당했다는 설까지 돌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세제이던 영친왕이 왕위를 계승해 이왕이 되었지만 대한제국으로 귀국하지는 못했죠

 

그리고 1년후인 1927년에는 아내와 함께 약 1년간 유럽여행도 떠났습니다

영친왕은 프린스리 오브 코리아 라고 불리면서 국빈대접을 받았고 유럽 순방 기간 동안 21개국 53개 도시를 여행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때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식민지로 있던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했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영친왕이 유럽 열강들의 권력자들을 만날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왜 대한제국과 민족들이 처한 상황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죠

아무튼 이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영친왕이 중국 상하이에 들를 때 그를 구출해내 임시정부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일본 천황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고 그렇게 독립을 맞이했죠

하지만 연합군에 의해 황족들이 누리던 특권들을 박탈당했고 모두가 평민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영친왕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천문학적인 금액의 세금폭탄을 맞았고 일제 때 사귄 사람들도 다들 진심이 아니었는지 그를 만나러오는 사람도 없었죠

어쩌다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에게 사기를 쳐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큰 사기까지 많이 당해서 그나마 있던 재산도 잃고 이때부터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것이죠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고국은 그를 철저히 냉대했고 한국사람들은 그를 친일 황족이라며 증오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의열단 출신인 국회의원 박건웅은 "동경의 이왕은 민족반역자인데 왜 광복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냐" 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이 말을 들은 영친왕은 큰 충격을 받았고 죄의식 때문에 눈물 흘리며 괴로워 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은 일반 호적과는 별도로 다른 호적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황실 호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황족으로 살아간것은 일본 국적을 취득한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일본 정부에서도 그를 일본 국적으로 인정하지 않아 영친왕과 이방자는 무국적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영친왕은 아내 이방자에게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 라고 호소하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하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되고나서 다시 여러차례 귀국 의사를 타진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기도 하는데요

 

이승만은 만약 황족이 돌아오게 되면 자신의 영향력이 위축될수 있다는 생각과 자신의 대통령직에 위협이 될수도 있어서 그랬다는 썰 그리고 이승만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으니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황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일 거라는썰도 있죠

또한 이승만이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영친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영친왕이 이승만에게 귀국을 의논해보려 했지만 오든말든 알아서 하라며 약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하죠

이에 영친왕은 이때를 대단히 실망스러운 날로 기억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던 영친왕은 이방자의 친정과 몇몇 재일 조선인의 도움을 받아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갔죠

이후 생활이 힘들어지자 결국 자신의 저택을 일본 기업에 매각을 했는데요

 

사실 이 저택은 한국 정부가 한국 영사관 부지로 쓸려고 영친왕에게 팔아라고 했던 땅이었죠

하지만 일본 기업에 팔기전 영친왕은 한국 정부에 매각하려고 했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일본기업에 팔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한국에서 그의 평판은 더 나빠졌습니다

 

이때쯤 어떤사람이 이방자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온적이 있는데 옆방에 누군가가 뒤돌아 앉아 있는것을 보았고 자신이 다시 돌아갈때까지 그 뒤돌아있는 남자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고하죠

훗날 그가 영친왕이었다는걸 알았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고독하고 쓸쓸했는지 알수있는 대목 같네요

1950년 8월에는 아들 이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 하는데 여권 발급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쩔수 없이 일본 정부가 발급한 임시 여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승만에게선 "이구가 미국에 가면 절대 왕자 행세 하지 말라고 일러라" 라는 말만 돌아왔다고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영친왕은 재일교포 의용군 모집과 구호 물자를 모으는데 힘썼으며 일본으로 밀항해 온 한국의 학생들이 학업을 이어나갈수 있도록 기숙사를 제공하기도 하고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는 등 그들을 물심양면 돕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1951년에는 최초로 '조선어 회화 입문' 이라는 영한 사전을 만들기도 하는 등 어린나이에 일본에 갔지만, 끝까지 한국어를 잊지 않고 나름대로 나라에 보탬이 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그는 처음에 일본으로 떠날때 낙선재에서 조약돌 하나를 들고 갔는데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 한켠에는 계속 고향에 대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

시간이 흘러 1957년 아들 이구의 대학교 졸업때와 1960년 이구가 결혼을 할 때 영친왕과 이방자는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때도 한국 정부에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또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쩔수없이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여권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에 대한민국 여권 발급 요청이 거절된걸 몰랐던 한국 국민들은 그에 대한 반감이 예전보다 더 강해졌죠

이후 영친왕은 국적같은건 쉽게 회복할수 있을줄 알았다며 일본으로 귀화를 결정한건 온전히 자신의 실수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에서는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났고 이후에 박정희가 다음 대통령이 되었는데요

새로운 정부는 영친왕 귀국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다시 국적을 회복할수 있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국 뉴욕과 하와이에 갔을때부터 뇌일혈로 쓰러져 몸 상태가 너무 안좋았고 귀국하기 직전인 1963년 5월에도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을 했었죠

 

영친왕은 1963년 11월 22일에 혼수상태인채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가 인질로 일본에 끌려간지 약 56년만에 완전히 돌아올수 있었던 것이죠

그는 국가 보조금을 받아 생활했지만 자신과 덕혜옹주의 병원비를 내지 못해 밀릴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이어나갔고 1964년에는 휠체어에 앉아 있을수 있을정도로 회복하기도 했지만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으로 말을 거의 할수 없었고 상태가 좋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다가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에 안장되었죠

그가 살아있을때 사회봉사를 하고 싶어한 뜻을 이방자가 이어받아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와 신체 장애아 교육시설인 명혜학교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친일파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망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렇게 친일 인명사전에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죠

 

워낙 말이 없어서 침묵의 황태자라고 불렸던 영친왕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