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왕이 되는데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충성스런 무장집단 가별초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기나긴 인류의 전쟁 역사 속에서 과연 '최강의 군단'은 어디였냐 하는 것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거리 중 하나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고대 로마제국의 정예군단이나 나폴레옹을 따라 전 유럽을 정복한 프랑스 제국 근위대 그리고 전 유럽을 공포에 빠뜨렸던 몽골 기병대등이 널리 알려져 있죠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최강의 군단'은 과연 어떤 부대가 있었을까요?
23전 23승의 무패 신화를 이룩한 이순신의 함대나 한국사 최고의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광개토대왕이 이끌었던 부대 등 쟁쟁한 후보들이 많겠지만 오늘 제가 소개드리고 싶은 최강의 군단은 바로 고려말 이성계가 이끌었던 사병집단 가별초입니다
'별초'란 특별히 뽑은 정예병력이라는 뜻이며 가별초는 가문에 속해있는 정예병력을 말합니다
때문에 여말선초에는 수많은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 세력들이 가별초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거느리던 가별초가 가장 유명하고 세운 업적 또한 많기 때문에 흔히 가별초라고 하면 이성계가 이끌었던 부대로 통하게 된 것이죠
이성계의 가별초는 대략 3천여 명 정도로 추정되며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들의 후손들과 동북면 토착민, 변방 여진족 심지어 소수의 중국인과 몽골인 그리고 일본인까지 섞여있는 기병부대였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고려 말에는 수많은 세력들이 관에 등록되지 않은 개인 소유의 사병을 거느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죠
그중에서도 이성계의 가별초는 동 시기 다른 고려의 사병 집단과 어떤 점이 달랐을까요?
첫 번째는 바로 병력의 규모입니다
이성계가 치른 전투들 중 직접적으로 사병을 동원한 게 확인되는 기록에서 병력의 규모에 대한 언급이 써져있는 기록을 살펴보면 1361년 박의의 군대를 진압할 때 1,500명의 병사를 동원했으며 1362년 개경 탈환전에서 2,000명, 1364년 최유의 군대를 격파할 때 1,000명 그리고 1370년 1차 요동 원정에 동원된 병사수가 1,600여 명 정도였다고 하죠
이렇듯 기록을 살펴보면 이성계는 전투에 나설 때마다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1,000명에서 많게는 2,000명까지 동원했습니다
전투에 모든 병력을 동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기도 했던 인원까지 생각하면 가별초의 숫자는 3,000명 정도로 추정되죠
가별초가 다른 부대와 다른 점 또 하나는 그들 대부분이 오랜 세월 동안 이성계의 집안인 전주 이 씨 가문을 섬겨왔기 때문에 단결력과 충성심이 남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 단결력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전투에 임하다 보니 고려의 다른 부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정예 기병으로 거듭난 것이죠
고려의 제3대 무신정권 집권자인 경대승이 설치한 사병집단인 '도방'의 인원이 겨우 100여 명이었으며 그나마 진주에 기반을 쌓은 최충헌의 사병조차 모두 합해야 1천여 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성계는 수천에 달하는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기병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고려 말기에는 왕실조차 이성계 앞에 벌벌 떨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무장집단을 등에 업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조정까지 장악했으니 사실상 그 이후부터는 이성계가 왕이나 다름없었던 상황이었죠
게다가 고려말 이성계는 수많은 여진족들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왕이 되고 난 후 그가 북방의 조상들 무덤에 제사를 지내러 가면 사방에 있던 여진족들이 이성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백 리 길을 마다하고 달려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 말의 모든 여진 부족들이 이성계의 영향력 아래 있지는 않았고 그에게 강력히 대항하는 세력 또한 존재하긴 했지만 그 외 대다수 여진족들은 이성계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오죽하면 이성계가 잠깐 동북면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킨 여진족이 있었는데 이성계가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협력자들이 도망치거나 다시 이성계 쪽으로 배신하는 바람에 반란이 실패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성계의 카리스마 아래 모인 여진족들은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이성계가 소집을 명하면 즉시 달려왔는데 그 숫자가 대략 1,500명 이상이었다고 하죠
이성계는 이런 여진 기병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는데 이들 여진 기병은 특히 왜구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여진족 부대들이 마치 악귀 같은 모습으로 무참하게 왜구들을 학살하자 보다 못한 이성계가 적이 불쌍하니 적당히 해라고 말렸을 정도라고 하네요
이성계 휘하의 가별초는 당시 고려의 북방과 남방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오가며 적들을 격파했습니다
지리산과 경상도,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압록강을 지나 요동성을 공격하기도 했고 여진족과 몽골 지방 군벌, 왜구 등 적을 가리지 않고 싸웠습니다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북원의 장군인 나하추를 격파했으며 최유가 덕흥군과 함께 1만의 원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자 최영과 함께 그들을 물리쳤으며 여진족인 삼선, 삼개의 난을 진압하는 등 수많은 전투에서 무패의 신화를 자랑했죠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성계가 펼친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그가 겪었던 모든 전투가 특별한 전략 없이 돌격 후 대회전을 벌여 끝냈다는 점입니다
당시 고려의 상황상 요동 원정을 제외한 이성계의 모든 전투는 수비를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모든 방어전을 성벽에 의지해 싸운 것이 아니라 정면대결을 펼쳐 승리했다는 것인데요
심지어 평지가 아니라 기병을 쓰기 좋지 않은 지리산 전투나 황산대첩에서도 닥치고 돌격을 시전해 기병들을 이끌고 산을 거슬러 올라가 기어코 산 위에 있는 적들을 짓밟아 버리며 승리했다고 하죠
가별초의 전투력과 기동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별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점이 있는데 바로 이성계 군단은 전투에 나설 때마다 항상 커다란 소라의 껍데기로 만든 악기인 대라를 불며 진군했다는 것이죠
당시 기록을 보면 이것은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으며 유일하게 이성계 군단만 대라를 불면서 전투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 대라 소리는 이성계 군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전투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던 고려군에게 갑자기 대라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면 고려군은 물론이고 주변에 숨어있던 백성들은 그 소리만 듣고도 이성계가 왔다며 희망에 찬 함성을 질렀고 반대로 이성계에게 수없이 발렸던 왜구들은 대라 소리가 울려 퍼지면 "이성계가 왔구나!"라고 소리치며 크게 놀랐다고 하네요
그리고 대라 소리가 울려 퍼진 전장에는 어김없이 수천의 기마병이 도착해 적들을 박살 냈죠
그런데 우습게도 그 대라 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려 퍼진 곳은 바로 위화도 회군 이후 펼쳐진 개경 전투였습니다
한때는 최영이 이끌던 고려군이 왜구와의 싸움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이성계의 가별초가 대라 소리와 함께 나타나면서 위기를 벗어난 적도 있었죠
그렇게 자신들을 지켜주던 든든한 대라 소리가 개경 전투에서는 반대로 자신들을 향해 울려 퍼졌을 때 과연 고려의 병사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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