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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연산군이 왜그랬는지 이해될 정도로 조선시대 왕들의 개빡쌨던 하루 일과

by 사탐과탐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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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왜그랬는지 이해될 정도로 조선시대 왕들의 하루일과는 너무 힘들었는데요
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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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왕이라고 하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살았을 거 같지만 적어도 조선시대의 왕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참으로 바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얼마 전 인터넷에 왕의 하루 일과표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이 매일 저렇게 살라고 하면 나도 폭군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죠

 

조선시대의 한양은 밤 10시쯤이 되면 인경이라는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고 새벽 4시가 돼서야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리는 종을 쳤다고 합니다

왕 또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가 되면 일어나야 했다고 하죠

왕은 보통 침전에 있는 동쪽 온돌방에서 잠을 잤는데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의 강녕전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의 대조전이 바로 왕의 침전이었다고 합니다

 

지밀상궁들이 왕의 침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개의 방에서 숙직을 서고 왕의 식사와 세숫물, 옷 등을 담당하는 대전 차비들은 침전 근처에서 대기를 했죠

왕이 일어나면 지밀상궁들은 그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시녀들은 왕의 세숫물을 준비했으며 식사를 담당하는 대령숙수와 수라간 상궁들은 음식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아침을 먹기 전에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5시에서 6시 사이쯤 대비와 왕대비등 왕실의 웃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이었죠

만약 바빠서 직접 인사를 할 수 없을 때에는 내시를 대신 보냈다고 하네요

 

이후 죽이나 미음 등으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나면 학문이나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경연에 참석합니다

이 경연은 왕이 세자일 때부터 시작하던 것으로 학문 토론뿐 아니라 중요한 나랏일에 대해서도 자주 다루는 자리였죠

경연이 끝나면 10시까지 아침식사를 하고 공식적인 집무를 보기 시작하는 조회가 열렸는데 조회는 백관이 모두 참여하는 정식 조회와 매일매일 시행하는 약식 조회로 나뉩니다

 

정식 조회는 매월 5일, 11일, 21일, 25일 네 차례에 걸쳐 대궐의 정전에서 백관들이 왕을 알현하는 형태로 열렸으며 약식 조회는 조정의 대신들을 비롯한 승지나 사관 등이 매일 왕을 알현하는 식으로 진행됐죠

아침 조회가 끝나면 각종 나랏일을 보고 있는 담당 신료들로부터 진행과정과 결과에 대해 보고를 받습니다

 

이때에는 반드시 사관이 동석해야 했으며 승지는 왕의 비서로서 중앙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모든 공문서와 상소문, 탄원서 등을 접수해 미리 검토했고 꼭 필요한 현안만을 골라 왕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내용이 긴 공문서는 왕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했고 자주 있는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그 방법까지 기록해야만 했죠

 

때문에 왕은 늘상 있는 평범한 사안들은 승지가 제시한 대로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그대로 하라"라는 의미의 결재를 직접 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과정이 다 끝나고 나면 점심을 먹으며 쉴 시간이 주어지는데 11시부터 1시쯤까지 2시간 정도가 주어줬다고 하니 생각보다는 많은 거 같네요

1시부터는 낮공부인 주강에 참여해서 학문을 익힌 후 또다시 업무를 봐야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는 주로 지방관으로 발령받아 떠나는 신료나 지방에서 중앙으로 승진해오는 관료들을 만났는데 그중에서도 팔도의 관찰사나 중요 지역의 수령들은 왕이 직접 만나 업무를 지시하고 그들의 고충사항이나 그 지역 백성들의 민원을 들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했죠

 

그렇게 오후 5시 정도가 되면 야간에 대궐의 호위를 맡을 병사들과 장교들 그리고 숙직을 담당할 관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구호까지 정해주는 일을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안전과 직결돼있는 일인 만큼 반드시 왕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후 6시부터 1시간 동안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다시 저녁 공부인 석강에 참석해야만 했죠

그야말로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하는 셈인데 세종처럼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 공부가 끝나고 나면 오후 8시부터는 다시 왕실의 어른들께 문안을 드리는 시간을 가진 후 간단하게 면이나 죽 또는 왕들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야식을 먹는 시간이 주어졌죠

그리고 11시에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거나 미처 처리하지 못한 각종 문서가 있으면 그것을 읽었습니다

공문서를 처리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했지만 상소문은 쓰는 신하가 자신의 글솜씨를 뽐내느라 아주 길고 이해하기 어렵게 써놓은 경우도 많았는데요

 

왕은 비록 내용이 긴 상소문이라 할지라도 다 읽고 직접 대답을 써줘야만 했지만 하루에도 여러 개의 상소문이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하루 만에 그것을 다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때문에 왕이 상소문에 대한 답변을 내려 주는 일은 대부분 시간이 오래 걸렸죠

하지만 왕이라고 해서 모든 상소문에 순순히 다 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으며 만약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상소문이 올라오면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심한 경우 상소문을 올린 사람에게 중벌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제대로 일을 하는 조선시대의 국왕은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계속 업무에 시달려야만 하는 극한직업이었죠

매일 좋은 것만 먹고살았던 왕들의 수명이 왜 그토록 짧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그들의 하루 일과표를 보니 왜 그런지 알 거 같습니다

만약 왕이 이런 업무에 싫증을 내고 나랏일을 내팽개쳐두면 왕의 결재를 기다리는 문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한양을 비롯한 각 지방의 행정들이 마비되거나 엉망으로 처리돼버리겠죠

 

그나마 왕이 공식적으로 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정 1품 이상의 관료가 사망하면 3일간 조정의 업무가 정지되는 경우였습니다

그 외에도 정경 이상의 관료가 죽었을 경우에는 2일간 판윤을 지낸 사람이 사망하면 1일간 조정업무를 쉬었는데 만약 자신이 평소 미워하는 신하가 죽었다면 격무에 시달리던 왕으로서는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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