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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감녕.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을 가졌던 오나라 최강의 장수

by 사탐과탐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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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을 가졌던 건달출신의 오나라 최강의 장수 감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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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해드릴 인물은 아마도 오나라의 장수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능력은 뛰어났지만 삼국지에서 인성문제로는 손에 꼽힐 만큼 난폭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졌다는 장수 감녕의 이야기입니다 

 

감녕하면 형주와 강동 지역에서 주로 활약한 것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가 원래 태어났던 곳은 익주의 파군지방이었죠 

감녕은 어려서부터 주변의 건달무리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밖에 나갈 때마다 활을 차고 새의 깃털을 등에 꽂고 방울을 허리에 찼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방울소리가 들리면 감녕이 온 것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과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반대로 사이가 나쁜 경우에는 자신의 부하들을 풀어 상대의 재물을 약탈했으며 이런 도적떼와 같은 짓을 무려 20년 동안이나 계속했다고 하죠

감녕전에서는 어느 순간부터인지 전과 같은 패악질을 하지 않던 그가 제자백가의 책을 읽고는 갑자기 유표에게 가서 그의 부하가 되었다고 나와있지만 유언전에서는 유장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는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때까지 감녕의 행적을 봐서는 유언전의 기록이 훨씬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렇게 형주로 간 감녕은 유표를 만났지만 유표는 감녕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감녕또한 유표의 능력이 그리 믿음직하지 않다 판단하고는 오로 떠나려 했는데

강하태수 황조가 오로 가는 길목인 하구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오로 건너가지 못한 채 자신을 따르는 800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황조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죠

하지만 황조 역시 감녕을 푸대접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3년 후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황조가 패하면서 추격을 받으며 위험에 빠졌을 때 감녕이 활을 쏘아 추격해 오는 능조를 죽여 황조를 구하는 공을 세웠지만 그럼에도 황조는 여전히 감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하는데요

이를 보다 못한 황조의 부장 소비가 감녕을 수차례 추천했지만 황조는 오히려 개인적으로 감녕을 따르는 무리들을 설득해 그들이 감녕의 곁을 떠나게 만드는 등 감녕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실망한 감녕은 황조를 떠나고 싶었지만 도망쳤다간 붙잡힐 것이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매일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고 하죠

 

감녕의 재능이 아까웠던 소비는 황조에게 감녕을 변방지역으로 파견해 달라는 청을 올렸고 그렇게 소비 덕분에 겨우 황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감녕은 손권을 찾아가게 됩니다

황조 밑에 있을 때 오나라의 장수인 능조를 죽인 일이 있던 감녕이었기 때문에 여몽과 주유의 추천을 받으면서 손권의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고 이후 감녕은 적극적으로 황조를 공격할 것을 주장해 결국에는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서 자신을 푸대접한 황조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되죠

 

손권은 황조의 부하였던 소비도 죽이려고 했지만 이때 감녕이 지난날 소비가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일을 말하며 손권에게 그를 살려달라 간청했고 덕분에 소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이후 감녕은 적벽대전에서 주유를 따르며 오림에서 조조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어진 남군공방전에서는 수백 명의 병사로 이릉을 점령하는 공을 세웠죠

이에 조인은 6천의 군사를 보내 이릉을 포위해 버렸고 얼마 후 조인의 군사들이 엄청난 양의 화살을 쏟아부으며 공격하자 감녕의 아래에 있던 장수들과 병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지만 감녕만은 태연하게 웃으며 적들을 상대했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며칠을 성공적으로 버텨낸 감녕은 주유와 여몽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214년 손권이 환성을 공격했을 때는 감녕이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올라가 성을 함락시키고 대장인 주광을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웠다고 하죠

이런 감녕의 무력을 두고 정사를 지은 진수도 감녕의 용맹함은 위나라의 전위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자 손권은 유비에게 장사와 영릉 계양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유비가 손권의 청을 거절하면서 노숙과 관우가 각각 병사를 이끌고 익양에서 서로 대치를 하는 사건이 있었죠

3만의 병력을 끌고 온 관우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강을 건너 오 군을 공격하려 했는데 이때 감녕이 관우를 막아보겠다며 노숙에게 1천 명의 병사를 요구했습니다

 

관우도 감녕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는지 그가 강 건너편에서 진영을 설치하는 소리를 듣고 "이것은 흥패(감녕의 자)의 소리구나"라는 말을 하고는 감히 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합니다

관우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이라 다른 사람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편인데 그런 말을 남긴 것을 보면 당시 감녕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위와 오가 주로 대립하던 지역은 합비와 유수구였는데 보통 오나라가 공격을 할 때는 위나라가 합비에서 방어를 하고 위가 공격을 할 때는 오가 유수구에서 그들을 막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감녕은 214년에 유수구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때 손권은 감녕에게 적의 선봉을 격파하라는 임무를 내렸죠

이에 감녕은 100명의 정예결사대를 모집한 뒤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조조의 진영을 기습해 조조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그들의 기를 꺾는 데 성공합니다

그 소식을 보고받은 손권은 "조조에게는 장료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으니 충분히 그를 상대할만하다"라며 크게 기뻐했죠

환성과 유수구에서 승리하면서 기세가 오른 손권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장료가 있는 합비로 진격했지만 조조가 감녕에게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장료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면서 호되게 당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럼에도 워낙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공격을 계속할 수는 있었지만 하필 병사들 사이에 역병이 떠돌게 되면서 결국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장료에게는 손권이 곱게 후퇴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을 이끌고 물러나는 손권 군의 뒤를 쳤는데 손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수들이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감녕은 침착하게 군악대에게 북을 치고 피리를 불라며 소리쳤고 감녕과 능통을 비롯한 장수들의 노력으로 손권은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죠

 

이렇게 장수로서는 더없이 용맹한 모습을 보여준 감녕이지만 평소 너무 난폭한 성격 탓에 전장이 아닌 곳에서도 자주 사람을 죽여댔기 때문에 감녕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던 여몽도 그를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군주인 손권조차 감녕이 명령을 잘 어겨서 화를 낸 적이 많다고 하는데요

감녕이 황조 아래에 있을 때 능통의 아버지인 능조를 활로 쏴 죽인 적이 있기 때문에 여몽의 집에서 연회가 열렸을 때 능통과 감녕이 칼부림을 한 적도 있는데 이 일의 경우 감녕 입장에서는 추격해 오는 적군의 장수를 죽인 것이기 때문에 딱히 그의 잘못이 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의 포악한 성격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감녕전에 따르면 하루는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아이가 무언가 큰 잘못을 했는지 여몽에게 달려가 몸을 숨긴 일이 있었는데 평소 감녕의 포악한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여몽은 그가 아이를 죽일까 두려워 아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이 지켜줬죠

이 사실을 알게 된 감녕은 예물을 가지고 여몽의 집을 찾아와 여몽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 뵈었고 여몽은 감녕에게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아이를 돌려줬죠

 

하지만 잠시 후 여몽의 집으로 올 때 타고 온 배로 돌아온 감녕은 가까이 있던 뽕나무에 아이를 묶어버린 후 자신이 직접 활을 쏴서 아이를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 부하들에게 배를 출발시키라고 명하고는 배 안에 드러누워버렸죠

감녕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들은 여몽은 크게 화를 내면서 즉시 군대를 이끌고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감녕은 그 소식을 들었음에도 일부러 배에 누운 채 일어나지조차 않았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여몽이 감녕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여몽의 어머니는 주군께서 너를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대우하며 국가의 중요한 일을 너에게 맡기셨는데 이렇게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감녕을 공격하여 죽이려 한다면 만약 주군께서 너를 꾸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는 이미 신하로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라며 그를 설득했죠

평소 효자로 유명했던 여몽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감녕의 배로 가서 우리 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빨리 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여몽의 넓은 마음에 감동한 감녕은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나와서는 자신이 여몽을 저버렸다고 사과하면서 화해를 하게 되죠

불쌍한 어린아이만 목숨을 잃게 된 셈인데요

연의에서는 이릉대전에서 사마가의 화살이 감녕의 머리에 맞으며 그가 죽은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사 감녕전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잘 나오다가 뜬금없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감녕이 죽자 손권이 애통해했다는 구절이 갑자기 나온다고 하죠

 

건강실록(건강(건업)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의 사서)에는 감녕이 215년에 병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정사 반장전에서는 220년에 반장이 관우를 토벌한 이후 죽은 감녕의 군대를 이어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군대를 장수 없이 방치해 뒀을 리는 없기 때문에 감녕이 정확하게 언제 죽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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