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목의변, 탈문의변, 조흠의난 등 굵직한 사건들을 내리 쳐맞고 파란만장한 삶을 산 황제 정통제이자 천순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강희제나 건륭제, 숭정제 라고 말하는것을 연호라고 부르는데요
황제가 즉위하고나서 연호를 선포하는데 그것을 바로 '건원(建元)'이라고 하죠
그리고 황제를 자칭하는것을 '칭제(稱帝)' 라고 하는데 이를 합쳐서 칭제건원이나 건원칭제라고 합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용어 인데요
명나라는 각각의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택하고 있어서 한명의 황제에게는 하나의 연호가 있었죠
그런데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연호가 2개가 있습니다
이 말은 황제를 두번 해먹었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그는 바로 명나라 6대 황제이자 7-1번째(?) 황제 정통제이면서 천순제이기도 한 인물 입니다
일반적으로 그가 두번째 황제를 했던 천순제 시절은 그냥 정통제 시절과 합쳐서 8번째 황제라고 칭하지 않고 있기도 하죠
그만큼 정통제의 인생은 정말 파란만장했었는데요
오늘은 이 정통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의 이름은 주기진으로 선덕제의 장남이었죠
1435년 아버지 선덕제가 재위 10년만인 3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통제는 9살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후 할머니인 태황태후 장씨가 섭정을하고 3양 (三楊)이라 불리던 양사기 양영 양부를 비롯한 여러 충신들이 정국을 이끌었었기 때문에 무난히 나라를 잘 꾸려나가고 있었죠
그리고 그가 15세때 황후 전씨(효장예황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 이 전씨의 인생 역시 정통제 만큼 기구합니다
황후 전씨는 품성이 훌륭해 정통제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지만 둘사이에 자식을 두지는 못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유능한 신하들이 나이가 들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섭정을 하던 태황태후 장씨 마저 1442년에 사망하자 이후 권력을 잡은 인물은 바로 환관 왕진 이었습니다
홍무제와 영락제는 환관들이 절대 정치에 나서지 못하게 하기위해 글을 배우지도 못하게 했는데 환관 왕진은 과거 건달 출신에다가 과거시험을 치려다 낙방한 뒤 죄를 지어 유배를 가기도 했던 막장스러운 인물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환관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왕진은 스스로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되었고 이후 선덕제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다가 어린 정통제에게 글을 가르치는 스승이 된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왕진은 정통제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예쁨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정통제가 즉위하고 유능한 신하들이 죽고 없어지자 아직 나이도 어려 정치에 경험도 부족하고 관심도 없으며 노는것을 좋아하던 정통제가 모든 국정을 왕진에게 맡기면서 권력을 잡게 된것이죠
왕진이 권력을 잡고나서 제일 처음 했던 일도 충격적인데요
과거 주원장이 환관의 정치 관여를 금지 한다는 철폐를 궁문에 세워뒀었는데 그것을 때려부숴버렸다고 하죠
왕진은 황제를 보좌하며 문서를 대필하는 등의 업무를 했는데 문서를 조작하면서 국정을 농단했고 자신을 욕하고 말을 듣지 않는 신하들은 여러 구실을 만들어 감옥에 가두거나 죽여버렸습니다
또한 이후 왕진은 군대까지 장악하면서 신하들과 장군들 모두 그를 건드릴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그렇게 환관 왕진이 전횡을 일삼자 인선지치를 거치며 탄탄했던 명나라 조정은 점점 내리막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449년,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이 명나라를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죠
이들은 명나라와 조공무역을 했는데 명나라에서는 비단과 식량등을 수입하고 자신들은 말과 모피를 수출했던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들이 말을 팔때 판매한 말의 숫자를 속이기도 하고 질 떨어지는 말만 넘기거나, 가격을 비싸게 파는등 온갖 나쁜짓을 해댄것이죠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무역량을 줄이고 제한하기 시작했고 명나라를 속여 잘 해먹고 있던 오이라트족의 부족장 에센 타이시는 무역제한에 반발해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동이라는 지역을 침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4만 5천명이나 되던 명나라의 수비대는 참패하여 궤멸되고 말았고 그렇게 어이없이 명나라의 방어선이 무너졌죠
이에 왕진은 정통제에게 친히 병력을 이끌고 가 황제의 위엄을 보이며 적을 쓸어버리는게 좋겠다고 말했고 여러 대신들의 만료에도 불구하고 정통제는 왕진의 말을 들어 군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50만 대군을 이끌고 출진했습니다
그리고 정통제는 이후에도 군대의 지휘를 여러 경험많은 장군들은 배제하고 왕진에게 맡겨버렸고 그러다보니 정예병이라 해도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게 되면서 여러면에서 군대의 질이 떨어졌던 것이죠
그렇게 결국 전장에 도착했지만 오이라트족에 의해 대패해버렸고 결국 왕진의 건의대로 명나라군은 다시 후퇴를 하게 되는데 곧바로 북경으로 갔다면 아무일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철수하는 경로에 왕진의 고향이 포함되었다는걸 안 왕진이 고향이 피해를 입을까봐 우회해서 철수하다가 결국 오이라트 군대에 덜미를 잡히고 만것입니다
그렇게 명나라 군은 토목보에 갇히게 되었는데 토목보는 굉장히 작은 규모의 성이었으며 보급도 끊긴 마당에 마실 물 조차 부족하게 되었죠
신하들은 정통제만이라도 빼내 북경으로 탈출시키려고 했지만 만약 정통제가 없으면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있을거라 생각한 왕진은 결국 끝까지 탈출을 방해하면서 신하들을 모함해 처벌을 받게 하기까지 했으며 그렇게 결국 정통제 역시 탈출하지 못하고 함께 갇혔던 것입니다
결국 오이라트에 의해 토목보 마저 함락되었고 분노한 명나라 장군 번충이 철퇴를 들고 정통제가 보는 앞에서 왕진을 때려죽였는데 이때 아무도 번충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기뻐했으며, 정통제도 어찌하지 못한채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결국 명나라 황제이던 정통제는 오이라트족에 잡혀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어버린 역사상 전무후무한 굴욕을 맞보게 되었죠
중국 역사상 외적과의 전쟁 중에 황제가 포로가 된것은 정통제가 처음이었고 이 충격적인 사건을 바로 '토목의 변'이라고 합니다
한편 패전소식을 들은 북경에서는 남경으로 천도해야한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병부시랑이던 우겸이 남쪽으로 도망갔다가 멸망한 송나라의 예를 들며 격렬히 반대해 결국 남경으로 천도를 하지는 않았는데 곧바로 정통제의 이복동생이던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했고 그가 바로 명나라 7번째 황제인 경태제이죠
한편 남편이 포로가 된 소식을 들은 황후 전씨는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추운 엄동설한에도 성심을 다해 기도를 올리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한쪽 눈을 실명하고 한쪽 다리마저 절게 되었습니다
오이라트 부족은 정통제를 사로잡았으니 다시 명나라와 협상을 하려했는데 이미 경태제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던 것인데요
정통제가 포로로써 구실을 전혀 못하자 오이라트는 다시 북경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쓸모없어진 정통제를 풀어주었죠
결국 정통제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고 경태제는 돌아온 형에게 태상황 자리를 주었지만 정통제의 존재는 자신의 황위에 엄청난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정통제는 황후 전씨와 함께 남궁에 유폐되고 말았죠
유폐된 이후 먹을것도 제대로 주지않자 전씨는 궁녀들과 함께 삯바느질을 하며 겨우겨우 끼니를 떼울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경태제는 원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지만 주견제가 병으로 죽고 말았으며 얼마안가 경태제 마저도 병에 걸려 앓아 누워버렸죠
그런데 이때가 기회라 생각한 석형, 조길상, 서유정 등 정통제를 따르던 사람들이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 시킨뒤 다시 정통제를 복위 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탈문의 변 이라고 하는데요
다시 황제가 된 정통제는 연호를 천순으로 바꿨고 그렇게 정통제이자 천순제가 된것이죠
이때 신하들이 황태자를 낳은 후궁 주씨를 황후로 앉히자고 정통제에게 말했지만 정통제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다가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유폐 되었을때도 함께 고생을 했던 전씨를 다시 황후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후 정통제는 그나마 나은 정치를 하긴 했지만 이제는 자신을 복위 시키는데 일등공신이던 환관 조길상과 석형에게 휘둘리기 시작했죠
하지만 다행히 과거 환관 왕진에게 휘둘리다가 포로가 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들을 그대로 두면 또 다시 황권이나 나라가 개판이 될것이라 생각한 정통제는 석형과 조길상을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석형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고발이 들어오자 정통제는 곧바로 석형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석형은 얼마안가 감옥에서 옥사하고 말았죠
다음은 조길상의 차례 였는데 조길상의 양자였던 조흠이 법을 어기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통제는 그를 불러 크게 질책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석형의 몰락을 지켜보고있던 조길상은 위협을 느꼈고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조카들(조현,조탁,조예)과 함께 모반을 꾀하고 있었죠
그런데 조흠의 부하이던 마량이 이 사실을 정통제에게 고해바쳤고 정통제는 즉시 조길상과 그의 가족들을 전부 체포해버렸습니다
모반계획이 걸린걸 알게된 조흠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켜버렸는데 이 일을 '조흠의 변'이라고 부르죠
이후 진압군과 함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조흠은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조흠의 시신을 건져낸 관군이 그의 수급을 황제에게 바쳤고 북경성 성벽에 효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형에 이어 조길상 일파까지 깔끔하게 정리해버렸죠
이후 황권을 회복한 정통제는 토목의 변 당시에 북경을 지킨 우겸을 죽여버리는 실책을 저지르긴 했지만 이후 우겸이 훌륭한 신하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죽인걸 굉장히 후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현과 같은 훌륭한 신하를 등용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좋은 정치를 펴나가기도 했는데요
이때 그는 자신의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조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 다음엔 조회를 보고 밥먹은 다음 상주문 읽는게 하루 일과의 전부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정무에 임했죠
또한 자신이 포로로 잡혀있었던 아픈 기억을 참고해 당시 남아있던 몽골의 안좋은 풍습을 없애버렸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순장 풍습을 없앤거라고 합니다
이후 천순제는 조흠의 변을 진압한지 7년만인 1464년에 3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직전 황후 전씨가 죽으면 내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죠
만약 자신이 죽은뒤 아들인 성화제가 친모인 주씨를 태후로 추존하고 자신 옆에 주씨를 묻고 전씨를 다른곳에 모실까 염려되었던 정통제가 일부러 내렸던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정통제가 죽고나서 황후 전씨도 4년후에 세상을 떠났는데 정통제의 유언대로 그의 옆에 묻히게 되었다고 하죠
어린나이에 황제가 되어 적의 포로가 되고 동생에 의해 유폐되었으며 환관들의 난을 평정하기 까지 정말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통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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