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 5척과 270여 명이 선원이 출발한 신항로 개척에서 고작 돌아온 건 배 한 척과 18명의 선원밖에 없었는데요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유럽에서 대항해시대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여럿 있습니다
유럽인 최초로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 유럽인 최초로 유럽과 인도를 잇는 직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 그리고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인데요
여기에 더해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이 위 세명과 함께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찍은 인물이죠
그는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 입니다
마젤란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현재에 와서는 다른 주장이 있기도 하죠
그리고 마젤란 이전에는 탐험가나 모험가 등이 전 세계 바다를 항해했던 반면 이후부터는 군인이나 해적, 선교사, 학자 등이 바다를 주름잡는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죠
하지만 9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힘든 삶을 살다 12살 때 왕궁에 시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15살의 어린 나이에 인도 원정에 따라가기도 했으며 이후 동남아시아의 여러 교역소에서 해상무역의 경험을 쌓았죠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요
천재적인 능력은 있었지만 굉장히 성격이 차갑고 못돼 처먹은 데다가 사회성 또한 떨어져서 마젤란에게는 친구는 적고 적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함께 일하는 상관이나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죠
어쨌든 마젤란은 신대륙에서 더 서쪽으로 간다면 아시아와 인도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포르투갈 왕에게 찾아가 후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가 개척한 인도항로를 알고 있었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신대륙의 대부분은 스페인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굳이 돈도 많이 들고 실패할 확률도 높으며, 스페인이 이 일로 시비를 걸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굳이 신항로 개척을 할 필요성이 많지 않았죠
그렇다보니 포르투갈은 마젤란의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젤란은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으로 가게 되는데요
1517년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이던 카를로스 1세에게 스페인의 영역인 남아메리카 아래를 우회해 향로 제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죠
당시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인도로 향하는 항로는 포르투갈이 대부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은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수익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아시아 무역에 발을 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 마젤란의 제안을 승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 1519년 9월, 함선 5척과 선원 270명은 새로운 항로 개척을 위해 앞으로 닥칠 악몽 같은 시간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스페인 세비야를 떠나 기나긴 항해를 시작했죠
그들은 미리 알고 있던 항로를 이용해 현재 우루과이에 있는 라플라타 강까지 별 탈 없이 무난하게 도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데요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에 발이 묶여 두 달이나 시달리게 되었고 마젤란의 더러운 성격 탓에 다른 배들의 함장들과 끊임없는 갈등이 이어졌죠
심지어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이었지만 함장들과 선원들은 대부분 스페인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심지어 스페인 왕이 마젤란을 감시하기 위해 붙여놓았던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의 명령에 대놓고 불복했는데요
이에 개빡친 마젤란은 그를 체포했다가 다른 함장들의 만류로 다시 풀어주게 되었죠
그렇게 위태로운 항해를 계속하던 중, 1520년 겨울이 다가올 때까지 대서양을 지나는 해협을 발견하지 못했고, 이에 함장과 선원들의 불만이 폭발해버렸습니다
계속 마젤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카르헤티나는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총 5척의 함대 중 3척의 배에서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죠
하지만 마젤란은 나머지 선원들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반란을 진압했고 반란 주동자들은 처형당했습니다

그렇게 남아메리카 최남단에 있는 해협까지 도착하는데까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함대 한 척은 침몰에다가 한 척은 도망까지가는 등 천신만고 끝에 1520년 11월, 새로 발견한 해협을 빠져나가 대서양이 아닌 또 다른 큰 바다를 맞닥 뜨리게 되었죠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이 해협을 '마젤란 해협'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접어든 바다는 마젤란해협의 혹독한 기후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였는데요
마젤란은 이 바다의 명칭을 '태평양'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하지만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는 얼마 안 가 지옥 같은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식량과 물 부족, 게다가 전염병까지 시달리게 된 것이죠
물은 그나마 비가 올 때 받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지만 먹을 거라고는 가루가 되어버린 오래된 비스킷 밖에 없었는데요
심지어 온갖 벌레가 득실거렸으며 그나마 있던 음식들 위에 쥐가 싸놓은 배설물이 뒤범벅이 되어 역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어쩔 수 없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죠
그것조차 부족해 쥐와 벌레까지 잡아먹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작은 섬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가 계속해서 이어졌고 태평양 횡단 막바지에는 마스트를 묶은 쇠가죽을 뜯어 먹을 정도로 굶주림이 심각한 상태였으며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죠
그렇게 굶어죽기 일보 직전인 1521년 3월, 한 섬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섬에 상륙해 물과 식량을 보급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마젤란 일행이 타고 온 보트를 훔쳐 가는 바람에 원주민들과 충돌이 발생했죠
이때 원주민 추장이 '우리 부족엔 도둑놈은 없다' 라고 했는데 이들의 언어로 없다는 뜻의 단어가 '구아한(Guåhån)' 이었고 이후로 이 섬을 '괌'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10일 동안 시간을 보낸 뒤 다시 항해를 이어나갔죠
그리고 필리핀을 발견해 민다나오섬에 있는 부투안 왕국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부투안은 이방인들에게 친절한 편이었기에 이곳에서 휴식시간을 가진 뒤 물과 식량을 보급해 또다시 항해를 이어나갔죠
이후 마젤란은 필리핀의 세부섬에 도착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곳의 왕인 라자 후마본은 부투안 국왕의 사촌이자 동맹국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젤란은 세부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를 맺고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던 막탄섬의 촌장인 라푸라푸를 제거해 주겠다는 해서는 안 될 불필요한 짓까지 하게 된 것이죠
마젤란은 라푸라푸가 작은 섬의 추장 정도인 별것 아닌 존재로 생각했고 적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은 채 부하 60여 명과 세부섬의 병사 200~300명의 소수 병력만 이끌고 막탄섬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막탄섬 해안에 도착을 해 배에서 내린 마젤란에게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장면이 펼쳐졌는데요
바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마젤란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1500여 명의 막탄섬 병력과 맞닥뜨리고 만 것이죠
그렇게 압도적인 병력 차로 인해 마젤란이 이끌고 간 병사들은 전멸하다시피 했는데요
이때 라푸라푸 군대에 의해 마젤란 역시 잔혹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라푸라푸는 마젤란의 시신도 돌려주지 않았고 이에 원하는 만큼 재물을 줄 테니 시신을 돌려달라고까지 했지만 거절당했으며 라푸라푸는 마젤란의 시신을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물로 이용했죠
하지만 마젤란 함대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요
마젤란의 부하이던 엔리케의 말에 의하면 살아남은 선원들이 세부의 왕에게 마젤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돈을 뜯어내려 한 것입니다
이에 압박을 느낀 세부의 왕은 그들에게 식사 초대를 한 뒤 음식에 독을 타 수많은 선원들마저 목숨을 잃고 말았고 남은 선원들도 그들의 공격을 받아 겨우 세부섬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죠

세부에 도착한 배는 세척이었지만 세척 모두 운용하기에는 선원수가 부족했고 결국 배 한 척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엔리케의 증언이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진위 여부는 확실치 않다고 하죠
아무튼 남은 두척의 배는 엘카노의 지휘 아래 항해를 계속해 몰루카 제도의 티도르 섬에 상륙했으며 이곳에서 많은 양의 향신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아메리카를 거쳐 태평양을 횡단해 향료제도에 가려던 마젤란의 목적이 이루어지긴 한 것이죠
하지만 기함이던 트리니다드호가 파손되어 항해가 불가능해 결국 마젤란 함대 중 가장 작은 배였던 빅토리아호 만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젤란 함대가 스페인을 떠난 지 3년 만인 1522년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는데요
다섯 척으로 출발했던 함대는 제일 작은 함대인 빅토리아호 단 한 척만 돌아왔으며 250여 명의 선원이 죽었고 고작 18명의 선원만 최초의 세계 일주를 했다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돌아올 수 있었죠
그러나 빅토리아 호 한 척에 실려있던 향신료 만으로도 모든 항해 비용을 상쇄하고도 엄청나게 많은 이윤이 남았다고 합니다
마젤란 함대는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되었고 스페인은 마젤란의 이런 업적이 계기가 되어 포르투갈을 앞서는 해양강국이 되었죠
그렇게 '세계 일주를 최초로 한 인물은 마젤란이다' 라고 알려졌는데요
마젤란이 과거에 갔었던 말라카와 자신이 죽은 필리핀이 경도상으로는 같았기 때문에 지구 한 바퀴를 돈 것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젤란은 두 번에 걸쳐 세계 일주를 한 셈이고 말라카와 필리핀 사이의 거리는 채우지 못한 것인데요
그래서 지금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엘카노를 포함한 18인으로 꼽는다고 하죠
엘카노는 스페인에서 마젤란과 함께 떠나 그가 죽고 나서 남은 함대를 지휘해 17명의 선원과 함께 스페인으로 귀환을 한 인물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한 번의 항해를 통해 출발지로 귀환한 엘카노와 17명의 선원이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거기다가 스페인에서는 살아 돌아온 엘카노가 필리핀에서 사망한 마젤란보다 더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마젤란이 죽은 필리핀의 막탄섬에는 그를 추모하는 비문과 마젤란을 죽인 추장 라푸라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고 하는데요
라푸라푸의 동상에는 필리핀 최초로 외부 침략자를 물리친 것에 대한 찬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를 영웅으로 추앙한다고 하죠
마젤란의 업적은 수많은 탐험가가 새로운 항로 개척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반면에 그는 세계 최초로 태평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을 성공했다는 것과 세계 일주를 처음 시도해 훌륭하게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천재성과 과감함으로 세계를 일주하는 방법을 알아낸 페르디난드 마젤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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