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아프리카를 나눠가진 유럽 열강들의 최악의 회담 베를린 회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산이나 강 등 지리적인 이유로 국경이 만들어져 울퉁불퉁한 것이죠.
하지만 아프리카의 국경선을 보면 굉장히 독특한데요.
자로 대고 죽죽 그어놓은 것처럼 국경선이 일직선이죠.
그 이유는 바로 1884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한 회담 때문이었습니다.
왜 아프리카 국경선이 베를린에서 열린 회담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럽국가들은 북아프리카 일대와 대항해시대 때 인도항로를 개척하다가 알게 된 아프리카 중부, 남부의 해안지역만 알고 있었고 아프리카 대륙의 내륙지역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열심히 식민지 넓히기에 혈안이 돼있었는데요.
그리고 아메리카로 노예들을 열심히 보냈어야 했기에 노예무역과 삼각무역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죠.
그러다보니 더 많은 흑인 노예들을 찾기 위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마수를 뻗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영국은 1788년부터 내륙으로 탐험대를 보내기 시작했는데요.
탐험대들은 유럽 국가들에게서 많은 지원을 받으며 아프리카 내륙 침략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는데요.
탐험대들은 아프리카 내륙의 기후와 말라리아 같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내륙의 개척은 해내지 못하고 있었죠.
그렇게 아프리카 대륙의 겉만 핥고 있던 중 1820년이 되자 프랑스의 화학자 피에르 조셉 펠트티에르라는 인물이 말라리아 치료약을 발명했고 그때부터 유럽인들의 본격적인 아프리카 내륙 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180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선교사들과 탐험가들에 의해 아프리카 내륙에 널려있던 지하자원이나 노예로 쓸만한 흑인들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무슨 만찬이라도 차려진 것 마냥 군침을 흘리고 있었죠.
심지어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의 많은 수가 독립을 하고 있던 시기라서 식민지가 사라진 유럽 국가들에겐 새로운 먹잇감으로 아프리카 내륙으로 눈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탐험가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에 대해 밝혀내다가 1870년대에 헨리 스탠리의 콩고강 답사를 마지막으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전역에 대해 파악하게 되었죠.

그 이후 눈 돌아간 유럽 국가들은 앞다투어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다 보니 결국 열강들끼리 마찰이 빚어지고 마는데요.
당시 프랑스는 튀니지와 기니 등 서아프리카의 넓은 영토를 식민지로 만든 후 아프리카의 동쪽으로 눈을 돌렸고 아프리카를 북쪽에서 남쪽까지 세로로 먹으려던 영국은 프랑스의 이런 행보를 예의 주시하며 이를 저지하는데 애를 쏟고 있었죠.
거기다가 벨기에를 비롯한 포르투갈과 같은 국가들도 식민지를 넓히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고 심지어 식민지 개발에 크게 관심이 없던 독일도 식민지를 만드는 쟁탈전에 투입되어 양상은 점점 더 과열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장 불안한 지역은 바로 콩고 분지 지역이었는데요.
벨기에 왕인 레오폴드 2세는 1881년에 이미 콩고강 인근 지역에 레오폴드 빌을 건설해 개인적인 식민지로 삼아버렸죠.
그런데 프랑스 역시 해군을 파견한 뒤 콩고강 북쪽 지역에 보호령을 설치해 식민지로 삼았으며 포르투갈은 콩고왕국과 협정을 맺고 나서 콩고강 유역의 영유권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곳을 눈독 들이던 영국까지 포르투갈과 협정을 맺고 발을 슬쩍 담그자 벨기에와 프랑스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면서 무력충돌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요.
결국 포르투갈은 중재를 위한 국제회의 소집을 제안하게 되었고 이 제안에 영국과 독일이 동의를 하면서 1884년 11월 15일, 베를린에서 유럽 12개국과 미국, 터키 등의 나라가 참가해 회담이 열리게 되었죠.
이 회담이 바로 문제의 '베를린 회담' 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언론들은 이 베를린 회담을 '백인끼리 총칼로 싸우지 않고 대화를 통해 아프리카 주요 지역에 경계선을 그은 인간애의 승리' 라고 극찬해 마지 않았죠.
예전부터 그 땅에 살며 그곳의 주인이던 흑인 원주민들은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1884년 11월 15일에서 1885년 2월 26일까지 약 3개월 동안의 회의 끝에 문제가 되었던 콩고강 주변지역을 포함한 중앙아프리카 일대는 실제로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먹는 걸로 정했고 나머지는 당시 모여있던 각국 대표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죽죽 잘라 나눠가졌습니다.

그런데 같은 언어나 같은 부족, 문화, 역사 등 기존에 어떠한 조건에 맞게 나눠져있던 원주민들만의 국경은 무시당한 채 열강들 편한 대로 잘라져버렸죠.
또한 이때 결정된 것 중 하나는 '아직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땅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차지한다' 였는데요.
이에 각 나라들은 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무력을 사용했고 더욱더 치열한 경쟁을 촉발시켰습니다.
그렇게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 각국의 식민지가 되어버렸고 이 베를린 회담을 '아프리카의 분할'(Scramble for africa)' 이라고도 불렸죠.
이 회담을 통해 그어진 국경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을 하고 난 이후에도 계속 그대로였고 이 이상한 국경선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구 열강들에 의해 아무렇게나 그어진 국경선 때문에 같은 부족이지만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고 같은 나라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쓰는 등 현재까지도 아프리카 내에서 많은 혼란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죠.
물론 아프리카의 부족장들은 유럽의 이런 식민 정책에 맞서 저항하기도 했는데요.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과거 유럽인들의 만행은 과거 우리나라에게 일본이 했던 것과 다름없는 것 같은데요.
아프리카 흑인들은 노예로 잡혀가거나 그곳에서 노예처럼 살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죠.
그런 것을 보면 전 세계 누구보다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일직선인 이유, 베를린 회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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