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은 이슬람인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명장으로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정복해버려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사자왕 리처드에 대해 다룬적이 있었는데 상대편으로 주로 나왔던 대장의 이름이 살라딘이었죠.
그들이 맞붙었던 몇몇 전투에서 리처드의 초인적인 무력 때문에 살라딘이 낭패를 보는 모습이 나오면서 살라딘이 그저 평범한 장군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으실 텐데요.
하지만 실제로 살라딘은 이슬람은 물론 유럽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명장이었습니다.
애초에 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도 십자군이 지키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살라딘이 점령했기 때문이었죠.
뛰어난 지휘능력에 인품까지 갖춰 기독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유일한 이슬람인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살라딘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하 살라딘)는 1137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대부터 모술과 알레포 지역의 영주인 누르 앗 딘을 섬겼는데요.
살라딘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영리한 두뇌로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는 뛰어난 무력과 지휘능력으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살라딘 역시 젊어서부터 누르 앗 딘의 부름을 받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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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이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리기 시작한 것은 이집트 정복 때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삼촌 시르쿠의 부관으로 이집트군과 십자군을 동시에 맞아싸워 4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쟁 끝에 마침내 이집트를 정복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집트를 정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총사령관인 시르쿠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고 현지 이집트 관리들은 살라딘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게 되죠.
지도자가 된 살라딘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집트 전 지역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살라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위기감을 느낀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려고 했죠.
하지만 누르 앗 딘은 60세가 넘은 고령이었던 탓에 노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살라딘은 잽싸게 머리를 굴려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버렸는데요.
바로 과부가 된 누르 앗딘의 아내와 결혼하고 누르 앗딘의 어린 아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그의 영토를 통째로 집어삼켜버린 것이죠.
이후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면서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리아와 이집트를 모두 지배하는 술탄이 된 살라딘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유브'라는 왕조를 건설하게 되죠.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된 살라딘이었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이라는 것이었는데요.
때문에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자신만의 확고한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당시 이슬람 세력과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던 십자군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는데요.
기독교인들에게 점령당한 그들의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게 된다면 자신이 이슬람의 구세주이자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죠.
그전까지만 해도 살라딘은 예루살렘이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길 원했는데요.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이유로 마음을 바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아말릭 1세의 뒤를 이은 보두앵 4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요.
살라딘은 보두앵 4세의 나이가 어린 데다 한센병(문둥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살라딘은 약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출병한 몽기사르 전투에서 십자군 기병의 강력한 중앙 돌파에 무너지며 패배를 맛보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 왕국과 휴전 협정을 맺고 후일을 기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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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이 이집트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는 사이에 예루살렘에서는 보두앵 4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었던 보두앵 4세의 조카 보두앵 5세마저 즉위 1년 만에 사망하면서 왕의 자리가 비게 되는데요.
이에 보두앵 4세의 누나이자 보두앵 5세의 어머니였던 시빌라가 여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빌라에게는 능력은 없으면서 잘생긴 외모 하나만 믿고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던 '망나니 기'라는 남편이 있었는데요.
여왕이 된 시빌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남편인 망나니 기에게 예루살렘의 왕 자리를 넘겨버렸죠.
그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은 시빌라와 기 그리고 그들을 반대하는 세력들로 나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예루살렘 왕국에 르노 드 샤티용이라는 기사가 있었는데요.
그는 갑자기 살라딘과의 휴전협정을 깨고 함대를 동원해서 이슬람의 교역로와 순례길을 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이슬람교의 성지까지 위협하기 시작했죠.
이에 분노한 살라딘은 1187년 마침내 십자군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게 되는데요.
예루살렘왕국에서도 살라딘에 대항해서 세포리스라는 지역에 방어진지를 만들게 됩니다.
유럽 측 기록에 의하면 이때 십자군 연합군에는 1,200명의 기사를 포함해 수천 명의 경기병과 1만여 명의 보병 그리고 석궁병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살라딘은 이미 방어준비를 마친 세포리스를 공격하는 대신 십자군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티베리아스라는 요새를 공격해 함락시켜버렸죠.
살라딘이 의도한 대로 십자군은 티베리아스를 구하기 위해 진지를 떠나게 되는데요.
이후 살라딘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하틴의 뿔'전투가 시작됩니다.
당시 십자군을 지휘하던 사람은 바로 '망나니 기'였는데요.
그는 티베리아스로 오던 도중 어떤 숲에서 야영할 것을 지시했는데 그곳은 양옆으로 두 개의 화산이 뿔처럼 나있기 때문에 하틴의 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죠.
그런데 그 지역은 주변에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십자군은 급하게 요새를 구하러 오느라 무더운 날씨 속에서 마실 물을 제대로 챙겨오지도 못한 상태였는데요.
적군의 상황을 눈치챈 살라딘은 아예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해버린뒤 주변의 오아시스까지 점령해버리며 그들을 포위해버렸죠.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십자군을 상대로 살라딘은 이른 새벽시간을 틈타 번개같은 기습을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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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몽기사르 전투에서 십자군 기사단에게 호된 맛을 본 적이 있던 살라딘은 매우 신중하게 공격에 임했는데요.
먼저 연기를 피워 십자군이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든 후에 사방에서 그들에게 화살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죠.
십자군 기사단은 살길을 찾기 위해 돌파를 시작했지만 살라딘은 기사단의 돌파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그들을 그냥 통과시켜준 후에 다시 그들을 포위해버렸습니다.
그렇게 기사단과 보병이 분리된 십자군은 살라딘의 부대 앞에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죠.
그렇게 전투는 살라딘의 대승으로 끝났고 망나니 기와 르노 등의 십자군 지휘관들도 포로로 붙잡히게 되는데요.
살라딘은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슬람 성지까지 공격했던 르노는 처형해버렸지만 눈물을 흘리며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망나니 기에게는 눈을 녹인 얼음물을 대접해 주며 그의 목숨을 살려줬다고 하죠.
이 하틴의 뿔 전투는 이슬람군이 십자군에게 자신들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준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게다가 살라딘은 하틴의 뿔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십자군의 기사들 전부를 처형해버리면서 그동안 십자군에 당했던 이슬람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까지 했는데요.
덕분에 살라딘은 이슬람의 위대한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살라딘을 적대하던 세력들조차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살라딘의 아래로 모여들기 시작했죠.
십자군 연합군을 박살내버린 살라딘을 더 이상 막을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에게 포위당한 채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틴의 뿔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한 발리앙 디블랭이라는 기사가 있었는데요.
그는 예전부터 살라딘과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죠.
비록 자신은 살아남는데 성공했지만 빌리앙의 가족들은 예루살렘을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그곳에 갇혀있는 상태였는데요.
평소 살라딘은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빌리앙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빌리앙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살라딘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라딘과 만난 빌리앙은 얌전히 가족들만 데리고 나올테니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들여보내달라며 간청했고 살라딘은 그런 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죠.
처음에 빌리앙은 자신의 가족들만 데리고 조용히 예루살렘을 나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도시가 언제 점령당할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십자군의 기사를 발견한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그에게 자신들을 이끌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는데요.
빌리앙은 살라딘과 맹세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그들의 청을 거절하며 난감해했죠.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기독교의 주교 한 명이 "개인의 신념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셈입니까?"라며 그를 설득했고 결국 빌리앙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채 살라딘에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
편지에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당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본뜻이 아니니 부디 나의 가족만은 예루살렘 밖으로 보내주십시오."라는 다소 뻔뻔한 내용이 담겨있었는데요.
하지만 살라딘은 빌리앙의 이런 편지를 보고 나서도 화난 기색 없이 그의 가족들에게 호위까지 붙여 안전한 곳으로 보내줬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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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빌리앙은 예루살렘의 시민들을 모아 방어를 시도했지만 살라딘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패배를 직감한 십자군은 그제서야 살라딘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살라딘은 그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는데요.
이때 빌리앙이 혼자서 살라딘을 만나러와 협상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는 살라딘에게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곳에 있는 이슬람인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죠.
만약 궁지에 몰린 십자군이 그들의 협박을 실천에 옮긴다면 살라딘 또한 그의 정적들에게 공격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살라딘으로서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 사실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는데요.
살라딘은 3차 십자군과의 전투에서는 사자심왕 리처드의 존재로 인해 전투에서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죠.
하지만 당시 십자군은 여러 세력들 간의 불화로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내키는 데로 움직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결국 살라딘과 협정을 맺으며 원정을 포기하게 됩니다.
살라딘은 협정을 맺은 후 몸 상태가 악화되어 몸져누웠는데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죠.
살라딘은 단호함을 보여야만 하는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군에게도 많은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도 평이 좋았다고 하는데요.
이슬람 세계에서도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영웅이라고 하죠.
물론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굉장히 뛰어났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상대와 협상하는 외교력이 그의 최고 강점이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자비와 관용의 군주 살라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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