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최고의 가문인데요.
그들이 후원한 인물만 봐도 어마어마하죠.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도시 피렌체는 중세 시절 건축과 예술로 이름을 알린 르네상스의 본고장이죠.
이곳은 매년 수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피렌체가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가문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메디치 가문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1230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행적을 알 수는 없지만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에서 피렌체로 이주해온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고리대금업으로 가문의 사업을 시작한 메디치 가문은 큰 성공을 거두며 부유한 은행업자로 성장하게 되죠.
당시 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다고 하는데요.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평가받기도 했죠.
부유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정치적으로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럽의 귀족사회에 합류하게 됐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문장을 수여받기도 했죠.
마침내 1434년 코시모 데 메디치라는 사람이 비공식적인 국가원수 자리를 인계받으며 메디치 가문은 사실상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코시모와 그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는 자신들의 기반을 확실히 다지기 위해 은행업과 제조업으로 벌어들인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 정도가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어 일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도시 안에서만큼은 그야말로 왕족과 같은 영향력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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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의 아들 피에로가 정권을 잡은 5년 동안은 그가 예술 후원사업에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피렌체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지배력이 약해진 적도 있었는데요.
그의 아들인 로렌초 데 메디치 대에 들어서는 다시 본격적으로 후원이 시작되며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11월이 되면 몇몇 별장에서 플라톤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는데 이중에서도 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이 많이 참여하는 곳에는 로렌초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문화예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죠.
그리고 로렌초는 소년들에게 좀 더 넓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으며 유명한 이탈리아의 조각가 도나텔로의 제자인 베르톨도 디 조반니를 교사로 고용하면서 다양한 그림과 고대 흉상 그리고 조각들을 학교의 화실과 야외에 세우도록 빌려주기까지 했다고 하네요.
로렌초는 학교를 세우면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라는 화가에게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추천받았는데 이때 그의 추천을 받아 입학한 것이 바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인 미켈란젤로라고 합니다.
로렌초, 미켈란젤로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로렌초는 미켈란젤로가 난생처음으로 조각칼을 쥐고 대리석 작업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노인의 얼굴을 조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조각 실력을 본 로렌초는 크게 감탄했다고 하죠.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미켈란젤로는 그저 자신의 상상대로만 조각을 했기 때문에 이를 본 로렌초가 노인들은 이빨이 그토록 온전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하는데요.
로렌초가 자리를 뜨자마자 미켈란젤로는 조각상의 이빨 중 하나를 부쉈다고 하죠.
그리고 조각상의 잇몸 부분을 파내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는 로렌초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잠시 후 그 모습을 본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순진함과 뛰어난 기술에 크게 웃었다고 하네요.
얼마 후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아버지인 로도비코에게 부탁해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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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메디치 가문의 사람으로 대하면서 고귀한 손님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비서 역할을 맡기면서 4년 동안 곁에 머물게 했다고 하네요.
로렌초는 작가와 학자들을 후원하는 한편 귀한 책이나 원고들을 수집하기도 했다고 하죠.
그리고 책 사냥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고용해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는 책이나 원고들을 찾아오게 했는데 당시 그가 가져온 200권이 넘는 그리스 작품들에서는 그 절반이 존재 여부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외에도 삽화가와 서기들을 고용하면서 원고의 사본을 만들어 도시 안팎의 여러 도서관이나 공공시설, 도서관에 복사본을 제공했다고 하죠.
1472년에는 피사 대학을 토스카나의 주요 대학으로 지정하면서 매년 12,000플로린(약 95억원)의 돈을 기부하기도 했는데요.
비록 로렌초가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예술가들을 도와주는 편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직접 도와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피렌체의 후원자들에게 주문을 많이 받도록 중간에서 주선해 주거나 다른 곳으로부터 일거리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고 하죠.
그는 베로키오의 제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재능에도 관심을 가져 밀라노의 로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에게 다빈치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고 하네요.
로렌초는 예술품 수집 또는 예술가를 지원하거나 조언하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시를 직접 써보기도 하는 등 예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죠.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조각, 건축, 시, 문학 그리고 인문학과 철학, 과학, 음악에 두루 영향을 줬는데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보티첼리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마키아벨리와 도나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이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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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은 그들이 만든 대부분의 작품들에 후원을 아끼지 않으며 그들이 예술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고 하죠.
그 결과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에 있는 피렌체는 현재 도시 전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데 메디치가 죽은 지 2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를 넘어 전 세계 예술에 영향력을 끼치는 곳으로 남아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가문 중 하나라 불리는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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