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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구스타프 2세 아돌프. 화기 위주의 전법으로 근대 전쟁 역사를 뒤바꾼 스웨덴의 전설적인 명장

by 사탐과탐 202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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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전 세계 역사상 손에 꼽히는 명장입니다.
그로 인해 화기 위주와 참호전 등 근대 전쟁 역사가 뒤바뀌게 되었죠.
스웨덴의 전설적인 국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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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겨난 이래 수없이 많은 나라가 세워지고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의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죠.

그런데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뛰어난 군주라고 할지라도 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면은 조금 아쉽고 나라를 잘 다스린 왕은 군사적인 업적이 크게 뛰어나지 못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 두 가지를 다 잘 해낸 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사람만큼 잘 해낸 군주는 없었을 거라고 짐작되는데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입니다.

 

구스타프 2세는 스웨덴 바사 왕조의 6번째 국왕으로 북방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하는데요.

그는 약 20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북방의 작은 왕국에 불과한 스웨덴을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로 만들었죠.

그는 군사 경제 정치 등 여러 면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을 이뤄내며 스웨덴을 작지만 강한 나라로 바꿔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역사학과 법학, 신학, 통치학, 전쟁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공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외국어를 배우는데도 능통해서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도 능숙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스페인어와 영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고 하죠.

구스타프 2세는 어릴 때부터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10살 때부터 백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5살 무렵에는 직접 한 지역을 맡아 다스렸는데 백성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자주 열어 그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는 등 단순히 백성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자 하는 열린 태도를 갖춘 군주의 모습을 보였죠.

구스타프 2세는 16살의 나이에 스웨덴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요.

지금은 세계적인 복지강국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스웨덴이지만 그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당시의 스웨덴은 150만밖에 되지 않는 적은 인구에 변변한 기술조차 없었던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왕위에 오를 당시 스웨덴은 폴란드와 덴마크, 러시아 등 주변의 세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이런 위기 속에서 구스타프 2세는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하며 러시아, 덴마크와의 분쟁을 마무리 짓게 되죠.

그리고 그때부터 스웨덴을 강대국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을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나라를 과감하게 개방하는 정책을 펼쳤는데요.

철이나 총, 대포, 선박을 만드는 기술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기로 한 것이죠.

게다가 그들이 만든 물건들을 외국에 마음껏 팔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까지 했는데요.

제조업과 무역에서 나오는 세금은 당시 스웨덴을 운영해나가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단기적인 이득을 포기하는 대신 길게 보는 안목으로 스웨덴 경제의 잠재력을 키우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죠.

 

구스타프 2세의 전략은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수많은 장인들과 무역업자가 스웨덴으로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는데요.

덕분에 스웨덴은 필요한 소총과 대포, 군함 등 군사 무기들을 국내에서 자체 생산해낼 수 있게 되죠.

 

게다가 스웨덴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던 나라의 기술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전수받으며 국내 산업과 과학기술도 큰 발전을 이루게 되죠.

이때의 성공을 바탕으로 스웨덴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병원을 비롯한 각종 구호시설을 늘리면서 백성들의 생명을 돌보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법정과 대학을 세우는 등 법치주의 질서를 세우고 인재들을 기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하죠.

 

하지만 구스타프 2세는 위와 같은 업적들보다는 군사적인 혁신을 이룬 점에서 사람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그는 먼저 유럽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국가 단위 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이전까지 대부분 국가에서는 위기 상황이 왔을 때 민병대가 조직되는 것에 불과했고 제대로 된 '국가상비군' 개념의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스웨덴이 처음이라고 하죠.

 

그리고 그는 보병과 기병, 포병 간의 협동 전술을 비롯해 통일된 규격 없이 제작되던 대포를 규격화시켰으며 기병들에게 권총과 칼을 들고 돌격시키는 등 전술적으로 많은 혁신을 이뤄내면서 후세의 전략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는데요.

특히 그는 30년 전쟁(유럽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를 지지하던 국가들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핵심적인 무기였던 머스킷 소총을 빨리 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사격전에서는 소총수가 화약을 얼마나 정확한 양만큼 빠르게 점화관 속에 넣느냐가 매우 중요했는데요.

구스타프 2세는 알맞은 양의 화약을 담은 종이 화약 포대를 미리 만들어둬서 소총수가 종이를 찢고 안에 든 화약을 통째로 총구 안으로 붓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전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전술 외적인 국방 행정에서도 많은 혁신을 이뤘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 징병제와 예비군 제도, 직업군인 제도를 최초로 실시해 현대 시대 총력전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것이 바로 구스타프 2세라고 하죠.

이 부분이 그가 이뤄낸 전술적 혁신보다 더 큰 업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토목공학을 이용해 역사상 처음으로 참호를 파서 적의 공격을 피하는데 쓴 것 또한 구스타프 2세의 스웨덴군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혁신적인 전술을 바탕으로 구스타프 2세의 군대는 유럽 최고의 정예군으로 거듭나게 되죠.

30년 전쟁에도 참전하면서 당시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던 신교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사를 바꿔버리게 됩니다.

 

그는 가톨릭교의 주력을 형성하던 스페인 군대에 맞서 혁신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는데요.

당시 스웨덴의 병력은 총 4만 5000명으로 스페인군 30만, 프랑스군 15만 명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규모였죠.

그런 병력의 부족에도 스웨덴군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획기적인 보병전법을 개발한데다 새로운 무기까지 도입한 덕분이었는데요.

 

구스타프 2세는 보병을 세 줄로 세워 1열은 무릎쏴 자세로 2열은 선채로 앞줄 병사의 머리 위로 3열은 2열의 틈새로 총알을 날리는 밀집보병전술을 사용했는데 그 전술 앞에 적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그는 자신의 포병부대에 '레예멘츠스튀케'라는 무게가 가벼운 대포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대포는 성을 공격할 때나 썼던 무기로 지상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철로 만든 대포는 엄청나게 무거운데다 부식이 잘 됐기 때문에 여러모로 쓰기가 불편했고 상대적으로 무게가 가벼운 청동대포는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었죠.

 

그런 와중에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철제대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때 누구보다 빠르게 영국의 대포기술을 습득해 혁신적으로 가벼운 대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구스타프 2세였는데요.

그렇게 밀집보병의 머스킷 집중사격과 새로운 대포를 앞세운 스웨덴군은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먼저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가톨릭 진영에서 폴란드를 제거했으며 이후 독일의 작센과 바이에른을 점령하는 등 승리를 거듭했죠.

그리고 얼마 후 벌어진 뤼첸전투에서 신성 로마제국의 명장 발렌슈타인을 맞아 싸우게 되었는데요.

전투는 스웨덴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지휘관인 구스타프 2세가 전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늘 선두에 서서 싸웠는데 이번에는 불행히도 적의 총탄이 그를 피해 가지 않았던 것인데요.

평소 그런 스타일 때문에 부하들이 선두에 서는 것을 말리기도 했지만 구스타프는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죽음이 두렵다. 하지만 지휘관인 내가 목숨이 아까워 뒤에 숨어만 있으면서

어떻게 부하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대답했다고 하죠.

 

어찌 보면 미련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절대적으로 수가 적은 스웨덴군을 이끌고 있는 입장에서 최정예 부대를 만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최전선에 섰던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게다가 구스타프는 평소에도 병사들을 잘 챙겨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직접 육성한 상비군에 대한 애착이 아주 강했으며 평소에도 병사들과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는 등 생활을 같이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 큰 실수가 아닌 한 병사들의 실수를 대부분 용서해 줬으며 병사들의 보급품에도 많은 신경을 써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웨덴군 또한 구스타프 아돌프를 매우 좋아하며 따랐고 뤼첸전투도중 구스타프가 전사했을 때도 스웨덴군은 혼란에 빠지기는커녕 극도로 분노하며 돌격을 실시해 구교군을 박살 내버렸다고 하네요.

 

그의 이러한 업적 때문에 나폴레옹은 구스타프를 한니발, 카이사르, 알렉산더 대왕 등과 함께 7대 명장으로 꼽았으며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등 여러 국가들에서는 그를 롤모델로 삼기도 했죠.

지금까지 중세의 전쟁을 화기를 주력으로 쓰는 근대전으로 바꾸면서 현대 전투의 기틀을 마련했다고도 볼 수 있는 구스타프 2세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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