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대제가 공화국 수준의 러시아를 제국으로 바꿀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면 예카테리나 2세는 제국으로서의 러시아를 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남성 편력 때문에 비판도 어마무시한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서로가 한 명의 배우자만을 갖는 일부일처제가 대부분이지만 과거에만 해도 왕이나 귀족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었죠
그런데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많은 남자들을 곁에 뒀던 인물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죠
러시아의 위대한 여제라 불렸던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예카테리나는 1729년 프로이센왕국에서 독일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열성적으로 딸의 교육을 시킨 덕분에 예카테리나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하죠
예카테리나의 외삼촌이 과거 러시아의 6대 황제인 옐리자베타 여제와 약혼했던 인연이 있었던 덕분에 그녀는 러시아의 초대 황제 예카테리나 1세의 외손자인 표트르 3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때 이름을 개명해서 기존의 '조피'라는 독일식 이름을 버리고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러시아 이름을 쓰게 되죠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 부부는 신혼 시절까지는 같은 독일계 혈통이라는 점 때문에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과 옐리자베타 여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친 러시아 노선을 걷게 되면서부터 둘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남편인 표트르는 평소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같은 성향이 있었던 데다 심각한 성불구라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었기 때문에 둘의 사이가 좋아질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하죠
그래서 둘 사이에는 아주 오랜 시간 부부관계가 없었고 18년간 각자 애인을 따로 두고 살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예카테리나도 남편에게 맞춰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성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나중에는 결국 남편을 혐오하는 수준으로 변했고 9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를 피해 다니면서 부부 관계도 거부했다고 하네요
그러다 엘리자베타 여제로부터 자식을 안 낳을 거면 내쫓아버리겠다는 소리를 듣고는 마지못해 첫 아들인 파벨을 낳았고 이후부터는 다른 남자들과 마음껏 놀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황실에 시집온 후로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히 러시아어와 문화를 공부하고 심지어 종교까지 러시아 정교로 개종한 예카테리나와 달리 뼛속까지 독일인이었던 표트르 3세는 계속해서 독일풍을 선호하고 개신교를 고집했기 때문에 러시아 안에서도 그리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하죠
게다가 그는 1762년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엄청난 뻘짓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스웨덴과 연합하며 프로이센을 상대로 굉장히 유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는데요
그런데 표트르 3세는 뜬금없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그만둘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점령한 프로이센의 영토를 배상금도 받지 않는 조건으로 돌려주며 그들에게 병력까지 빌려줄 것을 제의하는 등 마치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가 상대에게 내걸만한 조건을 독단적으로 제시했죠
이게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사건으로 이 굉장한 뻘짓은 러시아 귀족들의 격렬한 분노를 샀으며 예카테리나 역시 남편의 행동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평소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됐음을 만천하에 알렸죠
표트르 3세는 얼마 후 체포되었고 8일 후에 감옥에서 죽게 됩니다
이후 예카테리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러시아를 개혁하고 국력을 키우는데 집중했죠
그렇게 그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러시아의 행정과 법률 제도는 점차 안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볼테르와 레온하르트 오일러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유럽 각지에 퍼져있는 그림과 조각들을 수집해 현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2번에 걸친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합작하며 폴란드의 일부 영토를 얻기도 하는 등 러시아의 세력을 넓히기도 했죠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발틱해에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확보하며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무역과 산업이 나날이 발달하게 되면서 러시아는 점점 부강해졌으며 문학과 미술, 음악 등 많은 예술 분야에서도 성장을 하게 되죠
그로 인해 러시아는 유럽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경제의 중심부까지 단숨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표트르 대제가 공화국 수준의 러시아를 제국으로 바꿀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면 예카테리나 2세는 제국으로서의 러시아를 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죠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예카테리나 2세를 '러시아의 자긍심' 또는 '러시아의 가장 완벽한 군주'라 부른다고 하네요
물론 예카테리나 여제에 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아무리 남편이 무능하다 해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됐다는 점 그리고 약 200여 명에 이르는 애인을 둔 남성 편력 즉위 초에는 "국민이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군주가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라며 계몽군주를 자처했지만 이후 귀족계급의 지지를 받기 위해 농노제도를 계속 유지하며 훗날 농노 반란이 일어난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 등이죠

예카테리나는 특히 애인을 많이 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이 60세가 넘어서 죽음을 앞에 두던 순간까지도 수많은 애인들을 두고 있었다고 하죠
예카테리나 2세는 몇 년에 한 번씩 애인을 갈아치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래도 헤어진 애인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영지 관직 등을 하사하며 잘 대접해 줬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그녀가 그토록 많은 남자들을 사귀었던 데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요
귀족 명문가의 자제들이나 유능한 신하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한편 적지 않은 보상을 주면서 그들을 완전히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었다는 점 때문이죠
그녀가 젊고 잘생긴 귀족 청년들뿐만 아니라 실력 있고 명망 높은 장군과 신하들까지 애인으로 뒀던 것이 그 증거라고 합니다
예카테리나는 애인을 선발할 때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는데 우선 의사가 애인 후보들의 건강검진을 하고 검진에 합격한 후보자는 지적 능력과 황제를 즐겁게 해 줄 만한 소양을 갖추었는지 추가로 검사를 받게 되죠
마지막으로 황제의 측근 여성과 시험적인 합방을 거치는 실전 테스트에까지 합격하면 그제야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말년에는 교양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크고 아름다운 물건을 가지고 있거나 잘생기고 젊은 미남이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하네요
황제의 수많은 애인 중에 그레고리 포템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카테리나 2세보다 열 살 연하였으며 그곳의 크기가 크고 우람해 마치 말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하죠
포템킨은 근사한 선물을 자주 보내 여제의 환심을 사고 그녀에게 거의 매일 장문의 편지를 보내면서도 한 번도 지겨워하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제를 위해 온갖 종류의 유흥거리를 준비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노래까지 지어서 바쳤다고 하죠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점점 예전만 못해지자 스스로 황제의 애인감을 물색하고 다니는 등 그야말로 처세의 달인이었다고 합니다

1787년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크림반도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자 아직 개발이 덜 된 크림반도의 상황을 감추고 황제의 환심을 얻기 위해 주변 지역에 겉만 화려한 가짜 마을을 만든 후 여제에게 보여줬죠
이후 포템킨은 여제가 그곳을 통과하면 다음 시찰 지역에도 가짜 마을을 만드는 방식으로 여제의 눈을 속였습니다
이후로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비어있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마을에는 포템킨 빌리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여제라 불리는 예카테리나 2세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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