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파두르 부인은 최초로 귀족 출신이 아닌데 루이15세의 애첩이 되었죠.
루이15세는 죽을때 까지 그녀를 사랑했었다고 하는데요.
퐁파두르 부인은 20년 가까이 베르사유 궁전의 실세로 지내면서 프랑스의 정치와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이 있습니다.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재탄생시킨 베르사유 궁전이죠.
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20년 가까이 머물면서 당시 국왕이었던 루이 15세의 연인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있었던 유명한 여성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리며 프랑스의 정치와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퐁파두르 부인입니다.
퐁파두르 부인의 본명은 잔 앙트와네트 푸아송으로 후일 그녀가 퐁파두르 후작의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퐁파두르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죠.

잔 앙투아네트는 1721년 12월 파리에서 부유한 평민이었던 푸아송 집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횡령 혐의를 받고 다른 나라로 도망간 탓에 잔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없이 자랐다고 하죠.
상당한 미인으로 소문난 잔의 어머니는 권세가들의 후원을 받고 그들의 애인 역할을 해주는 '코르티잔'으로 결혼을 한 뒤에도 매춘행위를 했기 때문에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사실은 잔의 친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의 애인 중 하나였던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라는 인물이었을 거라며 의심하는 역사학자들이 많다고 하는데요.
이 투르넴이라는 인물은 잔의 아버지가 가출하면서 생활이 어려워진 푸아송 일가를 강력히 후원하고 어린 잔의 공부에도 많은 돈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잔이 성장한 후에는 자신의 조카와 그녀를 결혼시킨 후 재산을 물려주기로 약속하고 나중에 그녀가 왕의 정부가 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자신의 조카가 아내였던 잔이 왕의 애첩이 되는 것을 반대했자 조카를 설득해서 아내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잔은 아주 어린 시절 루이 15세의 결혼식 행렬이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 이후부터 왕의 애첩이 될 마음을 먹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어떻게든 루이 15세에게 접근하려고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왕에게는 사토루 여공작이라는 애첩이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찾지 못하고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루이 15세와 처음 만난 것은 왕의 사냥터였다고 하죠.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는 신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분장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녀는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 분장을 하면서 루이 15세에게 접근했고 잔의 미모에 반한 루이 15세는 그때부터 그녀와 내연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루이 15세의 젊은 정부인 샤토루 공작부인이 갑자기 죽자 잔에게 그 자리를 대신할 기회가 찾아왔죠.
그녀는 곧바로 남편과 법적인 이혼 절차를 밟은 뒤 메트레상티트르(프랑스 국왕의 공식애첩)로 인정되어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는데요.
이후 루이 15세로부터 퐁파두르 지방의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고 퐁파두르 여후작이 되었죠.
그렇게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최초로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출신의 메트레상티트르가 되며 인생역전에 성공하게 됩니다.
당시 왕궁으로 쓰이던 베르사유 궁전으로 들어오게 된 그녀는왕궁의 다락방 몇 개만을 사용하며 왕비를 비롯한 왕궁의 주요인물들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자신을 낮췄다고 하죠.
그 후 5년의 세월 동안 왕궁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고 마침내 아래층의 정식 왕실 거처를 배정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평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를 좋아하고 외향적이었던 루이 14세와는 달리 당시 국왕이었던 루이 15세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꺼려 했다고 하죠.
게다가 평소 아는 사람을 마주쳐도 인사를 잘 하지 않고 예의상 날리는 칭찬 같은 것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몇 시간 전까지 친절히 대하던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직위를 박탈해버리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는 그런 행동들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의 성격 때문에 나온 것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를 위선적인 인물이라 생각했죠.
때문에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도 루이 15세의 이런 성격에 적응을 하지 못하며 둘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왕의 성격을 제일 잘 받아준 것이 퐁파두르 부인이었다고 하죠.
그녀는 루이 15세와 단순히 성적인 관계만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주제로도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가 되어주었으며 다른 귀족 부인들처럼 고상한 척 점잔 떨지 않고 언제나 편안하게 그를 대해줬다고 합니다.
때문에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심하게 의존했고 왕이 바라면 언제 어디서나 성관계에 응해줘야 했기 때문에 루이 15세가 살롱이나 방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퐁파두르 부인을 찾으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방 안에서 성관계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하죠.

심지어 퐁파두르 부인은 나이가 들면서 루이 15세와 성관계를 하기 힘들어지자 베르사유 궁 근처에 '사슴 정원'이라는 하렘을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이 15세는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퐁파두르 부인뿐이다" 라는 찬사를 보내며 죽을 때까지 그녀를 총애했다고 하네요.
그녀가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은 국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은 왕비가 여행을 가게 되자 자신이 그녀의 숙소를 관리하겠다며 자원했고 당대의 패션리더 소리를 듣던 자신의 감각을 살려 왕비의 숙소를 매우 아름답게 꾸며놓았다고 하죠.
돌아온 왕비는 크게 만족하며 "국왕 폐하께서 꼭 첩을 두셔야만 한다면 퐁파두르 부인만은 인정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국왕과 왕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 퐁파두르 부인은 그때부터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죠.
예술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늘 책을 가까이하고 서재 꾸미기를 좋아했으며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는 최고의 스폰서였다고 하는데요.
미술사학자들은 로코코 예술이 루이 15세 시절 크게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 덕분이었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고 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시대의 예술을 로코코 양식이 아닌 마담 드 퐁파두르 양식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할 정도라고 합니다.
때문에 퐁파두르 부인의 살롱(상류계급의 사교모임)은 당대의 사상가와 문학가가 모이는 지식의 장이 되었죠.
그녀는 연극과 공연을 좋아해 극장이나 소극장을 건립하는 것은 물론 개인 극장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연출한 연극을 상연하기도 했으며 성과 광장 같은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이나 프티 트리아농이 건설될 수 있도록 후원을 했다고 하죠.
게다가 결혼 지참금이 없는 여자들을 도와주거나 신부의 옷을 마련해 주기도 하는 등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퐁파두르 부인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만든 것은 바로 그녀가 문학과 철학의 후원자였다는 것인데요.
그녀는 특히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는데 국왕인 루이 15세가 위험인물로 분류했던 볼테르와 루소를 후원했으며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 출판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출판된 백과사전은 계몽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며 결국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죠.
다만 퐁파두르 부인의 외교적인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국정을 쥐고 휘두르게 된 그녀는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3국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영국연합을 상대로 7년 전쟁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전쟁이 결국 패전으로 끝나면서 북아메리카와 인도에 있던 많은 식민지를 잃게 됐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패배에도 루이 15세는 변함없이 퐁파두르 부인을 총애했으며 그렇게 그녀의 시대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듯했는데요.
하지만 퐁파두르 부인의 나이 43세가 되던 1764년 그녀는 갑작스러운 폐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실 앞에서 나왔던 내용들만 보면 그녀가 편안하고 화려한 삶만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평생 귀족들의 비난을 받으며 살았다고 하죠.
게다가 왕의 애첩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퐁파두르 부인은 늘 독살당할 위험에 노출됐고 덕분에 그녀는 반드시 자신의 처소에서 직접 하녀를 시켜 만든 음식만 먹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프랑스의 왕관 없는 여왕이라 불리던 퐁파두르 부인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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